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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온몸으로 불 꺼서 주인 구한 의견(義犬), ‘의구총’으로 전한다

by 낮달2018 2022.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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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 낙산리에 있는 의구총. 원래 있던 자리에서 일선리로 옮겨졌다가 원래 자리인 지금 자리로 다시 옮겼다.

구미에는 ‘의로운 소’의 무덤만 있는 게 아니라 ‘의로운 개’의 무덤 ‘의구총(義狗塚)’도 있다. 의구총은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에서 25번 국도를 따라 상주로 넘어가는 길, 해평면 낙산리 큰길가에 있는 조선 후기 개 무덤이다. 낙산리 삼층석탑에서 10여 분만 더 가면 길 오른쪽의 의구총에 이른다. [관련 글 : 구미 의우총 이야기, 소의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25번 국도 따라 의우총 이어 ‘의구총’도 있다

 

의구총의 유래담도 1655년(현종 6) 선산 부사 안응창(1603~1680)이 지은 ‘의구전조(義狗傳條)’에 전해져 온다. ‘의구’의 일은 ‘의우의 일’이 있기 오래전에 일어난 일로, 그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다.

 

선산부(善山府) 동쪽 연향(延香 :지금의 해평면 낙산리)에 사는 역졸(驛卒) 노성원(盧聲遠)이 영리한 개 한 마리를 길렀다. 하루는 성원이 술에 취하여 돌아오다가 월파정(月波亭) 북쪽 큰길가에서 그만 말에서 떨어져 잠이 들어 버렸다.

 

때마침 들불이 일어나 주인 근처로 번져왔다. 크게 짖으며 주인의 옷자락을 잡아당겼으나 주인이 깨지 않자 개는 수차례나 강으로 달려가서 제 몸을 물에 담갔다가 와서 주인 주변의 풀을 적셔 불을 껐다. 마침내 불은 꺼졌지만, 개는 기진맥진하여 숨이 끊어졌다.

 

성원이 술이 깨어 일어나 보니 개가 죽었는데 꼬리는 그을었고, 사방이 불에 탄 흔적이 역력했다. 그는 개가 자신을 구하고 죽었음을 깨닫고 감동하여 개의 시신을 거두어 묻어 주었다. 훗날 사람들이 그 의로움을 기려서 그곳을 ‘개 무덤 터’[구분방(狗墳坊)]이라 하니 지금도 행로 가에 그 무덤이 있다고 하였다.

▲ 선산 부사 안응창이 고을의 노인 이야기를 듣고 의구총이란 빗돌을 세우고 의구전을 지어 이를 기렸다.

고을 노인을 불러 이 이야기를 들은 안 부사는 빗돌을 세우고 ‘의구전’을 지어 이를 기렸다. 의구총 봉분은 지름 2m, 높이 1.1m로 사람의 묘와 비슷하다. 빗돌은 나지막한 자연석에 한자로 ‘義狗塚’이라 새겼다고 하는데 현재 받침돌에 가려 ‘의구’만 보인다. 1745년 선산 부사 박익령이 화공에게 약가의 정열을 그린 ‘의열도(義烈圖)’ 4폭과 함께 ‘의구도(義狗圖)’ 4폭을 그리게 하여  <의열도>(중간본)에 첨부하였다.

 

주인을 구한 의구, <의열도>에도 올랐다

 

이 무덤은 1952년 도로에 편입되는 공사 중 비 일부가 파괴된 것을 봉분과 아울러 수습하여 근처 일선리 마을 뒷산에 이장하였다. 그러나 다시 일선리에 마을이 조성되자, 원래의 위치에 가까운 현 위치에 옮겨 왔다. 이장하면서 화공이 <의열도>에 남긴 ‘의구도(義狗圖)’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웠다. 무덤 뒤에 벽을 세우고 그림을 조각한 것은 의우총과 같다.

 

낙산리 의구총에 관한 내용은 선산의 읍지인 <일선지>, <선산부읍지>, <선산읍지> 등과 <파수록>, <한거잡록>, 신돈복의 <청구야담>, 심상직의 <죽서유고> 등에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책에서는 개 주인이 김성원(金聲遠) 또는 김성발(金成發)로 바뀌기도 했다.

▲ 현 위치로 이장하면서 1745년 화공이 <의열도>에 남긴 '의구도' 4폭을 화강암에 확대, 조각하여 봉분 뒤에 세웠다.

‘의구전’이 실린 <의열도(義烈圖)>는 조선조 후기 두 차례 목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선산 지역의 여성의 정열(貞烈)과 짐승의 의로움을 기린 이 <의열도> 초간본은 1703년 당시 선산 부사 조구상(1645~1712)이 펴냈다. 백성들에게 의와 열을 교화하고자 펴낸 이 책은 글 모르는 백성들이 알기 쉽게 그림을 앞세우고 뒤에 관련 글을 붙였다.

 

초간본에는 조부인 조찬한(1572~1631)이 의우총을 세우고 화공에게 ‘의우도(義牛圖)’를 그리게 하고 지은 ‘의우도서(義牛圖序)’와 ‘열녀 향랑(香娘)’을 다룬 ‘열녀도’와 ‘열녀도기(記)’로 구성되었다. 중간본은 1745년 선산 부사 박익령(1695~1776)이 초간본에 열녀 ‘약가(藥哥)’와 ‘의구(義狗)’의 일을 더하여 펴낸 것이다. [관련 글 : 빗돌로 남은 두 여인, ‘열녀인가 주체적 여성인가]

▲ 의구총 빗돌. 나지막한 자연석에 '의구'를 새겼다.
▲ 의구전. 김수기 구장본 <의열도> 중간본 중에서

의구(의견) 설화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갚는 개에 관한 설화나 개 무덤에 관한 설화로 전국에 분포되어 있다. 가장 오랜 기록은 고려시대 최자(崔滋)가 지은 <보한집(補閑集)>에 전북 임실군 오수면 오수리에 전하는 오수(獒樹 : 개 나무) 개 설화가 전한다.

 

전북 임실 오수 개 설화가 의구총 이야기와 판박이 ‘진화구주형’ 

 

개성에서 펴낸 일종의 패관문학서(길거리나 마을에 떠도는 이야기에 창의성과 윤색이 가미된 산문 문학)인 이 책에 전라도 시골 이야기가 실리려면 그건 이미 세상에서 두루 유포된 이야기[광포(廣布)설화]여야 한다. 따라서 이 이야기는 최소한 당시보다 200~300년 전인 고려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설화는 의견 설화 중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한 유형, 즉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인데 구미 의구총 이야기와 판박이다. 배경과 개 주인이 다를 뿐, 술 취해서 귀가 중 주인 길에서 잠이 들고, 산불(들불)이 나고, 개가 몸에 물을 묻혀 주변을 적셔 불을 끄지만, 지쳐서 숨지는 것까지 이야기는 거의 대동소이하다.

▲ 전북 임실군 오수면에 전하는 오수 의견상과 의견비각. 선산 의구와 판박이 이야기다. ⓒ 문화재청

마지막 부분에서 깨어난 주인은 개의 충성심에 감탄하여 무덤을 만들어 묻어 주고 거기 지팡이를 꽂아 두었다. 그것이 나무로 살아나 이 나무를 ‘오수(獒樹)’라 이름 붙이고, 마을 이름도 오수라 불렀다. 지금도 오수시장 옆 공원에는 의견비와 동상을 세워 기리고 있다.

 

의견 설화 속 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지(智)·인(仁)·용(勇)을 갖추어 사람보다도 낫다는 칭송을 듣는 인격화된 짐승이다. 인간에게도 쉬 요구하기 어려운 자기희생, 주인을 구하고자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충의(忠義)에 인간은 빗돌을 세워 그를 기리는 것이다.

 

이 의견 설화에 대해서 <한국민속대백과사전>은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다.

 

‘의견 설화’의 주인공인 개 주인과 의견은 성격에 있어서 대조적으로 나타난다. 개 주인은 대부분 신분이 낮은 사람이다. 개의 도움을 받아 목숨이 구제되거나 억울함이 신원될 정도로 나약한 존재이다. 이와는 달리 의견은 지(知)․덕(德)․체(體)를 겸비한 영리한 존재로 나타나며, 주인에게 들이닥친 위기를 극복하게 해주는 구원적인 존재로 부각된다. 결말에서도 인간보다는 의견이 높이 평가되어 후인에 의해 무덤이나 비석이 세워지는 반면, 주인은 그저 개의 주인일 뿐이다.

의견 설화는 따로 14가지로 분류할 정도로 전국적으로 분포한다. 따라서 그 흔적이라 할 수 있는 ‘개 무덤’이라는 뜻의 마을 이름 등도 많지만, 정작 무덤 자체가 남아 있는 예는 드물다. 인터넷에서 여러 차례 검색해 봐도 실제 개 무덤이 남은 예는 보이지 않으니, 구미의 의구총이 유일한 것일지 모르겠다.

 

선산에 의구총뿐 아니라, 의우총이 두 군데(한 군데는 빗돌만 있다)나 있다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다. 다른 지방에 없는 일이 선산에서만 일어난 것도 아닌데도 그 흔적들이 이렇게 분명하게 남은 것은 무슨 까닭에서일까.

 

 

2022. 9. 6.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⑰] 고아읍 예강리 매학정 일원(梅鶴亭一圓)

[선산 톺아보기 ⑱]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東洛書院)

[선산 톺아보기 ⑲] 중세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과 여헌기념관

[선산 톺아보기 ⑳] 구미시 인의동 모원당(慕遠堂)

[선산 톺아보기 ㉑] 선산읍 독동리 반송(盤松)

[선산 톺아보기 ㉒] 옥성면 농소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5)

[선산 톺아보기 ㉓] 읍내에 외로이 남은 왕조의 유물, ‘선산객사

[선산 톺아보기 ㉔] 그 향교 앞 빗돌 주인은 친일 부역자가 되었다

[선산 톺아보기 ㉕] 복원한 읍성으로 쪼그라든 선산이 새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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