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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고갯길 마애불과 구미 제2공단, 혹은 경제 논리

by 낮달2018 2022. 8.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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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磨崖如來立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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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인동 돌고개(석현) 왼쪽에 솟은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이다.

1992년에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된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인동광장에서 옥계2공단로로 넘어가는 고갯길인 돌고개(석현, 石峴) 왼쪽에 솟은 암벽에 조각된 마애불(磨崖佛)이다. ‘마애(磨崖)’란 ‘갈 마(磨) 벼랑 애(崖)’ 자를 써서 “석벽에 불상이나 글자, 그림 따위를 새김”(다음한국어사전)이라는 뜻이다.

 

마애불, 노출된 바위에 새긴 부처

 

마애불은 엄밀한 의미에서 노출된 바위 면에 조각된 불상을 말한다. 그러나 조각된 면이 깊이 들어간 불감(佛龕 : 불상을 모셔 두는 집 모양으로 된 장. 좌우에 여닫는 문이 있다)이나 사람의 출입이 가능할 정도로 큰 석굴 사원의 벽에 새겨진 것도 이 범주에 넣을 수 있다.

▲ 백제의 서산 마애삼존불(위)과 신라의 경주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 둘 다 국보다. ⓒ 문화재청

마애불의 기원은 기원전 3∼2세기경 인도다. 아잔타(Ajanta)나 엘로라(Ellora) 등 석굴 사원의 외벽과 입구 주벽에서 마애불을 볼 수 있다. 중국에도 윈강(雲岡)·룽먼(龍門)·마이지산(麥積山)·궁셴(鞏縣) 등의 석굴 사원에 마애불이 많다. 우리나라에서도 삼국시대부터 마애불이 제작되어 전국에 흩어진 마애불이 적지 않다.

 

서산마애삼존불(1962 국보)과 태안마애삼존불(1966 보물)은 백제의 마애불이고, 단석산신선사마애불상군(1979 국보)과 경주남산탑곡마애불상군(1963 보물)은 신라의 마애불로 경주남산 일대에 많다. 고려시대 역시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1963 보물)·북한산 구기동 마애여래좌상(1963 보물)·파주 용미리 마애이불입상(1963 보물)·대흥사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1963 보물) 등 전국적으로 많은 마애불이 남아 있다.

▲ 왼쪽부터 태안 마애삼존불(백제), 보은 법주사 마애여래의좌상, 대흥사 북미륵암마애여래좌상(고려). 모두 보물이다. ⓒ 문화재청

마애불이 규모가 큰 작품이 된 것은 자연의 바위 면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또한 법당에 모시는 불상과는 달리 경관이 수려한 자연 속에 있어 부처에 대한 외경심과 경건함을 더욱 북돋울 수 있는 이점이 있으므로 그 제작이 성행한 것으로 보인다. 불교가 민중 속에서 생활 신앙으로 살아 있던 시대였다.

 

수려한 자연 경관 속 부처의 모습


황상동 마애여래입상도 평평한 암벽에 조각된 높이 7.3m의 마애불이다. 백제군에게 쫓기던 당나라의 장수가 어느 여인의 도움으로 이 바위 뒤에 숨어 목숨을 구하였는데, 이곳에 있던 여인은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고 한다. 여인을 부처님이라고 생각한 장수가 이 바위에 불상을 조각했다는 전설이 전한다.

 

민머리 위에는 상투 모양의 큼직한 머리(육계)가 있고, 얼굴에는 이목구비가 잘 정제되어 있다. 귀가 길게 늘어지고 목에는 3개의 주름이 있어 근엄하면서도 자비스러운 인상이다. 양팔에 걸쳐 부드럽게 흘러내리고 있는 옷은 가슴부터 배꼽에 이르는 무늬가 양쪽 다리에 이르러 각기 완만한 활모양의 주름을 이루면서 흘러내린다. 손은 가슴까지 올리고 있는데, 왼손은 바닥이 안을 향하게 하고, 오른손은 밖을 향하게 하여 설법하는 자세를 취하고 있다.

- 문화재청 ‘문화재 설명’ 중에서

▲ 황상동 마애불은 전반적인 인상은 합천 치인리 마애불 입상(왼쪽)을, 이목구비는 홍성 신경리 마애여래입상을 닮았다. ⓒ 문화재청

이 마애불의 전반적인 인상은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진 합천 치인리 마애불 입상과 비슷하며 도상적으로도 같은 설법인 계통으로 보인다. 그러나 옷 주름을 표현하는 방식에서는 세 개씩 모아서 일정한 간격으로 배치해 리듬감을 주고 있고, 옷자락을 몸에 밀착시킨 것처럼 표현하고 있는데, 이러한 기법은 황상동 마애불의 고유한 특징이라 할 수 있다. 현재 마애불의 불두 위에는 보호를 위한 지붕 형태의 석재가 일부 남아 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에서

 

*설법인(說法印) : 수인(手印)의 하나로 여러 가지 형태로 표현되며 일반적으로 두 손등을 맞대어 새끼손가락과 약손가락을 서로 얽고 왼손의 엄지손가락을 돌려다가 오른손의 손바닥에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맞댄 인상으로 전법륜인이라고도 한다.(불교 용어 사전)

▲ 유리 돔을 씌우기 이전의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마애불을 보호하기 위해 유리 돔을 설치했다.
▲ 마애불 뒤에도 암벽이 있었던 것이 아니었던가. 뒤엔 흙이고, 바윗덩어리만 덩그렇다.
▲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은 높이만 7.3m에 이르는 거대한 불상이다. ⓒ 문화유산채널
▲ 마애불을 관리하고 있는 인근의 마애사. 측면 창문 위에 경허선사 자필 편액의 모각 '염궁문'이 보인다.
▲ 마애사 법당의 창문 위의 편액 '염궁문'. 경허선사의 자필을 모각했다.

황상동 마애불은 통일신라시대의 조각 전통이 고려시대에 들어와 어떻게 계승되었는지 보여주는 불상이라고 한다. 입체적인 조각 기법보다는 선각(線刻) 위주로 마애불이 제작되는 고려시대의 조각 기법이 잘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규모의 마애불상을 제작하면서도 균형감을 잃지 않아서 비례가 적절하고 양감이 풍부하지는 않으나 인체의 굴곡이 잘 표현된 점에서 조각가의 뛰어난 기량을 엿볼 수 있다고 한다.

 

경허선사의 수도처, 모각 편액만 남았다

 

이 고개는 한국 근대 선종의 맥을 이은 경허(鏡虛 1849∼1912)선사가 토굴을 지어 수도했다고 전해지는 곳이다. 경허선사는 파계와 기행의 무애행(無碍行)을 펼쳤다. 경허가 득도한 도량은 예산 천장암인데 거기서 몸소 쓴 암자의 편액 ‘염궁문(念弓門)’을 모각(模刻)한 글이 마애사의 법당 창문 위에 걸려 있었다. ‘염궁’은 도를 이루기 위해서는 활을 쏠 때와 같이 집중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경허 ( 鏡虛 1849~1912) 선사

경허선사가 이 고갯길의 토굴에서 정진한 것은 그가 견성성불(見性成佛)을 하기 전인가, 후인가. “고양이가 쥐 잡듯이, 주린 사람 밥 찾듯이, 육칠십 늙은 과부가 자식을 잃은 뒤에 자식 생각 간절하듯이 깊게 궁구하면 큰 깨달음을 얻게 된다”는 그의 정진의 도정에 마애불의 자애로운 미소가 위안이 되었을지도 모르겠다.

 

황상동 마애여래입상의 지번은 황상동 산90-14, 근처에 마애사 또는 금강선원이라 부르는 작은 암자에서 관리하고 있다. 마애불이 보물로 지정된 건 1992년이지만, 1980년대 초반에 국가산업단지 2공단으로 조성돼 마애불 아래는 2공단의 각종 공장에 들어차 있다.

 

비록 문화재 지정 이전이기는 하지만, 문화재 보호는 개발과 경제 논리에 밀린 결과다. 주변 공장에서 나오는 소음과 진동으로 불상 좌대에 균열 현상이 발생하면서 보호 대책이 시급해지자, 마애불 위로 유리 돔을 설치해 놓았다. 유리 돔 안에 갇힌 거구의 부처님이라니, 지날 때마다 기분이 씁쓸해진다.

 

개발과 경제논리에 밀리고 유리 돔 안에 갇힌 부처

 

일부러 이 마애불을 찾는 이가 얼마나 될까만, 도로에서는 마애불의 모습도 잘 보이지 않는다. 돌고개의 내리막길 내려오다 오른쪽으로 표지판이 있기는 하나 길이 애매하여 어떤 공장을 통과해 들어가야 했다. 문화재 지정 이후에 공장들이 들어찬 상태여서 마땅하게 진입로 내기가 어려웠던 모양이다.

 

개발 바람이 불어오기 전에는 마애불은 고갯길을 힘들여 오르내리는 나그네를 위로하는 마음씨 좋은 부처님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사람들은 일부 불자를 빼고는 이 마애불을 무심히 스쳐 갈 뿐이다. 고갯길의 암벽에 새겨진 부처님이 내려다보던 세간의 풍경은 이제 삭막한 공업단지의 그것일 뿐이다. 마애불을 뒤로 하고 내딛는 발걸음이 헛헛할 수밖에 없다.

 

 

2022. 8. 16.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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