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펜화, 마음 끝에 스치는 사경(寫經)의 철필 소리 [서평] 디지털카메라의 등장은 사진에 대한 일반의 인식을 바꾸어 놓은 듯하다. 더러 풍경이나 사물을 담기도 했지만 전 시대의 필름 카메라는 주로 사람을 찍는 데 한정되었으니 그것은 만만찮은 비용 때문이다. 필름 구매에서부터 현상과 인화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과정에서 큰돈은 아니지만, 줄곧 드는 비용은 적지 않은 부담인 것이다. 그러나 이른바 ‘디카’의 등장은 그런 여가 문화를 일거에 바꾸어 놓았다. 이름난 유적지나 명승지에선 디카를 들고 풍경이나 유적을 담는 사람들로 붐빈다. 필름 걱정도 인화 걱정도 할 필요가 없고, 파일로 보관하거나 필요한 것만 인화할 수 있으니 그 비용은 최소한에 그친다. 바야흐로 디카는 이 디지털 시대의 총아가 된 것이다. 유적이나 풍경을 사진으로 기록하면서 우리는 무심결에 거기 의.. 더보기
일본인 교장 패대기친 소년, 정말 불온했을까 [서평] 부안 역사문화연구소 총서1 정재철의 처녀는 입가에 미소를 머금고 있다. 사진관에서 찍은 인물사진인데도 흔히 보는 근엄하고 경직된 표정이 아니다. 조리개 개방으로 뭉개진 배경을 등지고 처녀는 오른쪽으로 15도쯤 몸을 틀고 있다. 흰 저고리에 검정 치마, 여인의 손은 얌전히 무릎 위에 포개져 있다. 때는 1942년, 해방을 3년 앞두고 처녀는 돈화문 근처 어떤 사진관에서 이 사진을 찍었다. 감옥에 있는 독립운동가 부친 옥바라지를 위해서 취직해야 했던 여자는 이력서에 붙일 사진이 필요했다. 아버지는 지운 김철수. 처녀는 지금 아흔여덟 노인이 되었다. 이 한 장의 사진에 담긴 내력들은 칠십몇 년의 시간을 거슬러가 우리를 해방 공간으로 데려다준다. 누구나 한번 미소로 스쳐 갈 사진이지만 그 속에 담긴 시.. 더보기
“독도는 침략과 식민지배의 원점이자 그 상징” 마침내 내년 신학기부터 일본 초등학생은 한국 영토인 독도(일본이 주장하는 명칭: 다케시마)가 일본의 ‘고유영토’이고 ‘한국이 불법 점거하고 있다’는 억지 주장이 실린 새 교과서로 공부하게 되었다. 아이들이 왜곡된 역사를 배우면서 자라게 되면 이 터무니없는 ‘국경 분쟁’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를지도 모른다. 일본의 노림수는 거기 있을 것이다. 우리 베이비 붐 세대에게는 독도 문제가 전혀 심각하지 않은, 일본이 가끔 주절대는 흰소리 수준에 그쳤다. 아무도 그걸 심각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얘기다. 1982년 ‘독도는 우리 땅’이라는 노래가 히트했을 때, 새삼스럽게 그런 노래가 나온 배경이 쉬 받아들여지지 않았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그러나 이제 독도가 자기네 영토라고 명토 박으며 지난 7월, 러시아 군용기.. 더보기
‘열녀(烈女)’, 혹은 ‘수절(守節)’ 이야기 지난 연말에 고등학교 ‘국어(하)’ 마지막 단원을 배웠다. 단원의 이름은 ‘국어가 걸어온 길’. ‘용비어천가’와 ‘동국 신속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가 실려 있다. ‘용비어천가’가 조선왕조 창건의 정당성과 당위성을 설파하고 있는 목적시라면 ‘삼강행실도’는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은 실천에 옮긴 책’(강명관, 이하 같음)이다. 지배층이 백성을 가르치겠다는 생각을 했다고 가상히 여길 일은 없다. 이는 지배세력이 국가권력을 통해 백성들에게 자신들의 이데올로기로 전파하고 교화시키는 과정일 뿐이니까. ‘양반 체제는 한글로 된 책을 다양하게 인쇄해 백성들에게 공급하거나, 원하는 백성이면 모두 배울 수 있는 학교를 만들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백성을 무식하게 만들고, 자신들의 통치에.. 더보기
무연고 사회 - 누구나 외롭게 죽어갈 수 있다 무연고 사회, 고독사와 무연사 지난 7월, 서울의 한 임대아파트에 살던 탈북 모자의 죽음이 두 달이 지나 발견되었다. [관련 기사 : 탈북 모자의 죽음, 두 달간 아무도 몰랐다]. 이번 한가위 뉴스는 ‘무연고 사망이 5년 새 갑절로 늘었다’고 보도했다. [관련 기사 : 쓸쓸한 마지막 길…무연고 사망자 5년 새 2배로 늘어] 이런 소식은 더는 놀랍지 않을 만큼 일상이 되었다. 곡절과 무관하게 “곁을 지켜주는 사람 없이 홀로 살아가다, 또 홀로 세상을 떠나는 이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다. 지금도 가족의 해체든, 가난과 병고든 누군가 외롭게 죽어가고 있는 것이다. 2011년 방송대상(지역 다큐멘터리 TV)을 탄, 의 ‘무연고 사회’를 시청하고 쓴 글이다. 일찌감치 사회적 문제 제기가 되었지만, 후속 조처는 그.. 더보기
세월은 가도 명작은 남는다 - 임권택의 <서편제(西便制)> 요즘 국어 시간에 비평문을 가르치고 있다. 교재는 교과서에 실린, 유지나 교수의 영화 평론이다. 가 개봉된 것은 1993년인데 아이들은 대부분 1995년에 태어났다. 당연히 영화에 대해 아는 게 전혀 없다. 본문을 배우기 전에 가 어떤 영화인지부터 시작해야 했다. 원작, 줄거리, 배우, 감독을 소개하고 영화의 스틸 사진과 동영상 따위를 이용해서 아이들에게 밑그림을 그려주었다. 당시에 영화를 본 느낌이나 주변 이야기도 전해주었다. 일곱 학급을 다니다 보니 아주 자연스럽게 18년 전에 본 영화가 새롭게 되살아났다. 영화 는 임권택이 이청준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이다. 는 단성사 개봉 당시 서울에서 196일 동안 백만 관객을 동원하여 사상 최대 관객을 모은 영화로 기록된 영화다. 간판도 사람이 그릴 땐데 20.. 더보기
차례상에 ‘홍동백서(紅東白西)’는 없다? 한가위를 앞두고 명절 차례와 관련된 기사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조상 대대로 내려온 오래되고, 감히 아무도 바꿀 수 없다고 여겼던 명절날 의례의 관습을 무화하는 듯한 꽤 무거운 소식이다. 그런데 웬일인지 한두 매체 외엔 모두 이를 뜨악하게 바라보고 있는 듯하다. 성균관, “차례상 규칙, 근거가 없다.” “홍동백서(紅東白西) 등 차례상 규칙 근거 없다.” “차례라는 말 자체가 기본적인 음식으로 간소하게 예를 표한다는 의미” “(비용이 많이 든다고 하는데 간소하게 차리고) 가짓수를 줄이는 것이 올바른 예법이다.” 홍동백서? 4대 봉제사(奉祭祀)에다 한가위와 설날 차례까지 모두 10번쯤 제사를 모셨던 집안에서 자란 내게는 익숙한 성어(成語)다. 어릴 적부터 선친으로부터 제사상 진설(陳設)에 관련된 예법에 관해.. 더보기
한가위, 슬픈 풍요 팔월 한가위는 투명하고 삽삽한 한산 세모시 같은 비애는 아닐는지. 태곳적부터 이미 죽음의 그림자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달에 연유된 축제가 과연 풍요의 상징이라 할 수 있을는지. 서늘한 달이 산마루에 걸리면 자잔한 나뭇가지들이 얼기설기한 그림자를 드리우고 소복 단장한 청상(靑孀)의 과부는 밤길을 홀로 가는데-팔월 한가위는 한산 세모시 같은 처량한 삶의 막바지, 체념을 묵시(默示)하는 축제나 아닐는지. 얼마 되지 않아 달은 솟을 것이다. 낙엽이 날아내린 별당 연못에, 박이 드러누운 부드러운 초가지붕에, 하얀 가리마 같은 소나무 사이 오솔길에 달이 비칠 것이다. 지상의 삼라만상은 그 청청한 천상의 여인을 환상하고 추적하고 포옹하려 하나 온기를 잃은 석녀(石女), 달은 영원한 외로움이요, 어둠의 강을 건너는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