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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도리사, 드는 이 편안히 품어주니 ‘최초 가람’ 아닌들 어떠랴

by 낮달2018 2022. 8.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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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도리사 풍경. 오른쪽 전각이 법당인 극락전, 왼쪽이 한때 영남 4대 선원의 하나였던 태조선원이다. 오른쪽 처마 건물은 수선료다.
▲도리사 앞 2km 지점에 도로 위에 세운 일주문. '해동 최초 가람 성지 태조산 도리사'란 현편이 걸려 있다.
▲일주문을 지나면 펼쳐지는 무성한 가로숫길. 가로수는 느티나무다. 가을에 단풍이 좋다.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일주문은 도리사 2Km 앞 아스팔트 길 위에 세워져 있다. 거대한 콘크리트로 지은 이 산문에는 금빛으로 쓴 ‘해동 최초 가람 성지 태조산 도리사’란 현판이 달려 있다. 도리사는 거기서 느티나무 가로숫길로 산길을 십여 분 더 가야 있다.

 

정말 도리사는 ‘해동 최초 가람’일까

 

태조산(太祖山 691.6m)은 선산의 진산인 비봉산의 동쪽 줄기에 해당하는 산으로 원래 이름은 냉산(冷山)이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이 산에 어가(御駕)를 두어 숭신산성을 쌓고 후백제 견훤과 전투를 벌인 데서 유래된 이름이다. 왕건은 925년 후백제 견훤과의 팔공산 전투에서 크게 패한 후 선산지역으로 퇴각했으나 견훤과 다시 붙어 대승을 거두고 고아읍 일대 전투에서 견훤의 아들 신검을 물리치면서 마침내 후삼국을 통일했다.

 

‘해동 최초 가람’이라는 이 수식어는 물론 도리사의 주장이다. 해동이라면 우리나라 전체를 이르는 말인데, 문면대로라면 한국 최초의 절집이라는 뜻이 되니 말이다. 삼국시대에 전해진 불교는 고구려(372)-백제(384)-신라의 순서로 수용되었다. 그런데 ‘해동 최초’라고 하는 건 너무 나간 거다.

 

불교는 고구려와 백제에선 순조롭게 수용되었으나, 보수적인 신라에선 배타적인 집권 계층의 반대로 큰 저항이 있었다. 불교가 공인된 것은 이차돈(503~527)의 순교 뒤 법흥왕 14년(527)에 이르러서다. 물론 공인 이전에 이미 불교는 들어와 있었다.

▲도리사에서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5km 떨어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있는 모례의 우물. ⓒ 구미시

최초 전래에 관한 설은 여러 가지다. 미추왕(재위 262~284) 2년(263)에 고구려의 승려 아도가 와서 불교를 전했다는 설, 눌지왕(재위 417~458) 때 고구려의 승려 묵호자가 모례의 집에 머물러 불교를 선양했다는 설, 또 소지왕(재위 479~500) 때 아도화상이 시자(侍者) 3인과 같이 모례의 집에 머물다가 아도가 죽은 뒤 시자들이 포교했다는 설 등이 있다.

 

어느 설이 사실에 가까운지는 알 수 없다. 세 가지 설에서 공통점은 전래자가 묵호자 또는 아도라는 것, 일선군 모례에게 의탁해 포교했다는 것 등이다. 어쨌든 민간의 승려가 들어와 공식 외교를 통하지 않고 포교를 했고 적잖은 희생을 딛고 불교가 받아들여진 것이다. 일부 설화와 불교계에서는 둘을 같은 인물로 보지만, <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는 그럴 가능성을 부정하면서도 이들을 인도인으로 추정한다.

 

묵호자와 아도는 모례의 집에 머물면서 포교했다고 한다. ‘모례(毛禮)의 집’이라 전하는 곳은 지금의 도리사 서북쪽으로 직선거리 약 5km 떨어진 구미시 도개면 도개리에 있다. 집 대신 ‘전모례가정(傳毛禮家井: 모례의 집 우물이라고 전하는 곳)’이 남아 있다. 구미시에서는 이 우물을 중심으로 한 마을 일대를 ‘신라불교초전지마을’(처음 전한 곳)로 조성했다.

▲ 도리사 법당인 극락전. 19세기 초반의 건물로 팔작 다포집이다. 1968년 여기서 1731년의 중수기가 발견되었다.

도개리가 신라에 불교가 처음 전래된 곳이고, 모례가 첫 번째 불자가 되긴 했다. 그러나 묵호자와 아도, 둘 다 여기 사찰을 창건했다는 기록은 없다. 그런데도 조선시대 이래, 도리사에 아도가 머문 것으로 기록되기 시작하였으며 나아가 “아도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하여 서라벌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한겨울인데도 복숭아꽃과 오얏(자두)꽃이 만발하여 그곳에 절을 짓고 도리사라 하였다”고 전해온다. [관련 글 : 그 산사의 단풍, 이미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네]

 

도리사 창건 설화 + 아도의 전설 = 신라 불교 초전 법륜지

 

도리사는 창건 설화에 따라 도리사를 신라 불교의 초전 법륜지(初傳法輪地)라고 내세운다. 이는 당시 도리사의 창건 연기 설화를 지역에서 전해오는 아도의 전설과 연결하여 미화했을 법하다. 그러나 설화와 후대의 기록만으로 도리사를 5세기 때에 세워진 신라 최초의 사찰로 보기 어렵고, 창건연대를 정확히 특정할 수 없다.

 

1968년 봄, 극락전의 목조아미타여래좌상 개금 당시 불상 밑에서 발견된 1731년 영조 7년 때의 중수기에 따르면 현재의 도리사는 조선 영조 5년 이후에 붙여진 사명이다. 최초의 도리사는 숙종 3년(1677)에 큰 화재를 당하여 폐사되었으며, 영조 5년(1729)에 이르러 아미타불을 새로 개금(改金:불상에 새로 금칠을 함)한 뒤 산내의 암자였던 금당암으로 옮기면서 암자 이름을 도리사로 바꾸었다.

 

따라서 현 도리사의 남쪽 또는 서쪽에 있었던 도리사는 그 터만 남기게 되었고 정확한 창건연대는 발굴조사가 이루어져야 밝혀질 듯하다. 따라서 금당암이었던 도리사의 극락전 앞 석탑의 조성 시기와 도리사의 창건연대는 관련 자료의 부족으로 여전히 확정할 수 없다.

▲극락전 뒤의 세존사리탑. 1977년 보수 중에 금동사리함이 발견되었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가 나온 신라시대의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창건 이후 조선 후기까지 도리사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금당암을 도리사로 개칭한 뒤 1807년(순조 7) 절을 중창하였고, 1823년 조사전(祖師殿)을 중수하였다. 1876년(고종 13) 극락전을 중건하였으며, 1922년 칠성각을 건립하였다. 현존 당우는 극락전, 태조선원, 삼성각 등이 있다.(아도 석상을 보관하였다고 하는 조사전은 현재 도리사에 없다.)

 

금동육각사리함도 신라시대의 절터에서 옮겨온 것

 

극락전 뒤에는 종 모양의 부도가 하나 서 있다. 17세기 전반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는 부도의 상부 연봉형 보주(寶珠)에 ‘세존사리탑’이라는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다. 1977년 보수 중 내부에서 신라시대의 금동육각사리함이 발견되었다. <도리사 사적기>에 따르면, 원래 이 사리함은 신라시대의 절터인 석적사(石積寺)에서 옮겨온 것인데 조선시대에 이 부도 속에 다시 봉안된 것이었다.

▲금당사리함에서 나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1과를 봉안한 적멸보궁. 도리사 적멸보궁은 우리나라의 8대 적멸보궁 중 하나다.

사리함에서 나온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는 둥근 콩알만 한 사리로,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것 중 가장 아름다운 모습의 사리로 평가되고 있다. 사리함과 사리는 국보로 지정되어 사리함은 직지사 성보박물관에 위탁 소장하고 사리는 1987년에 조성한 도리사 적멸보궁(寂滅寶宮) 불탑에 봉안되어 있다.

 

적멸보궁은 사찰에서 석가모니불의 진신사리를 봉안하는 불교 건축물이다. 도리사 적멸보궁은 영취산 통도사, 오대산 상원사, 설악산 봉정암, 태백산 정암사, 사자산 법흥사, 금강산 건봉사, 비슬산 용연사 등과 함께 8대 적멸보궁이 되었다.

▲1968년 보물로 지정된 도리사 석탑. '화엄석탑'이라 부르는 이 이형석탑은 고려 중기에 조성된 일종의 모전석탑이다.

극락전 뜰앞에 있는 도리사 화엄석탑은 1968년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높이는 3.3m. 이 탑은 일반적인 석탑과 매우 다른 특이한 양식이다. 직사각형의 지대석 위에 돌기둥을 세워 기단을 만들고 그의 사각형으로 다듬은 석재를 쌓아 지은 이형석탑이다.

 

모전석탑이지만 방단형 석탑 닮은 ‘화엄석탑’

 

▲2층 탑신부의 감실(남쪽)

기단은 동서남북, 네 면에 길고 네모난 돌을 6~7장씩 병풍처럼 둘러 세우고 기단의 남쪽 면 가운데에는 문짝을 새겼다. 일반 석탑보다 높은 이 기단 위에 세 층의 몸돌과 지붕돌을 얹었다. 1·2층의 몸돌은 벽돌 모양의 작은 돌을 여러 층으로 쌓아 만들었고, 2층 몸돌 남쪽 면 가운데에는 두 짝의 문을 새긴 돌을 끼워 넣었다. 3층의 몸돌과 지붕돌은 2층과 달리 각각 하나의 돌로 만들었다. 각 층의 지붕돌 낙수면은 계단 모양의 층단(層段)을 이룬다.

 

전체적인 인상에서 튼실하게 전개되던 탑의 안정감은 3층의 체감이 급격하게 이루어지면서 무너진 부분이 아쉽다. 3층의 낙수면에는 2단의 굄을 두고 상륜부를 올렸다. 머리 장식인 상륜부에는 노반(露盤)과 돌기둥, 연꽃이 조각된 둥근 앙화(仰花)와 보주(寶珠)가 각각 놓여 있다.

 

탑의 건립 시기는 남쪽 면 위아래에 조각된 문비(門扉) 2짝의 양식과 상륜부의 조각, 각 부재를 다룬 수법 등으로 보아, 고려시대 중기로 추정된다. 도리사에서는 이 탑을 ‘화엄석탑(華嚴石塔)’이라고 일컫는데, “화엄의 가르침은 서로 대립하고 항쟁을 거듭하는 국가와 사회를 정화하고, 사람들의 대립도 지양시킴으로써 마음을 통일하게 하는 교설”이 왜 여기 쓰였는지는 근거를 찾을 수 없다.

▲도리사 석탑은 외관에서 방단형 석탑과 비슷하다. 안동(위)과 의성의 방단형 석탑.

국내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이 석탑은 모전석탑과 닮았으나, 기단부에서 차이가 있으며 다만 그 외관에서 의성과 안동의 방단형 석탑(方壇形石塔)과의 연관성을 엿볼 수 있을 따름이다. 일반적인 탑들과는 다른 특이한 형태로 몸돌과 지붕돌 윗부분의 층단 구성이 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모전석탑처럼 보인다.

 

아도화상 관련 좌선대와 사적비

 

도리사에는 아도화상 관련 문화재와 유적이 곳곳에 있지만, 그게 이 절집이 아도가 창건한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그것은 후대에, 모례의 집에 머물며 포교한 아도를 기리는 것일 뿐이기 때문이다. 아도가 ‘한겨울인데도 복숭아·오얏꽃이 만발’한 것을 보고 도리사를 창건했다는 설화는 오랜 세월에 걸쳐 아도와 도리사를 묶는 새로운 서사를 만들어 왔을 것이기 때문이다.

▲ 절집 창건설화에서 도리사를 연 아도화상의 좌선대. 이 절이 아도가 창건한 절이라는 어떤 증거도 없지만, 아도는 기려지고 있다.
▲ 아도화상 좌선대 위쪽에 있는 도리사 불량답 시주 질비(왼쪽)과 아도화상 사적비. 크기는 실제로 사적비가 훨씬 크다.

석탑 뒤 오른쪽에 난 문을 지나 계단을 약 20m 정도 내려가면, 비탈진 소나무 숲에 비석 두 기가 보이고 그 앞, 굄돌 세 개 위에 평평한 바위가 올려져 있다. 비석 중 큰 것은 ‘아도화상 사적비’, 작은 것은 도리사 불량답 시주 질비(桃李寺佛糧施主秩)’고 사람이 올라앉아 명상하기 맞춤한 바위가 바로 ‘아도화상 좌선대’다.

 

아도가 모례 장자(長者)의 집에 머물고 있을 때다. 낮에는 양이나 소를 키우고 밤에는 조심스럽게 불교를 강론하였다 한다. 마침 공주가 병이 들어 백방으로 애썼으나 고치지 못하였는데, 아도가 향을 피우고 정성껏 기도하니 공주가 자리에서 일어났으므로 그때부터 신라에 불교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왕이 바뀌면서 다시 불교가 박해받게 되니, 아도는 모례에게 칡넝쿨이 집 안으로 들어오면 그 칡넝쿨을 따라오라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사라진다. 어느 날, 칡넝쿨이 대문 안으로 들어오자 모례가 칡넝쿨을 따라가니 아도가 가부좌를 틀고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곳이 바로 여기다.

 

‘아도화상 사적비(事蹟碑)’는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그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세우고, 머릿돌을 얹었다. 머릿돌은 앞면에 이무기를, 뒷면에 네 마리의 용을 조각하고 그사이마다 구름과 용을 새겨 장식하였다. 빗돌 앞면에는 위쪽에 비의 이름을, 그 아래에 세로로 비문을 적었다. 뒷면에는 ‘자운비(慈雲碑)’라는 글씨를 새겼으며, 그 끝에 조선 효종 6년(1655)에 건립한 사실을 밝혀놓았다.

 

‘도리사 불량답 시주 질비’는 도리사에 ‘불공에 쓰는 곡식 지을 논과 밭’[불량답(佛糧畓)]을 시주한 이의 이름과 논밭의 규모를 적어놓은 비이다. 자연 암석을 받침 삼아 윗면에 홈을 파서 비를 꽂아두고, 머릿돌을 올려 마무리하였다. 앞뒷면에 세로로 새긴 비문은 앞면 첫 줄에 비의 이름을 적은 후, 그 아래에 논밭을 시주한 자와 그 규모를 밝혀두었다. 비문 끝에 숙종 38년(1712)에 비를 세웠다고 기록하고 있다.

▲태조선원. 한때 영남의 4대 선원에 들었던 이 선원은 지금은 문을 닫고 도리사 사무소로 쓰이고 있다.
▲태조선원 현판은 3.1운동의 민족 대표인 위창(韋滄) 오세창 선생의 글씨다.

도리사의 법당인 극락전은 정면 3칸, 측면 3칸의 팔작지붕 다포집이다. 단청은 낡았으나 그 낡음 속에 의연한 기품을 간직하는 전각이다. 극락전 왼편의 마치 여염집처럼 보이는 정면 7칸, 측면 8칸의 ㄷ자형 건물은 태조선원(太祖禪院)이다. 지금은 사무실로 쓰고 있지만, 이 옛 선원은 파계사 성전(聖殿), 은해사 운부암, 비슬산 도성암(道成庵)과 더불어 영남 4대 도량의 하나로 꼽힌다.

 

길재가 글을 배우고, 성철이 정진한 도리사, 이제는 ‘관광 사찰’

 

태조선원은 고려 때 야은 길재(1353~1419)가 스님들에게 글을 배운 곳으로, 근현대엔 고승 운봉성수(1889~1946) 스님과 성철(1912~1993) 스님이 정진했다. 조계종 종정을 지낸 성철스님은 1943년 여기서 동안거(冬安居)를, 그 이듬해 하안거(夏安居)를 했다.

 

그 이후 선원은 6·25전쟁과 정화 운동의 와중에서 폐원된 듯하다. 1975년에 선원을 다시 열었으나 도리사가 관광사찰이 되면서 일반인들이 많이 드나들어 수행에 장애요인으로 작용하자 문을 닫게 되었다. 지금은 종무소 사무실로 쓰고 있다.

 

그밖에 현존하는 경내의 건물들은 모두 근대 이후에 지어진 것이다. 직지사의 말사에 불과하지만, 도리사는 대중의 호응을 받으며 템플스테이를 운영하고 있다. 강당인 설선당과 공양간·요사인 수선료 등을 갖추고 바삐 돌아가는 도리사에는 속인의 발길이 잦다. 도리사가 ‘관광사찰’임을 실감하는 대목이다.

 

도리사를 처음 들렀을 때다. 극락전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운수(雲水) 한 분과 잠깐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는 “산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도량이 있는데 여기가 그런 곳이지요.”라고 말했다.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태조산 중턱의 그리 크지 않은 이 절집이 사람의 발길이 잦은 것도 같은 이유에서일지도 모르겠다.

 

 

2022. 8. 6.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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