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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순국10

[순국] 대한의군 참모중장 안중근, 뤼순서 순국 청년 안중근(1879~1910), 뤼순(旅順)에서 지다 1910년 오늘(3월 26일)은 안중근 의사가 뤼순(旅順) 감옥에서 순국한 날이다. 하얼빈에서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를 처단(1909년 10월 26일)한 지 꼭 다섯 달 만이요, 일제의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1910년 2월 14일)받은 지 한 달 열흘만이었다. 가톨릭교회, ‘살인자’의 종부성사 거부 2008년 3월, 국제한국연구원은 안중근의 마지막 행적에 대한 새로운 자료를 공개하였다. 자료는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2월 14일부터 3월 26일 순국할 때까지의 안중근의 모습을 비교적 자세하게 전해 주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2월 14일 오전 10시 30분, 안중근은 뤼순 관동도독부 지방법원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에 안중근은 당시 천주교 조.. 2025. 3. 25.
[순국(殉國)] 스물일곱 윤동주, 후쿠오카 감옥에서 지다 [순국(殉國)] 1945년 2월 16일, 후쿠오카 형무소에서 지다 1945년 오늘(2월 16일) 오전 3시 36분, 후쿠오카(福岡) 형무소에서 간도 출신의 조선 청년 윤동주(尹東柱, 1917~1945)가 스물일곱 짧은 생애를 마감했다. 그는 1943년 7월, 귀향길에 오르려다 일경에 체포된 이래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기소되어 이듬해 3월, 징역 2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이었다.   일제는 뇌일혈로 사망했다고 통보했지만, 윤동주는 학창시절에 축구선수로도 활약할 만큼 건강했다. 건장한 20대 청년이 수감된 지 채 1년도 되지 않아 돌연한 죽음을 맞았다는 것은 쉬 믿어지지 않는 것이었다.   의문의 주사와 생체실험 40여 년 전, 그의 아우 윤일주와 후배 정병욱의 증언으로 그가 일제의 생체실험에 희생된 것이.. 2025. 2. 15.
[순국] 의성단장 편강렬 의사, 만주에서 순국하다 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安東) 병원에서 순국1928년 1월 16일, 만주 안둥(安東) 병원에서 편강렬(片康烈, 1892~1928) 의성단장이 순국하였다. 선생은 3년 전 하얼빈에서 일경에 체포되어 7년 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혹독한 고문으로 발병, 보석으로 석방되어 치료 중이었다. 향년 36세. 그는 열여섯 살에 이강년 의병진의 선봉장이 되었던 사람이었다. 힘으로는 싸우는 두 마리 소 사이에 들어가 소를 떼어 말렸고, 민첩하고 가볍기로는 초가지붕을 뛰어넘었던 용맹한 전사였다. 법정 최후진술로 “목숨이 떨어질 때까지 일제와 싸워서 일본에 한국인 총독을 두겠다.”하고 말할 만큼 기개도 드높았던 사람이었다. 그는 열여섯에 의병 선봉장이었다 애사(愛史) 편강렬은 황해도 연백 사람이다. 한학을 공부하.. 2025. 1. 17.
[순국] 사쿠라다몬 의거의 이봉창(1932) 의사, 형장에서 지다 이봉창 의사(1932.10.10.) 순국 이봉창(1900~1932)은 서울 사람이다. 용산의 문창 보통소학교를 졸업하고 가게 점원과 철도 운전 견습생 등으로 일했다. 1919년 이후 일을 그만두고 일본에 다녀오기도 한 그는 1925년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 그는 오사카에서 일본인의 양자가 되었고, 기노시타 쇼조(木下昌藏)라는 일본 이름을 얻었다. 그는 일본인으로 행세하며 노동과 장사 등에 종사하였다. 일본에서의 그의 행적을 살펴보면 그는 여자와 술과 도박 등 향락을 즐기면서 사는 전형적 ‘모던 보이(modern boy)’의 모습을 보인다.  일본인 못지않게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었던 그는 일본의 조선인 차별을 반일 민족의식으로 잇기보다는 일본인으로 대접받고 싶어 했다. 그가 일제에 순응적인 조.. 2024. 10. 10.
[순국] 산남의진의 손영각 의병장,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산남의진의 의병장 손영각 입암 전투에서 순국1907년 9월 1일(음력, 양력 10월 7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일본군과 맞붙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참모장이 전사, 순국하였다. 향년 52세.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1962 독립장), 중군장 이한구(1963 독립장), 좌영장 권규섭(1991 애국장) 등 산남의진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이 무렵 산남의진의 본진 지휘부[장영도소(將營都所)]는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에 정예 의병 1백여 명과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입암리(立巖里) 후원(後原)의 험준한 암석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진한 이세기(1991 애국장)·우재룡(1963 .. 2024. 10. 7.
[오늘] 광주 출신 의병장 오성술, 대구감옥서 처형 순국 [역사 공부 ‘오늘’] 1910년 9월 15일,  의병장 오성술 대구 감옥에서 순국1910년과 1941년 9월 15일에 두 분의 독립운동가가 순국하였다. 한 분은 처형으로, 또 한 분은 옥중에서 순국하였다. 물론 건국훈장으로 기리긴 하지만, 세상엔 잘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다. 순국한 지 108년과 77년이 넘어서만은 아니다.2018년 8월 15일 현재 독립유공자로 건국훈장을 받은 이는 대한민국장 30명, 대통령장 93명, 독립장 824명, 애국장 4,306명, 애족장 5,664명 등 10,917명이고, 건국포장 1,253명, 대통령 표창 2,887명 등 모두 15,057명이다. 생각보다 많다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해방 당시 우리나라 인구가 2천5백만이니 0.0006%밖에 되지 않는다. 건국훈장의 .. 2024. 9. 15.
[오늘] 대종교 개조(開祖) 나철 순교·순국 [역사 공부 ‘오늘’] 1916년 9월 12일, 대종교 개조 나철 자결 순교·순국1916년 9월 12일은 대종교(大倧敎) 창시자 홍암(弘巖) 나철(羅喆, 1863~1916)이 순교, 순국한 날이다. 이틀 전 시봉자(侍奉者) 6명을 대동하고 구월산 삼성사(三聖祠)에 들어가 수행을 시작한 그는 이날,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9월 10일, 사당 앞 언덕에 올라 북으로는 백두산, 남으로는 선조의 묘소를 향해 참배한 뒤 그는 “오늘 3시부터 3일 동안 단식 수도하니 누구라도 문을 열지 말라.”고 문 앞에 써 붙인 뒤 수도에 들어갔다. 12일 새벽, 인기척이 없어 제자들이 문을 뜯고 들어가니, 그는 죽음을 택한 이유를 밝힌 유서를 남기고 조식법(調息法)으로 이미 숨을 거둔 뒤였다. 나철이 1909년 .. 2024. 9. 12.
[오늘] 청년 노동자 송학선, 조선 총독 사이토를 찌르다 [역사 공부 ‘오늘’] 1926년 4월 28일, 송학선 금호문 의거그는 안중근을 흠모한 청년 노동자였다 1926년 오늘(4월 28일), 11시께부터 창덕궁 정문인 돈화문 서편의 금호문 부근을 한 청년이 서성이고 있었다. 창덕궁은 이틀 전 세상을 떠난 순종 황제의 빈소가 마련되어 있었고, 금호문이 빈소의 출입문으로 쓰이고 있었다.  일제는 순종의 붕어로 3․1운동 때와 같은 거사가 발생하지 않을까 염려하여 4월 27일부터 서울 시내의 경찰력을 증강했다. 돈화문 앞에 임시 경비사령부를 설치하고 경찰은 물론 기마 순사와 헌병까지 배치하여 삼엄한 경계를 펴고 있었다.  청년은 셔츠에 한복 바지를 입고 평상화를 신고 있었지만 품에는 흰 뼈로 된 손잡이의 칼날이 4촌 5푼가량 되는 고급 과도를 감추고 있었다. 그는.. 2024. 4. 27.
매천사, 망국의 치욕에 선비는 스스로 목숨을 거두었다 [지리산자락 지각 답사기] ③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 매천사(梅泉祠)*PC에서는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애당초 우리 여정에 ‘매천사(梅泉祠)’는 들어 있지 않았다. 노고단에 올랐다가 내려와 하동 쪽으로 길을 재촉하던 때에 나는 얼핏 ‘매천사’라는 이정표를 보았고 차를 돌렸다. 글쎄, 구례에 와서 매천사를 지나면서 그냥 갈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매천사는 구례군 광의면 수월리에 있는, 매천(梅泉) 황현(黃玹, 1855~1910) 선생의 위패를 모신 사당이다. 생전에 선생이 살았던 곳에 후손과 지방 유림이 1955년에 세운 사당은 앞면 3칸·옆면 1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984년에 전라남도의 문화재자료 제37호로 지정되었다.매천은 전라남도 광양 출신이다.. 2022. 7. 23.
‘조선의용대의 영혼’ 윤세주 열사, 타이항산에서 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42년 6월 3일-윤세주, 타이항산 폔청 전투에서 전사 1942년 6월 3일, 조선의용대 화북(華北)지대 정치위원 석정(石正) 윤세주(尹世胄, 1901~1942)가 타이항산(太行山) 석굴에서 순국했다. 허베이(湖北)성 폔청(偏城)에서 일본군의 제팔로군 소탕 작전에 맞서 싸우다 총상을 입은 지 닷새 만이었다. 폔청 전투는 조선의용대 화북지대가 중국 타이항산맥 일대에서 일본군과 싸운 타이항산 전투 가운데 후자좡(胡家庄) 전투·싱타이(邢台) 전투(1941)와 함께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1942년 5월 28일, 허베이성 셰현(涉縣)의 북쪽 가장자리 산시성 경계에 있는 폔청에서 시작된 이 전투는 일본군의 소탕 작전에 대항한 팔로군의 반 소탕전으로 격렬하게 전개되었다. 5월 29일 항일.. 2020. 6. 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