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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폐사지를 지켜온 돌탑, 그 천년의 침묵과 서원

by 낮달2018 2022. 8.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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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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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장리 오층석탑(국보)는 통일신라시대의 모전 석탑이다. 이 정도의 거탑을 세울 정도라면 이 절집도 대가람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죽장사(竹杖寺)는 선산 읍내에서 서쪽으로 약 2km쯤 가다 중부내륙고속도로 나들목 어귀 오른쪽에 있는 죽장리에 있다. 죽장사에는 국보로 지정된 통일신라시대의 오층석탑이 서 있다. 죽장리 오층석탑은 높이가 10m에 이르러 전탑형의 5층 탑으로는 나라 안에서 가장 높다. 1968년에 국보로 지정됐다.

 

4백여 년 폐사지를 지켜온 오층석탑

 

죽장사에 있는 오층석탑이니 당연히 ‘죽장사 오층석탑’으로 불리어야 하지만, 아직도 ‘죽장리 오층석탑’이다. 죽장사는 신라 때 창건된 사찰로 추정되지만, 이력이 거의 전해지지 않는다. 관련 기록으로는 중종 25년(1530년)에 간행된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29 선산 도호부 ‘불우조(佛宇條)’에 “죽장사는 비봉산에 있다[구재비봉산(俱在飛鳳山)]”라는 게 최초다.

 

조선 후기 1618년에 편찬된 <일선지(一善志)> ‘불우조’에는 폐사된 것으로 나오니 조선 전기까지 존재하였으나 17세기 무렵에는 폐사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절터에는 오층석탑과 옛 건물들을 올렸던 주춧돌과 기와 조각 등 건축 부재들이 일부 남아 있었다.

▲ 오층석탑만 남은 절터에 대웅전과 삼성각, 원각당을 새로 지었다. 대웅전이 들어선 곳은 원래 법당 자리로 추정한다.

20세기 들어 다시 죽장사로 중창

 

이  터에 강대봉이라는 이가 법당과 요사 등을 세우고 ‘법륜사’라는 이름으로 절집을 연 게 1954년이다. 1991년부터 1994년까지 명효(明曉)가 대웅전과 삼성각·요사채 등을 지으며 중창하여 오늘에 이르렀는데 이때부터 아마 서황사(瑞凰寺)라는 이름을 쓴 듯하다. 다시 죽장사 옛 이름을 쓰게 된 것은 2006년에 이르러서다. 죽장사는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직지사의 말사다.

 

대웅전 앞에 서 있는 10m에 이르는 오층석탑의 존재는 이력이 드러나지 않은 옛 죽장사의 규모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게 해 준다. 탑은 2단의 기단 위에 5층 탑신을 세우고 그 위에 머리 장식을 얹고 있다. 1층 몸돌 남쪽에는 불상을 모셨던 것으로 보이는 감실(龕室)이 있으며, 그 주위에 문을 달았던 흔적이 남아 있다.

 

감실에는 근년에 모신 듯한 금빛 불상 한 구가 놓여 있다. 1층 몸돌 남쪽에 감실 조성은 전탑과 모전 석탑에 주로 나타나는데, 분황사지 모전 석탑을 비롯하여 같은 양식의 낙산리 삼층석탑과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빙산사지 오층 석탑에서도 모두 확인된다.

 

기단부 위에 탑신부와 상륜부(相輪部)를 올린 신라 석탑의 모습을 따르고 있는 탑은 지대석에서 상륜부에 이르기까지 모두 171매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지붕돌[옥개석(屋蓋石)의 아래·윗면은 전탑(塼塔:벽돌로 쌓아 올린 탑)에서와 같이 계단 모양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상에는 머리 장식의 받침돌인 노반이 남아 있다.

▲ 오층석탑의 지붕받침. 낙수면과 만나는 끝부분에 낙수홈(물끊기홈)이 음각되어 있다.

통일신라시대 전형적인 양식인 2단의 기단으로 된 탑이지만, 기둥 조각(우주와 탱주)을 새기지 않은 몸돌이나 지붕돌의 모습은 전탑의 양식을 모방하고 있다. 지붕돌 낙수면(물이 흘러내리는 경사면)도 전탑에서와 같이 7단의 층을 이루었다. 지붕 받침은 6단이고 처마에는 낙수 홈(물 끊기 홈:처마 부분 안쪽에 음각된 홈으로 우천 시 낙수면을 타고 흐른 물이 탑신석까지 흐르지 못하도록 가공한 부분)이 음각되어 있다.

 

안동과 의성에 유행한 모전 석탑 계열, 낙산리 삼층석탑과 함께 8세기에 조성

 

몸돌에는 없는 기둥 조각이 상층 기단에는 각 면에 세 개의 탱주(撐柱:안 기둥)와 두 개의 우주(隅柱:모서리 기둥)가 있다. 이 기둥 조각은 여느 탑처럼 새겨서 표현한 것이 아니라 판석(板石)과 결합하여 나타내고 있는 점이 특이하다. 이는 1968년 조사와 함께 국보로 지정된 후 1972년 6월 해체 복원할 때, 새 부재로 보완한 것이다.

▲ 벽돌로 지은 전탑 송림사 오층전탑(칠곡군 동명면)
▲ 죽장리 오층석탑과 같은 모전 석탑인 탑리 오층석탑과 낙산리 삼층석탑, 빙계사지 오층석탑(왼쪽부터)
▲높이가 10m로 오층석탑 중 가장 높은 죽장리 오층석탑은 큰 탑인데도 날씬하고 날렵해 보인다.

이 탑은 안동과 의성지역에서 유행했던 모전 석탑(전탑의 양식을 모방한 석탑) 계열로 본다. 모전 석탑의 형식은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돌을 벽돌 모양으로 가공하여 축조한 형식이며, 둘째는 전형적인 석탑에서와 같이 돌로 몸돌과 지붕돌을 쌓되, 몸돌[탑신(塔身)]에는 좌우의 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를 생략하고 지붕돌 낙수면에 전탑처럼 층을 표시한 형식이다.

 

 안동·의성·선산·경주 등 죽령을 통한 불교문화 전파경로에 분포한 모전 석탑들

 

죽장리 오층석탑은 인근 낙산리 삼층석탑(보물), 의성 빙산사지 오층석탑(보물) 등과 같이 두 번째 형식의 모전 석탑이다. 통일신라시대에는 두 번째 형식의 모전 석탑이 첫 번째 형식의 모전 석탑보다 압도적으로 많이 건립되었고, 탑의 위치가 안동·의성·선산·경주 등 죽령(竹嶺)을 통한 불교문화 전파경로에 분포되고 있어 시선을 끈다.

 

통일신라시대 모전 석탑 중 가장 오래된 의성 탑리 오층석탑(국보)은 통일신라 초기인 7세기 말에서 8세기 초의 작품으로 추정되며, 죽장리 오층석탑과 낙산리 삼층석탑도 8세기경 조성된 탑으로 추정되고 있다. 탑은 규모가 거대하여 전체적으로 웅장한 느낌을 주고 있으며, 각 구성요소의 비례도 우수하다.

탑은 대웅전을 등지고 앞뜰의 중앙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치우쳐 마당 끝 산비탈 옆에 서 있다. 동서남북 어느 쪽에서 바라보아도 탑은 의연한 기품을 잃지 않으며 주변 풍경에 살갑게 녹아 있다. 10m에 이르는 높은 탑인데도 편안한 안정감을 보임은 상하층 기단이 워낙 나지막한 데다가 각 층의 체감률이 비례에 맞아서다.

 

1천 년을 넘게 거기 서서 절집을 지켜온 탑인데도 탑은 밝은 빛깔을 띠고 있다. 복원한 상층 기단의 새 부재도 튀지 않고 다른 부재와 잘 어우러져 있다. 웅장한 느낌을 주면서도 세부적인 표현이 살아 있는 탑의 모습에서 천 년이 넘는 시간을 찾기는 쉽지 않다.

 

탑을 둘러싼 정사각형 흰색 철제 울타리에는 아마 기와 불사에 참여한 불자들의 이름과 소원을 적은 기왓장을 일렬로 세워놓았다. 탑 바로 앞에는 돌로 만든 커다란 불전함이 있는데도 그 앞에 놓인 그릇에 천 원 지폐 몇 장과 동전이 놓여 있었다.

 

죽장리 오층석탑은 앞에서 말했듯 비슷한 시기에 건립된 모전 석탑이라는 점 등에서 낙산리 삼층석탑과 무척 닮았다. 층수와 규모가 다르고, 낙산리 삼층석탑이 좀 수더분한 모습이라면 죽장리 오층석탑은 크면서도 좀 날씬한 모습이라는 점에서 차이가 있을 뿐이다. [관련 글 : 들판에 외로이 선 삼층석탑, 그가 건너온 세월 천 년]

▲같은 시기에 조성된 모전 석탑인 죽장리 오층석탑과 인근 낙산리 삼층석탑(오른쪽)
▲죽장사 대웅전. 20세기에 원래 법당터로 추정하는 곳에 세운 건물이다. 주존불로 봉안된 석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상도 마찬가지다.
▲ 탑 앞 불전함. 빈자일등이니 시주에 차등은 없지만 어쩐지 쓸쓸해 뵌다.
▲오후의 죽장리 오층석탑. 8세기쯤 세워진 것으로 추정되는 이 돌탑이 지켜온 세월은 무려 천년이 넘는다.

죽장사는 이제 지역 사찰로 자리 잡았다. 대웅전에는 금오산에서 옮겨왔다는 석가여래좌상과 관음보살상 1구가 주존불로 봉안되어 있으나 이는 물론 근년에 조성된 불상이다. 대웅전을 비롯하여 20세기에 지은 삼성각, 원각당과 등 새 전각들은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듯 천년 넘은 탑과 함께 이 절집의 적요를 의좋게 나누고 있다.  서편 산기슭에는 차와 커피를 파는 카페도 문을 열고 있다.

 

1968년 죽장사 조사 때 오층석탑에서 동남향으로 150m 정도 되는 곳에 넓은 경작지가 있었으며 이곳에 사각형의 주초석 3개가 매몰되어 있었다. 또 많은 고와편(古瓦片)과 청자편(靑滋片)이 흩어져 있어 현재 사찰 입구 주차장과 주변의 경작지까지도 모두 건물터였을 것으로 추정한다.

▲ 잔디 심은 절 마당 가장자레에 정렬해 놓은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주초석과 기단 부재들.

잔디를 심은 절 마당의 가장자리에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주초석(柱礎石)과 기단 부재를 가지런히 정렬해 놓았다. 그 크기와 다양함으로 미루어 보면 사찰 내 건물도 다양하였을 것이고 건물의 규모도 웅대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뜰에 10m에 이르는 거대한 불탑을 세운 사찰이 현재의 규모에 그쳤으리라곤 볼 수 없는 것 아닌가.  

 

지난 2월에 들렀을 때, 새벽과 황혼에, 그리고 눈이 내린 뒤에 이 탑을 보러 오리라 마음먹었지만, 차일피일 한번도 죽장사를 찾지 못했다.  그런 시간에 이 탑 앞에 서서 1200년 전 여기 번성했던 대가람의 역사를 상상해볼 수 있지 않을까. 탑이 지켜온 천년의 세월, 그 침묵의 서원(誓願)을 말이다.

 

 

2022. 8. 4.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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