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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⑥] 절의의 도학자 야은 모신 서원과 조선 귀족 김사철

by 낮달2018 2022.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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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金烏書院)

▲ 금오서원 전경. 처음에 금오산 아래 있다가 임란 때 소실된 뒤, 현재의 위치인 선산 남산으로 옮겨왔다. ⓒ지역N문화

처음 금오서원(金烏書院)을 찾은 건 2013년 2월이다. 2012년 구미로 학교를 옮기고 1년 후였다. 선산읍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금오서원 이정표를 보고 망설이지 않고 차를 돌린 것이다. 서원에 관해 최소한의 정보도 없는 상태의 깜짝 방문이었는데, 나는 서원을 한 바퀴 빙 둘러보고 애걔걔, 하고 서둘러 발길을 돌렸었다.

오래 안동에 살면서 인근의 서원과 정자를 적잖이 돌아본 터수라, 내게는 고건축물에 대한 어떤 정형의 이미지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것은 도산서원이나 병산서원, 소수서원 등의 유명 서원 건축이 보여준, 여러 차례에 걸친 보수에도 지울 수 없는 ‘퇴락’의 이미지다. 나는 서까래나 추녀, 대청과 툇마루, 분합문과 문설주 따위에 묻은 손때처럼 은은하게 남은 그 ‘중세의 여운’에 겨워하곤 했었다.

그러나 내가 처음 만난 금오서원은 마치 갓 지은 건축물처럼 모든 부재가 새것처럼 보여서 전혀 예스럽지 않았다. 게다가 남산(藍山) 산비탈에 자리 잡은 서원이 가파른 계단이 몇 차례나 이어지면서 문루-강당-사당이 일직선의 위계를 이루고 있어서 어쩐지 불편했다. 그것은 마치 이 신흥 공업도시의 어울리지 않는 맵시처럼 낯설고 이질적었던 까닭이다.

야은 길재를 모시는 금오서원

금오서원은 1570년(선조 3) 여말삼은(麗末三隱) 중 한 분인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가 학문을 닦고 후학을 가르치던 금오산 아래 세워졌다. 1575년(선조 8) 사액을 받았으나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 때 소실되었다. 서원이 외진 곳에 있어 불편하던 차, 1602년(선조 35)에 지금의 남산 기슭으로 옮겨 복원하였다.

▲ 금오서원은 선산 남산 기슭에 세워졌다. 계단 위 문루인 '읍청루'의 단청이 화려하다. 좌우로 보이는 건물이 동서재다.

길재는 여말의 개혁적 지식인 그룹인 신진 사대부의 일원이었다. 기울어가고 있던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으로 개혁해 민본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이들은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할 것인가,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지킬 것인가로 엇갈렸다.

길재는 포은 정몽주와 함께 고려 왕조를 선택했으나, 포은처럼 목숨을 바쳐 고려 왕조를 지키는 대신 새 왕조에 대한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낙향을 선택했다. 길재가 ‘불사이군(不事二君)’과 ‘절의(節義)’의 표상으로 고려의 신하였되 조선에서 추앙받는 선비가 된 연유다. [관련 글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서원이 있는 구미·선산은 길재로부터, 김숙자(1389~1456), 김종직(1431~1492), 김굉필(1454~1504) 등 조선의 도통(道統)을 계승한 인물들의 연고지다. 길재의 도학 사상과 실천을 지향하는 학문은 제자인 김숙자를 통해 김종직과 김굉필에게 전해졌다. 길재의 도학 사상을 계승한 점필재 김종직, 신당 정붕(1467~1512), 송당 박영(1471~1540), 여헌(旅軒) 장현광(1554~1637) 등의 도학자들이 야은과 함께 금오서원에 배향된 이유다.

길재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배운 김숙자는 아들 김종직에게 이를 전했고, 김굉필은 김종직이 선산 부사로 있을 때 선산향교에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김굉필의 문하에서 배운 정붕은 박영의 스승이 되었다. 장현광과 류성룡의 문인인 노경임(1569~1620)이 저술한 선산 읍지 <숭선지(嵩善志)>의 ‘도통상승차제도(道統相承次第圖)’에서는 도통의 흐름을 ‘정몽주→길재→김숙자→김굉필→정붕→박영’이라고 제시하였다.

박영의 ‘송당학파’는 금오서원 건립에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박영의 문하에서 수학한 최응룡과 김취문 등이 안향을 모시는 백운동서원, 정몽주를 모시는 임고서원에 이어 길재를 모시는 서원을 건립해야 한다고 선산 부사에게 청원하여 서원이 세워졌기 때문이다. 또 송당학파는 길재의 <야은집>을 발간해 길재에서 박영으로 이어지는 도통을 정립하고자 하였다.[관련 글 : 무관 출신 문인 박영, 송당학파로 영남 학맥을 잇다]

▲ 금오서원의 강당인 정학당. 202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 정학당의 6칸 대청. 칸마다 가운데 문설주를 세운 영쌍창을 설치하고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다.
▲ 강당의 뒤편에서 바라본 정학당의 대청과 천장. 앞에 읍청루와 동서재의 지붕이 보인다.

이곳 남산으로 옮겨 복원한 뒤 금오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다시 사액을 받았다. 이때, 김종직, 정붕, 박영, 장현광을 추가로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을 나누어 맡았다. 금오서원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 당시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한 47개 서원 중의 하나로 살아남았다.

경내의 주요 건물로는 강당인 정학당, 문루인 읍청루, 사당인 상현묘(尙賢廟) 등이 있다. 매년 봄·가을에 향사를 지내고 있으며, 소장 전적 6종 23책이 있다. 방문 전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금오서원을 검색해 읽다가 “1972년에 단청 번와하였다”라는 대목에서 나는 무릎을 쳤다.

‘고색창연’이 없었던 이유는 1972년의 번와

따로 한자를 함께 적지 않았지만, ‘번와’는 ‘翻瓦’, “기와 덮기(이기)”이니 서원 건물들은 죄다 기와를 새로 얹었다는 얘기다. 내가 ‘고색창연’의 느낌을 전혀 느끼지 못한 연유가 거기 있었다. 실제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실린 금오서원 사진은 번와 이전의 모습인데, 그건 내가 떠올린 이미지 그대로였다.

산비탈에 자리 잡은 서원은, 산 중턱에 바투 붙은 문루인 읍청루(挹淸樓)의 붉은 단청이 강렬해서일까, 좀 위압적으로 아랫마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경내에 들어서면 서원 강당인 정학당(正學堂)이 다시 위압적으로 방문객을 맞는다. 계단 위 축대의 이 서원 강당이 위압적으로 느껴지는 까닭은 건물의 크기나 위치 등의 구조적 이유 탓이다.

▲ 대청의 가운데 설주가 있는 영쌍창. 판장문을 달았다.
▲ 서원의 동서재인 시민재(왼쪽)와 일건재. 검박한 맞배지붕 건물이다.
▲ 정학당의 왼쪽 툇마루. 저편에 보이는 지붕은 동재인 시민재다.

정학당과 상현묘는 2020년에 보물로 지정

학문을 강론하는 공간인 정학당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의 꽤 큰 건물이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양옆에 방을 두었다. 정학당의 규모가 커서 축대 아래 좌우에 나란히 선 맞배지붕의 동서재(東西齋)인 시민재(時敏齋)와 일건재(日乾齋)가 더 왜소해 보이는 건 여느 서원과 다르지 않다.

6칸 대청 뒤에는 칸마다 가운데 문설주를 세운 영쌍창(欞雙窓)을 설치하고 쌍여닫이 판장문을 달았는데 이는 오래된 고식(古式)의 수법이다. 또 정학당의 지붕은 “구조와 부재의 형식에서 절제미와 조형미가 돋보”여 임란 이후 건립된 조선 후기 강당 건축의 모범이 된다고 하여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학당 뒤는 성현을 배향하는 공간 상현묘의 삼문(三門)이 붙어 있다. 삼문 안에 상현묘는 정면 3칸, 측면 3칸 규모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지붕의 세부 구조에서 17세기 시대적 특징을 잘 간직하고 있다고 한다. 특히 지붕 구조는 종묘(사적 제125호) 정전보다 6년이나 앞서 역시 국가지정문화재 보물로 지정되었다.

▲ 서원의 사당인 상현묘. 정면 3칸 , 측면 3 칸의 맞배집이다. 지붕구조는 종묘 정전보다 6년이나 앞섰다. 2020년에 보물로 지정되었다.

정학당과 상현묘가 보물*로 지정된 게 2020년 12월이다. 서원을 찾기는 했으나 고건축물을 이해하는 안목이 따로 없으니 ‘보물’이 되었다고 해서 그게 예와 달리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아니다. 단지 기와를 새로 인 것으로도 건물의 이미지가 그처럼 달라질 수 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정도다.

2013년에 왔을 때는 견학하러 온 초등학생들이 몇 있었는데 이번에는 아무도 없어, 단출하게 혼자서 여기저기를 들여다보고 사진을 찍었다. 동재 뒤에 난 쪽문을 나서면 계단 아래로 서원보존회와 화장실이 있고, 오르막을 오르면 접대·회의·교육 등을 위한 시설인 남산실(藍山室)과 청아재(菁莪齋)가 나란히 서 있다.

남산실 뒤로 돌아서 산비탈의 데크 길을 오르면 정자 금오정에 닿는다. 원리 마을을 내려다보는 이 정자는 2018년에 남산실, 청아재와 함께 건립된 정자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정자지만, 규모가 작지 않다. 원리 마을은 물론, 새로 뚫린 33번 국도가 훤히 내려다보였다.

▲ 서원 뒤편 산비탈에 2018년에 세운 금오정.
▲ 금오정에서 내려다본 원리 마을과 33호 국도. 중앙에 보이는 긴 다리가 33번 국도다.

서원을 둘러보고 나서야 금오서원이 산비탈 ‘지형의 높낮이에 건물의 격을 맞춰 배치, 구성’했다는 사실을 거듭 확인할 수 있었다. 위치에 따라 건물의 위계가 결정되는 형식이다. 맨 위에 사당인 상현묘, 그 아래 정학당, 그리고 동서재, 마지막으로 문루인 읍청루가 수직 일직선을 이루는 것이다.

서원 담장 아래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사철의 송공비

읍청루 오른쪽 담 아래에 돌비 하나가 서 있었다. ‘부백김공사철송공비(府伯金公思轍頌功碑)’다. 선산 부사를 지낸 김사철의 송덕비라는데, 고을마다 즐비한 송덕비 중 하나겠거니 하고 지나쳤다. 어떤 선정을 폈는가 싶어 검색하다 보니 선산향교 앞에 그의 빗돌이 하나 더 있었다. 1892년 7월에 세운 ‘부사 김사철 교중유혜비(校中遺惠碑)’라니 그가 ‘향교에 끼친 은혜’를 기린 비다.

▲ 서원 담 아래 세운 선산 부사 김사철의 송공비. 그는 친일반민족행위자다.

선산 부사로 재임할 적에 선정을 베푼데다가 향교에도 적잖은 이바지를 했다는 얘기다. 혹시나 해서 인터넷을 검색했더니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도 오른 이다. 선산 부사 겸 영남 좌우도 암행어사를 역임한 김사철(1847~1935)은  1910년 합병 직후 조선 귀족이 된 이로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기록되어 있다.

1910년 한일합병 직후 「조선귀족령」에 의거하여 일본 정부로부터 조선 귀족 남작의 작위와 함께 2만 5000원의 은사공채를 받았다. 1912년 8월 ‘귀족의 작위와 은사금을 받은 자로서 한일관계에 특히 공적이 현저한 자’로 인정되어 일본 정부로부터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았다. 1935년 2월 17일 사망할 때까지 조선 귀족의 작위가 유지되었으며, 사망 직후 일본 정부에 의해 특지로써 위1급이 추승되어 종3위에 서위되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중에서

 

▲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결정된 김사철

야은 길재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 담장 아래 세운 빗돌은 물론 강제 병합 이전, 김사철이 선산 부사를 지낼 때의 것이긴 하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보면 야은 길재 선생을 모신 금오서원 들머리에 뒷날 친일반민족행위자로 규정된 자의 빗돌이 문지기 노릇을 하고 있는 셈이다.

사람들은 무심히 비명을 읽고 지나가지만, 그 주인이 일제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고 은사금 2만5천 엔(현 시가 5억)을 받은 친일 부역자라는 사실을 아는 이는 얼마나 될까.

야은은 새 왕조 건설에 협력하기를 거부하고 낙향하여 은둔의 삶으로 고려 왕조에 대한 충의를 지킨 도학자다. 그런데 뒷날 조선 귀족이 된 김사철의 빗돌이 서원 담장 아래 서 있으니, 역사가 연출하는 아이러니는 허전하고 씁쓸하다.

역사에서 배우지 못하면 미래가 없다는 얘기는 진부한 명제 같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아픈 근대사를 잊고 무심히 오늘을 사는 한국인의 정수리를 아프게 치는 죽비로 다가온다. 해방 77년, 우리는 여전히 청산하지 못한 역사의 길목 어디쯤 서 있다.

 

2022. 2. 14. 낮달

 

 

* 2021년 11월 19일부터 국가지정·국가등록문화재를 표기할 때 붙였던 지정번호를 표기하지 않도록 문화재보호법 시행령과 문화재보호법 시행규칙이 개정되었다. 이에 따라 공식 문서에서는 국보 ‘1호’, ‘2호’식의 지정번호를 표기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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