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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여헌기념관에 고인 ‘중세(中世)의 훈향(熏香)’과 21세기 사이

by 낮달2018 2022. 11.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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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 중세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과 여헌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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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여헌기념관은 구미 시내에서 구미대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 산비탈에 세워져 2014년에 문을 열었다.

인동장씨 가문에서 낸 대학자 여헌 장현광

 

선친으로부터 여헌(旅軒) 선생 이야기를 들은 것은 초등학교 때부터다. 이야기라고 해도 우리 집안에 그런 대학자가 계셨었다는 정도였을 뿐이었고, 나는 그의 함자도 몰랐다. ‘만회당(晩悔堂) 할배’ 이야기는 더 자주 들었으나, 역시 함자를 따로 말씀하시진 않으셨다.

 

여헌이 조선 중기의 대 유학자 장현광(張顯光) 선생임을 알게 된 것은 대학 시절, 철학 교재에서였다. 퇴계의 문인이 아니면서도 독자적 성리학 체계를 이룬 학자라고 소개된 글을 읽으며 나는 고개를 그저 끄덕였을 뿐이다. 그의 학문에 대해서 아는 게 전혀 없어서였는데, 40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그때와 그리 다르지 않다.

 

우리 집안의 본관(관향)인 인동은 1978년에 칠곡군 산하 면(面)에서 구미시 인동동과 인의동, 황상동 등으로 바뀌었다. 1980년대 중반 대학을 졸업한 뒤, 경주와 안동 등지를 옮아가며 살던 나는 퇴직을 앞두고 2012년에야 구미로 전입했다. 시내에서 낙동강만 건너면 인동이었으나, 차일피일하다 동락서원 앞 여헌기념관을 돌아본 게 2019년 3월이었다.

▲ 여헌 영정 18세기 작품이다.
▲ 기념관 입구에 세운 여헌의 동상. 대좌에 한글로 '여헌 장현광 선생'이라 새겼다.

퇴계와 율곡의 논의를 뛰어넘는 독자적 성리학 주창

▲ 여헌 장현광의 종택인 구미시 인의동 남산고택. 2020년 9월에 처음 찾았었다. 오른쪽이 여헌의 사당 삼문이다.

여헌 장현광(1554∼1637)은 열세 살 때부터 진사 장순에게 학문을 배웠고, 1571년(선조 4) <우주요괄첩(宇宙要括帖)>을 지어 대학자의 면모를 드러내기 시작하였다. 1576년부터 그 학문과 덕이 드러나 조정에 천거되었으나 여러 차례 사양하고 출사하지 않았다.

 

1591년 전옥서 참봉부터, 예빈시참봉·제릉 참봉(1594), 경서교정청 낭청(1601), 거창 현감·경서언해교정 낭청(1602), 용담 현령(1603), 순천 군수(1604), 합천군수(1605), 사헌부 지평(1607)으로 임명되었으나 사양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이후에도 사헌부 지평·성균관사업, 사헌부 집의·공조 참의, 이조참의·승정원 동부승지·용양위 부호군, 사헌부대사헌·부호군, 이조참판(1628), 대사헌(1630), 지중추부사·의정부 우참찬 등의 벼슬에 봉해졌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그의 생애에서 제수받은 벼슬에 나아간 예는 몇 차례 되지 않는다.

 

1595년 보은 현감으로 임명되어 부임했으나 반년 남짓, 1602년 공조좌랑으로 부임하여 <주역> 교정에 참여했고, 1603년 의성 현령으로 부임하였으나 몇 달 만에 돌아왔다. 1624년 사헌부장령으로 나아갔다가 1626년(인조 4) 형조참판에 특제되어 마지못해 사은(謝恩)한 것이 고작이다.

 

숱한 벼슬을 제수 받았으나 대부분 사양하고 학문에 정진한 선비

 

▲ 여헌의 문집 〈여헌집〉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출사 대신 그는 학문에 정진하여 1594년 유명한 <평설(平說)>, 1608년 <주역도설(周易圖說)>을 지었다. 여헌은 이(理)와 기(氣)를 이원적으로 보지 않고 합일적인 것 혹은 한 물건의 양면적인 현상으로 파악하였다. 1621년(광해군 13)에는 <경위설(經緯說)>을 지어 ‘이체기용(理體氣用)’, 즉 ‘이경기위설(理經氣緯說)’을 제창하였다. <경위설>에서는 이를 경(經)으로, 기를 위(緯)로 비유해 이·기가 둘이 아니고 체(體)와 용(用)의 관계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여헌은 퇴계의 문하인 한강(寒岡) 정구(1543~1620)에게 수학한 적이 있어 퇴계학파로 분류되고 있으나 이기론·심성론 등에서는 이황(1501~1570)의 학설과 서로 다른 점이 많다. 이러한 여헌의 철학은 명나라의 나흠순과 율곡 이이의 이기심성론에 크게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남인 계열의 학자 중에서는 매우 이색적이고 독창적이었다. 저서로는 <여헌집>·<성리설(性理說)>·<역학도설(易學圖說)>·<용사일기(龍蛇日記)> 등이 있다.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여헌은 여러 고을에 통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게 하고 군량미를 모아 보냈다. 그러나 이듬해인 1637년 왕이 삼전도에서 항복했다는 소식을 듣고 동해 가의 입암산에 들어가 은거하다가 향년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여헌은 일생을 학문과 교육에 종사했고 정치에 뜻을 두지 않았으나, 당대 산림(山林 : 학식과 덕은 높으나 벼슬하지 않고 시골에서 지내는 선비)으로 왕과 대신들에게 도덕 정치의 구현을 강조했다. 또 인조반정(1623) 직후에 조정의 부름을 받고 나아가 정경세와 함께 영남의 호소사(號召使) : 외적이 침입했을 때 의병을 모으거나 군량을 수집하기 위해 임시로 파견한 관원 혹은 관직)에 임명되어 국난 극복에 힘을 보탰다.

▲ 의성향교에 세워진 여헌 청덕비. 여헌은 의성현령을 지냈다.
▲ 여헌이 인조의 거듭된 입조 권유에 완곡히 거절의 뜻을 밝힌 청원서.
▲ 여헌기념관 제1전시실 내부
▲ 제1전시실 내부.
▲ 유명한 〈역학도설〉 목판. 〈역학도설〉은 역학을 도식으로 풀이한 역학서로 9권 9책의 목판본이다.

여헌은 사후, 1655년(효종 6)에 의정부좌찬성, 1657년에는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성주의 천곡서원, 서산의 여헌영당, 인동의 동락서원, 청송의 송학서원, 영천의 임고서원, 의성의 빙계서원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동락서원에는 그의 고제(高弟 : 제자들 가운데서 학식과 품행이 특히 뛰어난 제자)인 만회당(晩悔堂) 장경우(1581~1656)가 배향되었으니, 선친에게서 들은 ‘만회당 할배’를 비로소 만날 수 있었다.

 

지역에서의 여헌의 명성은

 

인동장씨의 관향에서 여헌의 명성은 드높아야 마땅할 터이나 정작 지역에서 그는 퇴계학파에서의 위상에 미치지는 못한 듯하다. 구미시에 편입된 뒤, 인동이 강동(낙동강의 동쪽) 지역의 중심이 되어 독자적인 생활권으로 발전해 가면서 인구가 급격히 늘어났고, 젊은 세대가 지역의 중심이 된 점도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고령층에서는 몰라도 젊은이들 가운데서 여헌을 아는 이가 얼마나 될까.

▲ 여헌이 강학하던 입암정사(경북 포항시 북구 죽장면 입암리 산21번지). 효종 때 입암서원으로 창건되었다. 왼쪽 바위가 입암이다.
▲ 여헌 장현광은 금오산 아래 오산(吳山)에 묻혔다. 구미시 오태동 산 233-1번지에 있다.

인동장씨 종가에서 구미시 수출대로 330(임수동 377-4) 번지의 900평 터를 내놓고, 국가와 지자체의 예산(국비 3억, 도비 7억, 시비 8억)에 자부담 5억으로 서원 건너편에 건물을 세운 것은 2011년, 기념관으로 개관한 것은 2014년 3월이다. 내가 처음으로 기념관을 찾은 때가 2019년 3월이니 나는 정작 구미에 살면서도 기념관 개관도 몰랐고, 개관 5년 만에야 그곳을 찾은 셈이다.

 

여헌기념관은 구미 시내에서 구미대교를 건너면 바로 오른쪽 산비탈에 자리 잡고 있다. 2층 콘크리트 슬래브 건물인데, 입구 계단 옆에 손을 소매 속에 넣은 채 앉은 여헌의 동상이 방문객을 맞는다. 뜻밖에 동상은 크지 않고, 대좌에 새긴 이름도 한글로 ‘여헌 장현광 선생’이다. 그게 21세기의 여헌이 대중에게 다가가는 방식일까.

▲ 기념관 옆 바위에 새긴 '좌벽제성(座壁題省 : 벽에 써 붙여 살피는 글). 바위 너머로 낙동강과 구미 공단이 보인다.

그러나 기념관 현관 이마에 새겨진 여헌기념관은 한자다. 입구 왼쪽 벽에 한글로 씌어 있지만, 아쉬운 대목이다. 한글로 써서 그 의미가 덜할 일도 없을 터인데 말이다. 400년 전의 인물이라, 유물과 전적(典籍)이 한자 일색인 점은 어찌할 수 없다 하더라도 현 세기에 불러내는 여헌의 모습과 사상은 좀 달라지면 좀 좋은가.

 

기념관 1층에는 전시실과 시청각실, 사무실과 수장고 등이, 2층에는 전시실과 세미나실 등의 시설을 갖추었다. 기념관의 건립과 운영은 2002년 설립한 여헌학회가 주도적으로 관여하고 있다고 했다.

 

2019년엔 여느 전시 시설처럼 월요일이 휴관일일 거로 믿고 일요일에 방문했는데 문이 잠겨 있었다. 휴관일이 일요일이었기 때문이다. 며칠 후에 다시 와서야 기념관을 둘러볼 수 있었다. 방문객은 나뿐이었고, 전시실은 조명이 꺼져 있었다. 나는 근무자에게 불을 켜달라고 해서 전시실을 둘러보았었다.

 

‘중세의 훈향’에도 고적하기만 한 기념관

 

그리고 3년 뒤인 지난 14일, 다시 기념관을 찾았을 때도 이전 방문과 상황은 똑같았다. 나는 3년 전과 마찬가지로 근무자에게 불을 넣어달라고 요구했고, 2층 전시실에선 내가 직접 불을 켜고 전시실을 둘러보았다. 월요일 오전이긴 했지만, 적막한 기념관을 둘러보는데 쓸쓸한 기분이 됨을 어쩌지 못했다.

 

여헌의 시대로부터 4백 년이 흘렀을 뿐이지만, 21세기의 시민들과 여헌과 그의 학문 사이에는 쉬 넘나들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한다고 쓴 이유다. 또 그것이 기념관과 동락서원이 찾아오는 이 없는 고적(孤寂)을 견디는 이유고, 은행나무처럼 낡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인지 모른다.

 

 

2022. 11.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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