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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그 서원은 여헌이 심은 4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지키고 섰다

by 낮달2018 2022.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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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⑱]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東洛書院)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구미시 임수동 낙동강변의 동락서원은 1655년(효종 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여헌 장현광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창건했다.

동락서원(東洛書院)은 구미시 임수동 373번지, 낙동강 강변의 나지막한 산비탈에 자리 잡았다. 서원 앞이 아닌 오른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있긴 하지만, 전통적 배산임수(背山臨水)의 좌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1974년에 개통한 낙동대교가 산 앞을 성큼 막으며 공단동으로 이어지고 있어서 사람들은 도로를 지나며 서원을 굽어보며 지나야 한다.

서원이 깃들인 산은 1970년대까지 우리 집안의 선산이었다. 지금도 거기엔 우리 집안 윗대의 묘소가 10여 기 남아 있다. 고등학교 때부터 한가위 전이면 나는 집안의 재종숙(再從叔), 그러니까 내 칠촌 아저씨와 함께 그 산에 모신 선대 묘소의 벌초를 다녀야 했다.

 

고3 열아홉에 만난 서원 앞 은행나무


예초기 같은 기계는 상상도 할 수 없던 시절이다. 묘소에서 아재는 저만큼에서, 나는 이만큼에서 낫으로 차근차근 풀을 깎아서 벌초했었는데, 그런 속도로 어떻게 그 많은 봉분의 벌초를 끝낼 수 있었는지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승용차 따위도 물론 없었다. 산소를 찾아 이동할 때면 나는 버스로 아재는 자전거로 움직였다.


그리고 음력 시월에는 우리가 흔히 ‘묘사(墓祀)’라고 불렀던 시제(時祭), 즉 묘제(墓祭)를 다녔다. 이동은 벌초 때와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하루해를 꼴딱 넘기며 시제를 모셨다. 아재는 보자기에 싸 온 제물을 진설하고 그래도 종손이라고 날 산소 앞에 무릎을 꿇리고 축문을 꺼내 읽었다.

아마 고교 졸업반 때였을 것으로 추측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다. 시제를 마치고 내려오는 길, 서원 앞 은행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문득 하늘을 쳐다보았는데 세상에, 나는 눈앞에서 펼쳐지는 광경에 압도되었다. 하늘 가득 노란 은행잎이 마치 꽃비처럼 떨어져 내렸다. 새파란 하늘에 점점이 찍힌 노란 잎사귀들의 윤무(輪舞)를 바라보면서 나는 숨막히는 듯한 감동이 전율했었다.

고3 때였다면, 1974년이다. 구미대교가 그해 12월에 개통했다니, 서원 앞에는 그 다리가 막아섰을 때였을 것이지만, 은행나무 말고는 내게 공사 중이던 다리의 기억은 남아 있지 않다. 그 후로 나는 근처를 지날 때면, 은행잎이 노랗게 물든 늦가을에 다시 서원을 찾으리라고 다짐하곤 했다.

▲ 서원 앞 수령 400년이 넘는 은행나무. 여헌이 심었다고 한다.
▲ 동락서원 앞은 구미 시내와 인동을 잇는 구미대교가 들어서면서 전망을 잃었다. 왼쪽이 구미대교다.

그러나 늦가을에 동락서원을 다시 찾은 건 그로부터 46년이 지난 2020년 10월의 마지막 날이었다. 하필이면, 아직 은행잎 단풍은 일렀다. 나는 상기도 푸른 은행나무 사진을 찍으면서 46년 전의 감동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서원 앞에서 관리인을 만나 그가 열어주는 서원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건 그나마 다행이었다.

46년 만에 다시 만난 서원의 은행 단풍

그리고 지난 14일에 나는 노랗게 물든 서원 앞 은행나무를 다시 만날 수 있었다. 1982년 보호수로 지정된 이 고목은 400년 나이보다는 훨씬 젊고 날씬해 보였다. 비슷한 수령의 농소리 은행나무에 비기면 나무갓[수관(樹冠) : 나무의 가지와 잎이 달린 부분으로 원 몸통에서 나온 줄기]이 단출해서다.

이 나무는 여헌 장현광 선생이 서원 오른쪽 아래의 부지암정사(不知巖精舍)에서 강학할 때 손수 심은 것으로 전한다. 주변에 수나무가 없는데 해마다 많은 열매가 열리니 ‘신이(神異)’한 나무라 불린다.

▲ 여헌의 문인 만회당 장경우가 세운 부지암정사. 여헌은 여기서 제자들에게 강학하였다고 한다. 1975년 복원하였다.

동락서원(東洛書院)은 1655년(효종 6)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조선 후기의 성리학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1554~1637)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고자 창건한 서원이다. 1676년(숙종 2)에 ‘동락’이라는 사액을 받아 사액서원으로 승격되었다.

정주학의 연원이라는 뜻이 서원 이름이 된 까닭

동락이란 ‘동방의 이락(伊洛)’이란 뜻인데, 이락은 성리학과 양명학 원류인 송나라의 정호(程顥, 1032~1085)와 정이(程頤, 1033~1107) 형제가 강학하던 이천(伊川)과 낙양(洛陽)을 가리키니, 곧 정주학(程朱學)의 연원(淵源)을 뜻한다. 퇴계 이황(1501~1570)의 직접 훈도를 받지 않았으면서도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이룬 여헌을 기리는 이름이다.

동락서원은 선현 배향과 지방 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다가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1904년(광무 8) 영당(影堂 초상을 모신 사당)을 건립하였다. 1971년 서원 건물 전체를 다시 세우면서 제자인 만회당(晩悔堂) 장경우(1581~1656)를 추가로 배향하였다.

▲ 17세기의 대표적 산림 유학자 여헌 장현광 선생 초상(1633년작)

은행나무 뒤 축대의 계단을 오르면 서원의 2층 3칸으로 된 문루 준도문(遵道門)이다. 누각을 지나면 바로 정면의 축대 위에 6칸의 강당 중정당(中正堂)이 당당하다. 중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좁은 방으로 되어 있는데, 마루는 원내의 행사와 유림의 회합 장소로 사용된다. 중정당은 1985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로 지정되었다. 중정당은 마당 양편에 각각 3칸인 동재 근집재(槿執齋)와 서재 윤회재(允懷齋)를 거느렸다.

서원의 맨 위쪽에는 묘우(廟宇)인 3칸의 경덕묘(景德廟). 일반적으로 쓰는 ‘사(祠)’ 대신 ‘묘(廟)’를 썼다. 묘우에는 여헌과 만회당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매년 2월 중정(中丁)[두 번째 정일(丁日)], 8월 중정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 동락서원의 강당인 중정당. 모든 자료에 6칸이라고 되어 있으나 실제는 정면 5칸, 측면 2칸이다. 이유는 알 수 없다.
▲ 강당에서 바라본 동락서원의 외삼문 문루인 '준도문', 2층 누각의 3칸 건물이다.
▲ 서원의 동재인 근집재. 3칸 맞배집인데 맨 오른쪽은 마루다.
▲ 서원의 서재인 윤회재. 동재인 근집재와 대칭을 이루는 3칸 맞배집이다.
▲ 동락서원의 묘우인 경덕묘. 3칸 맞배집으로 여헌과 만회당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여헌은 인동 장씨가 자랑하는 대학자다. 우리 집은 인동 5파 가운데 종파인 중리(中里)파다. 여헌은 남산파로, 퇴계 이황(1501~1570)과 남명 조식(1501~1572), 율곡 이이(1536~1584)에 이은 17세기의 대표적인 성리학자다. 그는 류성룡 등의 천거로 대사헌, 공조판서 등 20여 차례 벼슬을 제수받았다.

그러나 그는 이를 모두 사양하고 보은 현감으로 1년, 의성 현령으로 반년 출사했을 뿐 오직 학문 연구에만 몰두했다. 그가 흔히 학식과 덕이 높지만, 벼슬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내는 선비를 일컫는 ‘산림(山林)’으로 불리는 이유다. 그는 한편으로 퇴계의 문하가 아니면서도 독자적인 성리학 체계를 이룬 대학자이기도 하다.

▲ 서원 앞 건너편 길가에 2014년에 개관한 여헌기념관. 찾는 이 없이 고적하기만 했다.
▲ 구미대교에서 내려다본 동락서원과 은행나무. 은행나무 아래 문루인 준도문이 보인다.

그러나 서원도 기념관도 고적하기만 한 21세기

동락서원 앞 다리 건너 도로변에 인동 장씨 남산 종중과 동락서원이 기증한 900여 평의 대지에 2014년에 개관한 여헌기념관이 서 있다. 국비 3억, 도비 7억, 시비 8억, 자부담 5억 등 23억의 비용을 들여 지은 기념관은 그러나, 드나드는 이 없이 한적하기만 하다. 한적하기로는 늘 잠겨 있는 동락서원도 마찬가지다.

물리적 시간으론 4백 년이지만, 조석으로 구미대교를 건너다니는 시민들과 동락서원·여헌 사이에는 쉬 넘나들지 못하는 깊은 골짜기가 존재한다. 그것이 기념관과 서원이 찾아오는 이 없는 고적(孤寂)을 견디는 이유고, 은행나무처럼 낡아갈 수밖에 없는 까닭이다.

2022. 11. 21.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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