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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식민지 시대 - 항일과 친일34

기미년, 기생들도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기미년(1919) 기생조합의 만세운동 3·1 만세운동은 특정 날짜로 이름이 붙긴 했지만 실제로 장장 두 달여에 걸쳐 전국 방방곡곡에서 들불처럼 일어난 독립 만세운동이었다. 국내는 물론 만주 지역에까지 번져나간 이 전 민족적 항일운동의 총 시위 횟수는 2천 회 이상, 참여자는 연인원 2백만 이상으로 추산되고 있다. ‘모든 계층’이 참여한 민족운동 조선총독부의 공식 기록에도 집회에 참여한 인원은 106만여 명이고, 그중 사망자가 7509명, 구속자는 4만7천여 명이었다. 만세운동을 준비하고 주도한 인물은 민족대표 33인이었지만 각 지역으로 확산한 만세 시위운동의 주력은 무명의 민중들이었다. 3월 1일부터 4월 11일까지는 매일 10회 이상 시위가 일어났으며, 시위운동의 정점을 이룬 4월 1일에는 모두 67회.. 2024. 3. 19.
의열단원 김익상의 조선총독부·후앙푸탄 의거 [역사 공부 ‘오늘’] 1921년 9월 12일, 조선총독부 투탄 / 1922년 3월 28일, 후앙푸탄 의거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조선총독부 폭탄 투척(1921. 09. 12.) 1921년 9월 12일은 월요일이었다. 오전 10시 20분께, 전기수리공 차림의 젊은이가 서울 남산 왜성대(倭城臺)에 있는 조선총독부 청사에 나타났다. 전기 시설을 수리하러 온 것처럼 태연하게 조선총독부 청사로 들어온 청년은 2층으로 올라가 비서과에 폭탄을 던진 다음, 회계과장실에도 폭탄을 던져 넣었다. 비서과에 던진 폭탄은 폭발하지 않았으나 회계과장실에 던진 폭탄은 굉음과 함께 폭발했고, 일본 헌병들이 놀라 뛰어 올라왔다. 청년은 대담하게 아래층으로 내려오면서 이들.. 2023. 12. 15.
‘풍산 트로이카’ 세 명 중 그에게만 서훈이 비켜갔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④] 조선공산당 중앙집행위원 이준태(李準泰, 1892~195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풍산 오미마을.. 2023. 7. 4.
103돌 삼일절…219명 서훈, 백범 며느리 안미생도 국가보훈처 103주년(2022) 삼일절에 219명 독립유공자 포상 국가보훈처는 103주년 3·1절 계기로 김구 선생의 맏며느리 안미생 선생 등 219명을 독립유공자로 포상했다. 이번 포상자는 건국훈장 84명, 건국포장 30명, 대통령 표창 105명이다. 건국훈장은 애국장 20, 애족장 64명이며, 이 가운데 여성은 23명이다. 이번 포상으로써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독립유공자로 포상된 분은 1949년 최초 포상 이래 건국훈장 11,590명, 건국포장 1,471명, 대통령 표창 4,224명 등 총 17,285(여성 567명)에 이른다. 해방 당시의 우리나라 인구는 2천5백만 정도였으니, 성인을 1천만으로 잡아도 해방된 지 70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포상받은 독립유공자가 2만이 되지 않는 상황은 참으로 아.. 2023. 2. 28.
2·8독립선언 주도 김상덕 반민특위 위원장의 뒤늦은 귀향 경북 고령에서 ‘2.8독립선언 100주년 기념식’ 열어 김상덕 선생 기려 지난 8일은 1919년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에 밑불이 된 도쿄 유학생들의 2·8독립선언 100돌이었다. 이날 11시에는 일본과 한국 양국에서 100돌 기념 행사가 열렸다. 일본에는 국가보훈처장과 임정 수립 100주년 기념사업추진위원장 등이, 국내 기념식에는 국회의장과 주요 정당 대표 등이 대거 참석해 이 100돌의 의미를 되새기고 기렸다. 문재인 대통령도 페이스북에 올린 글에서 젊은 유학생들의 독립을 향한 투지와 의기를 평가했다. 문 대통령은 이들의 “‘조선청년독립선언서’는 우리 독립운동의 화톳불을 밝히는 ‘불쏘시개’가 되었다”면서 거기 이름을 올린 열한 분 실행위원의 "이름 하나하나를 기억하겠다"고 밝혔다. 경북 고.. 2023. 2. 8.
서원과 향교 앞 송덕비의 목민관, ‘조선 귀족’이 되다 금오서원과 선산향교 앞 송덕비로 남은 ‘친일반민족행위자’ 김사철 며칠 전 선산읍 원리에 있는 금오서원(金烏書院)을 들렀다가 돌비 하나를 만났었다. 읍청루 오른쪽 담장 아래 금오서원 안내판 옆의 이 빗돌은 ‘부백김공사철송공비(府伯金公思轍頌功碑)’다. 부백(府伯), 그러니까 선산 부사 김사철(金思轍, 1847~1935)의 송덕비다. 금오서원 앞 송덕비의 주인공 선산부사 김사철 고을마다 줄지어 선 숱한 송덕비 중 하나겠거니 하고 지나쳤다가 나중에 인터넷을 검색해 보니 선산향교 앞에 그의 빗돌이 하나 더 있다. 1892년 7월에 세운 ‘부사 김사철 교중유혜비(校中遺惠碑)’니, 이는 그가 ‘향교에 끼친 은혜’를 기린 비다. 선산 부사로 재임할 적에 선정을 베푼데다가 향교에도 적잖은 이바지를 했다는 얘기다. 혹시나.. 2022. 2. 19.
그 딸의 ‘좌익 아버지 찾기’와 역사적 진실 ‘국내파 사회주의자들의 최후 집결체’ 경성 콤그룹의 핵심 이관술과 그 유족 이야기 사회주의자 이관술(李觀述, 1902~1950)을 이름으로나마 처음 만난 건 지난해 봄, 최백순의 을 읽으면서였다. ‘알려지지 않은 별, 역사가 된 사람들’이라는 부제가 달린 이 만만찮은 저작을 읽으면서 나는 당황했고, 이동휘와 박헌영, 김재봉과 권오설 등의 그나마 익숙한 이름들 사이로 튀어나오는 낯선 이름들의 이력 앞에서 절망했다. 그것은 임시정부를 포함해, 망명지 중국 땅에서 펼쳐진 독립운동사를 공부하면서 나름 잘 알고있다고 여겼던 한국 현대사의 어떤 부분에 대해 내가 ‘완전히 무지’하다는 통렬한 깨달음 탓이었다. 조선공산당 초대 책임비서 김재봉을 비롯한 5인의 ‘사회주의 독립운동가’ 기사는, 그런 상황에서 당대의 역사적.. 2021. 4. 13.
혁명가, 사회주의 소련에서 ‘반혁명’ 혐의로 처형되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⑤] 조선공산청년회 중앙위원·코민테른 전권위원 김단야(1901~1938)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반공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안동 지.. 2021. 1. 17.
혁신유림 이은 항일 지식인, 일제와 싸우다 쓰러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③] 제3차 조선공산당(안광천) 조직부장 김남수(1899~1945)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구한말 애.. 2021. 1. 7.
권오설, 살인적 고문 견디고 ‘6·10만세’를 지켜냈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②] 조선공산당 산하 고려공산청년회 책임 비서 권오설(1897~1930)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 19.. 2020. 12. 30.
조선공산당도 ‘일제통치 타도·조선 독립’이 목표였다 [사회주의 독립운동가①]조선공산당 초대 책임 비서 김재봉(1890~1944)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이 세상에 나온 것은 1848년 2월이었고, 69년 뒤인 1917년 러시아에서 세계 최초의 공산주의 혁명이 성공했다. 식민지 치하에 조선공산당이 창립된 것은 1925년 4월이었다. 조선공산당은 ‘조선혁명’의 과제를 민족해방혁명, 반제국주의 혁명으로 규정하고 있었다. 그것이 자기 과업을 수행하면서 독립운동에도 헌신한 이유였다. 그러나 이들은 해방 후 38도선 이남에 친미 반공 국가가 세워지면서 잊히기 시작했다. 일제의 가혹한 탄압 아래서 이들이 벌인 계급투쟁도, 반제국주의 민족해방 투쟁도 이념 저편에 묻혀 버린 것이었다. 조선공산당 창당을 전후한, 이 잊힌 혁명가들의 삶과 투쟁을 돌아본다.[기자말] 한국 최초의.. 2020. 12. 24.
부산경찰서에서 터진 폭탄, 의열단 투쟁의 출발이었다 박재혁 의사의 ‘부산경찰서 폭탄 투척 의거’ 100주년을 기리며 올해는 박재혁(朴載赫, 1895~1921) 의사의 ‘부산경찰서 투탄(投彈) 의거’ 100주년을 맞는 해다. 1920년 스물다섯 조선 청년은 단신으로 폭력적 식민통치 권력 기구였던 경찰서에 들어가 서장을 향해 폭탄을 던졌고, 이듬해 감옥에서 단식 끝에 순국했다. 25살 청년 박재혁, 부산경찰서에 폭탄을 던지다 인간의 수명도 쉽게 이르기 어려운 시간인 ‘100년’은 굵직한 역사적 사건과 어우러져 오늘에 소환된다. 1세기 전, 한 식민지 청년의 투쟁과 희생을 기리면서 제대로 청산하지 못한 오욕의 식민지 역사와 함께 독립을 위해 젊음을 던진 청년의 분노와 그의 시대를 생각한다. 1920년이 더러 ‘민국(民國) 2년’으로 불리는 이유는 그 전해(19.. 2020. 10. 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