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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김구13

[오늘] 북한, 남한 이어 단독 정권 수립 [역사 공부 ‘오늘’] 1948년 9월 9일 – 북한, 사회주의 정권 수립 남한 정부 수립 25일 만에 북한도 정권 수립 1948년 9월 9일, 북위 38도선 이북의 한반도 반쪽, 평양에서 김일성을 수반으로 하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인공)이 수립되었다. 38도선 이남의 남쪽 절반, 서울에서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하는 단독정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8.15.)된 지 25일 만이었다. 같은 해 4월, 남한만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고 김규식·조소앙 등과 함께 남북협상을 통해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입각한 통일을 모색하고자 한 김구의 평양행은 실패로 돌아갔다. 김구를 비롯한 남한 대표들이 평양에 도착하기 전에 이미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전 조선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소집하여 28명의 주석단을 선출해 놓고.. 2020. 9. 9.
[오늘] 독립군과 국민혁명군으로 일본과 싸웠던 김홍일 장군 떠나다 [역사 공부 ‘오늘’] 1980년 8월 8일,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싸운 김홍일 장군 서거 1980년 8월 8일, 중국군 제19사단장 대리와 광복군 참모장으로 한국과 중국을 넘나들며 일본과 싸웠던 일서(逸曙) 김홍일(金弘壹, 1898~1980) 장군이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는 일찍이 독립운동에 투신하여 조선의용군 부사령관으로, 장제스의 국민혁명군으로 일본과 싸웠고 뒷날 한국광복군 총사령부 참모장을 역임했던 이였다. 향년 82세. 해방된 조국에 돌아온 그는 군 역사상 처음으로 장군(준장)으로 임관하여 육군사관학교장을 맡았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시흥지구 전투사령관으로 한강 선에서 밀려오는 적을 1주일간 방어하고 육군 제1군단장으로 평택지구에서 포항 탈환 작전에 이르기까지 세운 전공으로 태극무공훈장을.. 2020. 8. 6.
[순국]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형장에서 지다 1932년 오늘(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본 혼슈(本州)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 육군 공병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하였다. 무릎을 꿇려 작은 십자가에 묶이고 눈을 가린 윤 의사의 10m 앞에서 일본군 병사가 쏜 총탄은 의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총살형으로 순국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된 지 234일 만이었다. [관련 기사 :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이태 전인 1930년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 2019. 12. 18.
[오늘] 대한민국 임시정부, 일본에 선전 포고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41년 12월 9일, 임정, 일본과 독일에 선전포고 1941년 12월 9일, 충칭(重慶)의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정)는 일본과 독일에 대하여 선전포고를 함으로써 본격적인 항일 독립전쟁을 시작하였다. 12월 7일, 일본군이 하와이 진주만의 미군 기지를 기습 공격함으로써 발발한 태평양전쟁이 발발한 지 이틀 만이었다. 임정의 항일독립전쟁은 의열투쟁과 독립군 단체 지원, 광복군 창설 등의 군사 활동으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봉창과 윤봉길 의거로 대표되는 의열투쟁은 한국 독립에 대한 세계의 여론을 환기한 성과를 거두었으나 일제의 보복을 피해 임정이 중국 각지를 떠돌아야 했다. 1940년 충칭으로 옮겨온 임정은 1940년 9월 17일 광복군을 창설하였다. 지청천을 총사령관으로 한 광복군은 .. 2019. 12. 8.
하얼빈 의거 110주년, ‘안중근 글꼴’ 나왔다 GS칼텍스 ‘독립 서체 캠페인’, 지금까지 총 5종 글꼴 공개 2019년은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이 되는 해다. 올 3월부터 '독립 서체 캠페인'을 진행해 온 지에스(GS)칼텍스(아래 지에스)에서는 지난 8월 15일 '안중근 의사'의 서체를 추가 배포한 바 있었다. ‘독립 서체’ 캠페인은 파편적인 기록만 남은 일부 독립운동가분들의 글씨체를 모아서 전문 폰트 개발업체와 협업, 당시의 글씨체를 현대에 맞게 복원·제작하는 것이다. 지에스는 이를 무료 배포해 그 의미를 많은 사람과 함께하고자 한다고 밝히고 있다. 안중근체는 안 의사가 의거 거행 전 동지인 우덕순에게 준 한시와 한글 시 에 남아 있는 그의 육필을 기초로 제작한 글꼴이다. 안 의사는 적지 않은 한문 유묵을 남겼으나 한글로 쓴.. 2019. 10. 28.
[오늘] 충칭에서 임시정부, 한국광복군을 창설하다 [역사 공부 ‘오늘’] 1940년 9월 17일, 충칭(重慶)서 광복군 총사령부 성립전례 1940년 9월 17일, 중국의 임시 수도 충칭(重慶)의 가릉빈관(嘉陵賓館)에서 광복군 총사령부의 성립 전례(典禮)가 거행되었다. 그로써 1919년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수립한 지 21년 만에 임정은 대한민국의 이름으로 군대를 보유하게 되었다. 임시정부 주석 김구는 「광복군 선언문」을 통하여 광복군 창설의 취지를 “한·중 두 나라의 독립을 회복하고자 공동의 적인 일본 제국주의를 타도하며 연합군의 일원으로 항전할 것을 목적으로 한다”라고 천명하였다. 비록 타국에서 세운 임시정부였지만, 임정은 1919년 「대한민국육군임시군제(軍制)」를 제정하여, 군대를 창설한다는 원칙에 따라 군대의 편제와 조직에 관한 법규를 마련한 바 있었.. 2019. 9. 17.
1945년 8월, 독수리작전과 장준하 해방, 그러나 무산된 ‘독수리 작전’ 역사에서 가정이란 얼마나 부질없고 허망한 일인가. 소련이 한 주일쯤이라도 늦게 대일본 선전포고(1945.8.8.)를 하였더라면, 히로시마에 원폭 투하(8.6.)가 한 주일쯤 일렀더라면……. 안타까운 것은 장준하 선생 등이 광복군 장교로 미국 전략사무국(OSS Office of Strategic Service, 미국 CIA의 전신) 훈련을 받고 참여한 국내 진공 작전이 무산된 점이다. 장준하(1918~1975), 김준엽(1920~2011, 전 고려대 총장) 등이 1944년 일본 학도병으로 징집되었다가 배속된 부대를 탈출하여 광복군에 합류한 것은 잘 알려진 이야기다.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자 광복군은 연합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기 위한 외교적 노력을 기울이는 한편, 임시정부의 .. 2019. 8. 15.
[오늘] 백범 김구, 육군 소위 안두희의 흉탄에 스러지다 [역사 공부 ‘오늘’] 1949년 6월 26일, 경교장에서 백범 피살 1949년 6월 26일은 일요일이었다. 백범 김구(1876~1949)는 경교장 집무실에서 창암학원 여교사와 담소 중이었다. 비서실에서는 경교장에 여러 차례 다녀간 바 있는 육군 소위 안두희가 비서들을 상대로 너스레를 떨고 있었다. 안두희는 광복군 출신의 김학규(1900~1967) 장군의 소개로 백범을 만났던 인물이었다. [관련 기사 : “탕! 탕! 탕! 탕!…내레 금방 선생님을 쏴시오” 참조] 창암학원 여교사가 떠난 후 선우진 비서는 안두희를 백범의 집무실로 안내해 주고 지하 부엌으로 내려갔다. 잠시 후, 백범의 집무실에서 네 발의 총성이 울렸고 경교장 정문 경호실의 경호 순경들이 카빈총에 실탄을 장전하고 황급히 본관으로 뛰어 올라왔다.. 2019. 6. 25.
갑자기 김구 곁을 떠난 며느리, 지금껏 ‘수수께끼’ 해방 70년과 겹치는 독립운동가 김인 70주기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1918~1945)의 70주기가 3월 29일이란 사실을 나는 청년백범 4기의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의 해설을 맡았던 홍소연 선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013년 자료실장을 끝으로 백범기념관에서 정년 퇴임한 홍 선생은 그리던 해방을 맞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던 한 청년 투사의 죽음을 느꺼워하고 있었다. 임정 요인 백범 김구의 맏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해야 했던 김인은 폐병을 앓다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했다. 1945년 3월 29일, 해방 다섯 달 전이었다. 그의 70주기가 해방 70년과 겹치는 까닭이다. 해방 전후사를 살펴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을 맞지 .. 2019. 3. 11.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④] 항저우, 전장 시기의 임정 답사 둘째 날, 자싱(嘉興)과 하이옌(海鹽)을 거쳐 우리는 어둠 살이 내리고 있는 항저우(杭州)에 닿았다. 하나둘 불을 켜고 있는 도시로 들어가면서 나는 상하이를 떠나 이 낯선 도시로 스며들어야 했던 1932년의 임시정부(아래 임정)와 백범을 비롯한 요인들을 생각했다. 항저우는 장강(長江) 델타 지역에 자리 잡은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다. 중국의 7개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도시는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일찍부터 운하를 이용한 상업이 발달했다. 10세기에 항저우는 난징(南京)과 청두(成都)와 함께 남송(南宋) 문화의 중심지였다. 12세기 초부터 1276년 몽골이 침입하기까지는 남송의 수도였고.. 2019. 3. 6.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을 서는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①] 상하이, 1919년에서 1932년까지 광복 70년, 서른여덟 명의 ‘청년 백범 4기’ 답사단은 지난 1월 23일부터 27일까지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 자취를 찾아가는 여정에 올랐다. 1919년 4월, 상해에서 수립된 임정의 중국 내 이동 경로는 항저우(杭州), 전장(鎭江), 창사(長沙), 광저우(廣州), 류저우(柳州), 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까지다. 그러나 우리의 여정은 우선 창사로 옮기기 직전의 난징(南京)까지다. 지난 세기, 백범을 비롯한 임정 요인들이 배를 타고, 혹은 기차를 타거나 걸어서 옮겨 다닌 수백, 수천, 수만 리의 길을 21세기의 후손들은 비행기로 날아 전세 버스를 타고 따른다. 그들이 일제에 쫓기며 꾸려야 했던 풍찬노숙 16년(191.. 2019. 3. 2.
<백범일지>를 다시 읽으며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2015년 1월에 나는 4박 5일간(23~27) ‘청년 백범’과 함께 임시정부 노정을 따르는 4기 답사에 참여했다. 상하이에 세워진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일제의 압박과 중일전쟁의 전개에 따라 무려 일곱 번이나 옮겨가야 했다. 답사단은 상하이에서 출발하여 자싱(嘉興), 하이옌(海鹽), 항저우(杭州), 난징(南京)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1920~30년대에 걸쳐 임정이 걸어야 했던 고통의 세월을 확인할 수 있었다. 비록 그게 거의 1세기 뒤에 이루어진 수박 겉핥기 답습에 불과했다 할지라도 말이다. 답사는 임정이 26년 동안 거친 도시가 아홉 군데나 되어 2차로 나누어 진행되었다. 그러나 나는 아쉽게도 뒤에 진행된 2차 답사에는 다른 사정으로 참여하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2차 답사로 충칭까지.. 2019. 3.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