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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해동초성이 시서(詩書)를 즐기던 ‘매와 학’의 정자

by 낮달2018 2022. 9.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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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⑰] 고아읍 예강리 매학정 일원(梅鶴亭一圓)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고산 황기로 유적 매학정. 숭선대교를 오가며 먼빛으로 보던 이 정자를 처음 찾은 건 2013년 3월이었다.
▲ 매학정에서 내다본 낙동강과 숭선대교. 다리는 해평면(강 건너)과 이쪽 고아읍을 잇는다.

구미시 해평면에서 고아읍으로 들어오려고 낙동강 다리 숭선대교를 건너면 오른쪽 강변 나지막한 산비탈에 팔작지붕의 정자 하나가 보인다. 매학정(梅鶴亭).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은 정자라 싶으면서도 워낙 산뜻한 모습이 그리 유서 깊다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었다.

 

고아읍 예강리 매학정은 고산 황기로 유적

 

2012년에 구미로 옮겼지만, 이듬해 3월이 되어서, 해평 쌍암고택에 다녀오는 길에 처음 그 정자를 찾은 것은 그래서였을 것이다. 문화재 안내판에 고산 황기로(1521~1575 이후)의 유적이라고 씌어 있었지만, 나는 그를 알지 못했다. 하고 많은 선비 중 한 사람이겠거니 하면서 사진 몇 장을 찍고 돌아서고 말았던 이유다. 

 

매(梅)와 학(鶴)이라면, “매화를 아내 삼고 학을 자식 삼아 산다”고 해 ‘매처학자(梅妻鶴子)’라 불린 송나라 때 임포(林逋)가 있다. 초임 교사 시절에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서 정철의 ‘관동별곡’을 가르치면서 나는 임포를 처음 알았다.

 

금강대 맨 우층의 션학(仙鶴)이 삿기치니, (금강대 맨 꼭대기에 선학이 새끼를 치니)

츈풍(春風) 옥뎍셩(玉笛聲)의 첫잠을 깨돗던디, (봄바람에 들려오는 옥피리 소리에 첫잠을 깨었던지)

호의(縞衣) 현샹(玄裳)이 반공(半空)의 소소 뜨니, (흰옷, 검은 치마로 단장한 학이 공중에 솟아 뜨니)

셔호(西湖) 녯 주인을 반겨셔 넘노는 듯. (서호의 옛 주인과 같은 나를 반겨 넘나들며 노는 듯하네.)

▲ 매학정은 3 층의 기초단 위에 주춧돌을 놓고 기둥 세운 남향 홑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4, 측면 2칸에 마루방과 대청이 두 칸씩이다..
▲ 매학정 너머 강과 숭선대교가 보인다. 강 건너에는 '보천'이라는 샘이 있었는데, 정자 아래 여울도 '보천탄'이다.
▲ 매학정의 측면. 대청마루에 여러 편의 시 편액이 걸려 있다.
▲ 마루방 앞에 둔 툇마루는 대청 마루와 이어진다.

임포는 속세를 떠나 서호(西湖)의 고산(孤山)에 은거해 매화를 심고 학을 키우며 살았다. 송강은 금강산 금강대에서 학이 날아오르는 것을 보고 ‘서호 옛 주인’이라며 임포를 소환하여 자신을 그에 빗댔다. 황기로 역시 낙동강 강변의 나지막한 산 이름을 ‘고산’으로 짓고, 그 이름으로 호를 삼았으며 정자도 매학정이라 이름한 것이다.

 

‘해동초성’이라 불린 초서의 대가

 

황기로를 새롭게 만나게 된 것은 지난해 9월 구미 성리학역사관에서 베풀어진 황기로 탄생 5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기획전 <취묵감상(醉墨甘觴), 매·학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를 통해서다. 나는 그가 초서가 뛰어나 ‘해동초성(海東草聖)’이라 불릴 정도였음을 알았고, 그 뒤에 두어 차례 더 매학정을 찾았었다. [관련 글 : 금오산 둘레길 돌면서 해동초성의 초서를 만나는 법]

▲ 고산이 쓴 매학정 현판
▲ 고산 황기로의 초서(보물). 여러 사람의 시를 차운하여 쓴 초서다. 개인 소장.
▲ 매학정에 걸린 고산의 시판. 조부 황필의 시에 차운한 시 '차왕고운'이다.

황기로의 본관은 덕산(德山), 호는 고산 외에도 매학정(梅鶴亭)을 썼다. 선산 고아에서 태어난 그는 1534년(중종 29) 14세에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이 신진 사림의 거두 조광조를 처단할 것을 주장하다 사판(士版)에서 삭제된 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는 초서에 능했는데, 취흥을 빌려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적잖이 전해진다. 이는 당나라의 장욱과 회소 등 이른바 ‘광초(狂草: 미친 듯 쓰는 초서)’로 불린 초서 명가들의 자유롭고 호탕한 태도와 일치하는 것이다. 실제 그의 글씨에 장욱·회소와 명나라의 초서 명가 장필의 서풍이 적극적으로 표현되어 있다고 한다.

 

작품은 보물 지정, 사위 옥산 이우에게 매학정을 물려줘

 

그는 청송 심씨와 혼인했으나 심씨는 일찍 작고한 듯 슬하에 자식이 없고, 후취 문화 류씨에게서 딸 하나를 낳았다. 이 딸은 율곡 이이의 아우이자 명서가(名書家)인 옥산 이우(1542~1609)와 혼인하였다. 황기로의 유묵이 사돈이 된 덕수이씨 옥산공파 종손댁에 전해지다가 2007년에 강릉시 오죽헌·시립박물관에 일괄 기증된 연유다.

 

고산의 초서 작품 가운데 ‘이군옥시’와 ‘차운시’는 각각 보물로 지정되었다. 그는 금오산 암벽에 ‘금오동학(金烏洞壑)’을 새겼고, 영주 소수서원의 ‘경렴정(景濂亭)’과 안동 ‘귀래정(歸來亭)’의 현판을 썼다. 유묵첩으로 1549년에 회소의 글씨를 찬미한 이백(李白)의 시를 초서로 쓴 <초서가행(歌行)>이 석각본과 목각본으로 간행되어 전한다.

 

이 밖에 <동국명필(東國名筆)>·<대동서법(大東書法)> 등의 법첩(法帖:잘 쓴 글씨로 만든 서첩)에도 그의 필적이 실려 있다. 그의 초서풍은 이우를 포함하여 이산해(1539~1609), 이지정(1588~1650) 등에게 전해지며 조선 중기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고산 황기로는 초서로 일가를 이루고 초성으로까지 불리었지만, 마흔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취흥에 겨워 글씨를 썼다는 그의 삶을 율곡 이이가 만시(輓詩)에서 “묵향(墨香)에 취하고 술잔 기울인[취묵감상(醉墨甘觴)] 오십 년 세월”이라 한 것은 결코 지나치다고 할 수 없다.

 

매학정이 있는 고산 아래 낙동강은 보천탄(寶泉灘)이라 불리는 여울이다. 강 건너에 전설로 전하는 보천(寶泉)이 있었으나 전하지 않고 대신 이 이름을 딴 사찰 보천사가 있다. 중종 28년(1533)에 정자가 처음 지어진 이곳은 본래 황기로의 조부인 황필의 휴양지였다.

 

고산은 1570년(선조 3)에 정자를 다시 지어 매학정이라 명명하고 서재로 썼다. 그는 중년에서 노년에 이르기까지 관계에 나가지 않고 시(詩)와 서(書)로 소일하며 이 정자에서 풍류를 즐겼다. 그는 매학정을 포함한 일대의 터전을 사위인 옥산 이우에게 주었다.

▲ 이 정자를 짓고 황기로는 이 산을 임포의 고사에 따라 '고산'이라 부르고, 정자를 매학정으로 이름 붙였다.
▲ 매학정에 걸려 있는 옥산 이우의 글씨. 이우는 벼슬에서 물러난 후 처가인 선산에 내려와 살았다.

율곡의 아우이자, 신사임당의 예술적 재능을 이어받은 이우는 시·서·화·거문고를 잘해 ‘사절(四絶)’이라 불린 이다. 고산은 옥산의 필법을 두고 “이군의 글씨가 씩씩함에서는 나보다 낫지만 아름다움에서는 미치지 못하는데 조금 공정을 더한다면 내가 미칠 바가 아닐 것이다”라고 하였으니, 그 장인에 그 사위였다. 이우도 매학정을 사랑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그대가 내 집이 어디냐고 묻는다면(君問我家何處住)

산 의지하고 강물에 임하여 사립문 닫힌 곳이라 말하리.(依山臨水掩荊門)

때로는 구름 맑아 모래밭에 있노라니(有時雲淡沙場路)

사립문 보이지 않고 다만 구름만 보이네.(不見荊門只見雲)

 

매학정은 화강암으로 쌓은 3층의 기초단 위에 자연석 주춧돌을 놓고 기둥을 세운 남향 홑처마 팔작집이다. 정면 4칸, 측면 2칸인데, 툇마루를 둔 2칸의 마루방과 2칸의 대청으로 이루어져 정자지만 일상생활이 가능한 공간이다. 매학정은 임진왜란(1592) 때와 철종 13년(1862)의 2차례에 걸쳐 화재로 타 버린 것을 다시 지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자는 고산을 등지고 탁 트인 남쪽을 향해 의젓하게 서 있다. 마루방을 들였어도 2칸 대청이 좁지 않고, 정자 오른편 보천탄에서 불어오는 강바람이 좋다. 강을 가로지른 왕복 2차로의 다리가 숭선대교인데 사람들은 다리를 건너면서 먼빛으로 정자를 건너다보곤 한다.

▲ 매학정 버드나무길 중 데크길. 매학정 아래에서 시작된 길이다. 오른쪽은 낙동강.
▲ 매학정 버드나무길로 가는 낙동강 강변. 강정습지와 이어지는 부분이다.

매학정에서 강정습지까진 ‘매학정 버드나무길’

 

정자 앞에 잘 장식한 카페가 하나 생기면서 그 앞에는 자동차가 넘친다. 정자 앞 강변에 조그만 정자 하나가 세워졌는데 그 밑으로 구미의 ‘걷기 좋은 길 9선’ 가운데 하나인 ‘매학정 버드나무길’이 시작된다. 매학정을 출발하여 강변을 따라 난 데크 길로 이어진 강정 습지를 돌아오는 코스다. 4월부터 연둣빛 버드나무가 길을 따라 군락을 이룬다고 해서 그런 이름이 붙었다. 이 길의 거리는 편도 4.5km, 70분이 걸린다.

 

▲ 구미시에서 펴낸 구미 걷기 좋은 길 9선 중에서

지난해 8월에 이 길을 걸어봤는데, 데크 길과 시멘트 포장길, 흙길 등이 뒤섞인데다가 중간에 골프장까지 끼어 있어 대체로 좀 산만했다. 마을 길과 찻길, 그리고 데크 길을 임시변통으로 이어놓은 격이어서 호젓한 산책이 되기가 쉽지 않았다. 반드시 그래서는 아니지만, 나는 이후엔 다시 그 길을 걷지 않았다.

 

요즘도 나는 숭선대교를 건너 고아로 들어올 때마다 매학정 대청에 걸린 시 편액을 생각한다. 고산이 조부의 시에 차운한 ‘차왕고운’과 옥산 이우의 글씨를 떠올리며, 곡선 위주로 흘려 쓰는 한자 서체인 초서, 초서를 공부한 멀리 있는 벗을 생각해 보곤 한다.

 

 

 

2022. 9. 18.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선산 톺아보기 ⑱] 구미시 임수동 동락서원(東洛書院)

[선산 톺아보기 ⑲] 중세의 대학자 여헌 장현광과 여헌기념관

[선산 톺아보기 ⑳] 구미시 인의동 모원당(慕遠堂)

[선산 톺아보기 ㉑] 선산읍 독동리 반송(盤松)

[선산 톺아보기 ㉒] 옥성면 농소리 은행나무(천연기념물 225)

[선산 톺아보기 ㉓] 읍내에 외로이 남은 왕조의 유물, ‘선산객사

[선산 톺아보기 ㉔] 그 향교 앞 빗돌 주인은 친일 부역자가 되었다

[선산 톺아보기 ㉕] 복원한 읍성으로 쪼그라든 선산이 새로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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