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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순국(殉國)27

[순국] 박용만,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남기고 총탄에 스러지다 [역사 공부 ‘오늘’]1928년 10월 17일, 박용만, 항일무장투쟁의 꿈과 함께 지다 1928년 10월 17일, 베이징(北京)의 대본농간공사((大本農墾公司)에서 우성(宇醒) 박용만(朴容萬, 1881~1928)이 한인 청년 이해명의 총을 맞고 쓰러졌다. 1909년 미국 네브래스카(Nebraska)주에서 한인 소년병학교를 세운 이래, 오직 항일무장투쟁의 꿈을 이루고자 진력해 온 독립운동가의 꿈도 스러졌다. 향년 47세. 박용만은 강원도 철원 출신이다. 한성일어학교(漢城日語學校)를 다닌 뒤 1895년(고종 32) 관립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숙부와 함께 일본으로 건너가 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중학 졸업 후 한국 개화사상 형성에 한 줄기를 이룬 게이오의숙(慶應義塾) 정치과에서 공부하였다고 하나, 이 학교 졸업생 명단.. 2020. 10. 15.
[순국] 간도 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 전사 1924년 9월 7일,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 장군 순국 1924년 9월 7일, 대한국민회군 사령관 안무(安武,1883~1924) 장군이 용정(龍井) 자혜 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일본 경찰과 교전하다가 중상을 입고 병원에 이송된 그는 일제의 치료를 거부하고 죽었다. 향년 41세. 자유시 참변(1921) 이후 북간도 일대에서 활동하던 그는 전날, 일경의 습격을 받아 모아산 부근에서 교전하다가 복부에 총상을 입고 체포되었었다. [관련 글 : 1921년 오늘-대한독립군단 총재 서일, 자결 순국하다] 일제의 치료 거부하고 순국 안무는 함경북도 경성 사람이다. 호는 청전(靑田), 본명은 안병호다. 1900년 대한제국 육군 진위대(鎭衛隊)에 입대하여 해산(1907)될 때까지 교련관으로 일하였다. 이후 경성의 함.. 2020. 9. 7.
[순국] 산남의진의 손영각 의병장,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산남의진의 의병장 손영각 입암 전투에서 순국 1907년 9월 1일(음력, 양력 10월 7일) 산남의진(山南義陣)이 일본군과 맞붙은 경북 포항시 죽장면 입암 전투에서 손영각(孫永珏, 1855~1907) 참모장이 전사, 순국하였다. 향년 52세. 이 전투에서 대장 정용기(1962 독립장), 중군장 이한구(1963 독립장), 좌영장 권규섭(1991 애국장) 등 산남의진의 주력이 모두 전사했다. 이 무렵 산남의진의 본진 지휘부[장영도소(將營都所)]는 포항시 죽장면 매현리에 정예 의병 1백여 명과 함께 포진하고 있었다. 이를 탐지한 일본군은 입암리(立巖里) 후원(後原)의 험준한 암석을 거점으로 야음을 틈타 침공해 들어왔다. 때마침 임무를 마치고 귀진한 이세기(1991 애국장)·우재룡(1963.. 2020. 8. 31.
[순국] 선비는 ‘일왕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지 못함을 한’했다 순국 102주기, 만송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을 기리며 8월 26일은 경북 칠곡의 선비 유병헌(劉秉憲, 1842~1918)의 순국 102주기다. 1918년 이날, 그는 보안법과 주세령 위반으로 복역하던 대구 감옥에서 8일간의 단식 끝에 자신의 목숨을 거두었다. 향년 77세. 을사늑약이 체결되었을 때 오적(五賊)을 성토하면서 시작된 그의 항일 투쟁은 일제 치하의 납세뿐 아니라, 토지조사 사업까지 거부하기에 이르렀고 세 차례의 투옥 끝에 마침내 옥중 순국한 것이다. 유병헌은 1842년 경상도 인동도호부(현 경상북도 칠곡군 북삼읍 숭오리 강진마을)에서 유익원의 맏이로 태어났다. 본관은 강릉, 호는 만송(晩松). 그는 진주 민란(1862)과 제너럴셔먼호 사건·신미양요(1871), 운요호사건(1875.. 2020. 8. 24.
[순국] 하산 양기하, 만주 관전현에서 전사 1932년 2월 10일, 랴오닝성 관전현(寬甸縣)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혁명당 소속 독립군은 일본 경찰대와 만주국 군대의 기습 공격을 받았다. 이에 조선혁명당 정치 부위원장 하산(荷山) 양기하(梁基瑕, 1878~1932)는 격전 끝에 수십 명의 조선혁명군 병사들과 함께 전사 순국하였다. 그는 조선혁명군 총사령관 양세봉(1896~1934), 중앙집행위원장 대리 고이허(1902~1937)와 함께 남만주에서의 마지막 무장 항일투쟁의 역사를 장식한 지도자였다. 그가 순국한 뒤 양세봉은 이태 후 밀정의 사주로 중국인 자객에게 살해되었고 일본군과 교전 끝에 포로가 된 고이허는 1937년 총살되었다. 양기하는 충남 논산 사람이다. 아호는 하산(荷山), 기하(基河)·인원(仁元), 그리고 임창주(林昌周) 등의 이름을 썼다.. 2020. 2. 9.
[순국] ‘마시탄’ 사건의 이의준 순국하다 1929년 오늘(1월 25일), 1924년 5월, 압록강 중류인 평안북도 강계군 고산면 마시탄(馬嘶灘)에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를 공격했던 참의부 소대장 이의준(李義俊,1893~1929)이 일제의 사형 집행으로 순국하였다. 향년 36세. 스물아홉 살에 만주로 건너가 항일무장투쟁을 벌였으나 이름조차 생소한 이 독립운동가는 사진 한 장도 온전하게 남아 있지 않다. 우리는 대신 그가 사살하고자 했던 일제 총독 사이토 마코토를 통해 그의 삶을 역으로 돌아볼 뿐이다. 사이토 총독 공격한 마시탄 사건 이의준은 평북 위원(渭源) 사람이다. 성장기와 독립운동 투신 이전의 삶은 알려지지 않는다. 그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하는 것은 1922년 8월이다. 김창균(1892~1929)과 같이 만주로 건너간 이의준은 .. 2020. 1. 24.
[순국] 이육사, 베이징의 지하 감옥에서 지다 1944년 오늘 새벽 5시, 베이징(北京)의 일본총영사관 지하 감옥에서 한 조선 청년이 눈을 감았다. 그는 ‘겨울’을 봄을 예비하고 있는 ‘강철로 된 무지개’로 여겼던 사람, ‘청포도’와 ‘광야’를 노래했던 시인 이육사(李陸史, 1904~1944)였다. 향년 40세. 1943년 4월에 베이징으로 온 육사는 충칭(重慶)과 옌안(延安)을 오가면서 국내에 무기를 반입할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7월에 모친과 맏형의 소상(小祥)에 참여하러 귀국했다가 늦가을에 일경에 체포된 뒤 베이징으로 압송되어 새해를 맞은 지 16일 만에 육사는 마침내 쉼 없는 투쟁의 삶을 마감한 것이었다. 육사, 일본총영사관 지하감옥에서 지다 육사의 시신을 수습한 이는 항일 노동운동으로 서대문형무소에서 2년 4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던 육사의 .. 2020. 1. 15.
[순국] 의열단원 나석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하다 1926년 오늘, 이틀 전 중국에서 인천항으로 귀국한 의열단원 나석주(羅錫疇, 1892~1926)는 찬바람이부는 경성 거리, 조선식산은행 앞에 서 있었다. 그는 신문지를 싼 폭탄을 옆구리에 끼고 있었고 주머니 속에 권총을 숨기고 있었다. 조선식산은행은 조선총독부의 산업 정책을 금융 측면에서 뒷받침했던 핵심 기관으로 일본제국의 식민지 경제 지배에서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중요한 축이었다. 식산은행은 채권으로 확보한 일본 측 자본을 조선의 산업 기관과 개인에게 빌려주고, 그로부터 회수한 원금과 이자를 투자자에게 돌려주는 금융기관이었다. 수탈기관 동척에 폭탄을 던지다 식산은행의 창구는 연말이라 일본인 고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그는 신문지를 벗기고 안전장치를 뽑은 폭탄을 창구 앞으로 던진 후, 서둘러 은행을 빠.. 2019. 12. 27.
[순국]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형장에서 지다 1932년 오늘(12월 19일) 오전 7시 40분, 일본 혼슈(本州) 이시카와(石川)현 가나자와(金澤) 육군 공병 작업장의 서북쪽 골짜기에서 윤봉길(尹奉吉, 1908∼1932) 의사가 순국하였다. 무릎을 꿇려 작은 십자가에 묶이고 눈을 가린 윤 의사의 10m 앞에서 일본군 병사가 쏜 총탄은 의사의 이마를 꿰뚫었다. 스물다섯 청년 윤봉길, 총살형으로 순국 1932년 4월 29일, 중국 상하이 홍커우(虹口)공원에서 열린 일본군의 전승 기념식장에 폭탄을 던지고 현장에서 체포된 지 234일 만이었다. [관련 기사 :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이태 전인 1930년에 “장부가 뜻을 품고 집을 나서면 살아 돌아오지 않는다. [장부출가생불환(丈夫出家生不還)]”이라는 글귀를 남기고 중국으로 건.. 2019. 12. 18.
[순국] 충정공 민영환, 동포에게 사죄하고 자결하다 1905년 11월 30일 오전 6시께, 시종무관장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은 전동(典洞)에 있는 중추원 의관(醫官) 이완식의 집에서 단도로 자신의 배와 목을 찔러 목숨을 끊었다. 그의 죽음은 망국에 대해 신료(臣僚)의 책임을 지고 속죄하는 것이었다. 향년 44세. 을사늑약이 체결된 것은 열사흘 전인 11월 17일이었다. 용인에서 이 소식을 들은 민영환은 서울로 돌아와 전 좌의정 조병세(1827~1905,1962 대한민국장) 등과 대궐로 나아가 5적의 처단과 조약의 폐기를 청원하였다. 11월 28일, 칠순 노인 조병세가 일본 헌병대에 끌려가자 그는 궁중으로 들어가 소두(疏頭: 상소의 대표)가 되어 연일 상소하며 참정대신(한규설)의 인준이 없는 조약은 무효라고 주장하며, 5적의 처단을 요구하였다... 2019. 11. 29.
[순국]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하다 1920년 11월 29일 오전 10시 30분, 서대문형무소 형장에서 사형집행으로 ‘백발의 독립투사’ 강우규(姜宇奎, 1855~1920) 의사가 순국하였다. 1919년 9월, 남대문 정거장(지금의 서울역)에서 폭탄 거사를 감행한 지 14개월 만이었다. 그는 처형 직전에 유언 대신 ‘사세시(辭世詩)’ 한 수를 남겼다. “단두대에 홀로 서니 춘풍이 감도는구나. (斷頭臺上 猶在春風) 몸은 있되 나라가 없으니 어찌 감회가 없으리오. (有身無國 豈無感想)” 강우규는 평안남도 덕천 사람으로 가난한 농가의 4남매 가운데 막내로 태어났다.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누님 집에서 성장하였고, 청소년기에 친형에게 한학과 한방 의술을 익혀 이를 생활의 방편으로 삼았다. 그는 서른 살이 되던 1884년 함경남도 홍원군으로 이사하였다.. 2019. 11. 28.
[순국] 조명하(1928)와 이봉창(1932) 의사, 형장에서 지다 조명하 의거(1928년 5월 14일) 1928년과 1932년 오늘, 조명하(趙明河) 의사와 이봉창(李奉昌1900~1932) 의사가 각각 타이베이 형무소와 도쿄 이치가와(市川) 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조명하는 히로히토의 장인인 일본제국 육군 대장 구니노미야 구니요시(久邇宮邦彦王)를 독검으로 찔렀고 이봉창은 도쿄의 경시청 사쿠라다몬(櫻田門) 앞에서 일왕 히로히토를 폭탄으로 저격한 이다. 조명하에게 찔린 구니노미야 구니요시는 상처에서 패혈증이 생겨 이듬해 1월 죽었고, 이봉창이 던진 수류탄에 말과 마차가 손상되고 일본 고관대작 두 명이 다쳤으나 히로히토는 화를 면했다. 거사의 성패는 갈렸지만, 일제는 두 의사에게 사형을 선고하고 이를 집행했다. 4년의 시차가 있긴 하지만 같은 날짜에 스물넷, 서른두 살의 조선.. 2019. 10. 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