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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㉓] 읍내에 외로이 남은 왕조의 유물, ‘선산객사’

by 낮달2018 2023. 2.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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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객관으로 쓰인 관청 ‘선산객사(客舍)’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조선시대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던 숙소로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 관아 선산객사는 선산읍 행정복지센터 옆에 있다.

선산읍 행정복지센터 옆에는 조선시대 객관(客館)인 선산객사(善山客舍)가 있다. 객사는 중앙에서 파견된 관리나 외국 사신이 묵던 숙소로 각 고을에 두었던 지방 관아의 하나다. 객사에는 왕을 상징하는 전패((殿牌 : 임금을 상징하는 나무패로, ‘殿’자를 새김)를 두고 초하루와 보름에 향망궐배(向望闕拜 : 달을 보면서 임금이 계신 대궐을 향해 절을 올림)를 행하였다.

용도 모르는 건물 한 동만 남은 선산객사

선산객사는 세워진 시기는 물론, 지금의 선산초등학교 부근에서 일제 강점기에 옮겨온 것이라고만 전할 뿐 정확한 이력은 전하지 않는다. 고려와 조선시대 각 고을에는 객사를 두었다. <일선지(一善誌)>나 <동국여지승람> 등의 기록에 따르면 조선 초기 선산의 객사는 남관(南館), 북관(北館), 청형루(淸逈樓) 등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그 뒤 양소루(養素樓), 중대청, 동헌, 서헌, 양방루(凉房樓), 낭청방(郎廳房), 벽대청(甓大廳), 하서헌(下西軒) 등을 두었다.

1597년 대부분 무너져 다시 동헌, 중대청, 서헌, 마구 등을 차례로 다시 짓거나 고쳐 세웠다. 지금 남아 있는 건물은 그 중 어느 건물인지 확실하지 않다. 1914년에서 1984년까지 선산읍사무소로 사용하였다가 선산읍사무소가 신축되면서 수리하여 향토사료관으로 사용하게 되었다. 1986년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객사는 앞면 5칸, 옆면 4칸의 팔작집, 내부는 모두 통간(집안의 칸을 막지 않아, 두 칸 이상이 하나로 통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 선산객사의 현재 모습. 객사 앞에 행사용의 아치가 세워져 있다. 맨위와 그 아래 사진은 2020년 9월에 찍은 사진이다.

다른 데선 보기 드문 다양한 조각상 장식

 

앞면 5칸·옆면 4칸의 팔작집인데, 내부는 모두 통간(通間:집안의 칸을 막지 않아, 두 칸 이상이 하나로 통하는 것)으로 처리하였다.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화반(花盤):주간(柱間)을 구성하는 부재]을 두어 정면에는 귀신 얼굴[귀면(鬼面)]을, 좌우 면에는 코끼리와 개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지붕 용마루(건축물의 지붕 중앙에 있는 수평 마루)에는 사자 네 마리를 올려놓았다. 좌우 양쪽에는 암수의 어미가 있고, 가운데에는 역시 암수의 새끼가 놓여 있다. 용마루 끝에는 귀면의 암막새가, 추녀마루(건물의 45도 방향으로 추녀 위에 생기는 마루) 끝에도 흙으로 만든 귀면류 조상(彫像)이 있다.

▲ 통간으로 처리한 선산객사의 내부. 기단 위에 장방형 원형을 덧붙인 ㅗ자형 초석 위에 원기둥을 세웠다.
▲ 용마루에는사자 네 마리를 올려놓았다. 좌우 양쪽에는 암수의 어미가 있고, 가운데에는 역시 암수의 새끼가 놓여 있다.
▲ 기둥 사이에는 꽃받침(화반)을 두어 정면에는 귀신 얼굴[귀면(鬼面)]을, 좌우 면에는 코끼리와 개의 형상을 조각하였다.

선산객사의 사자상, 동물상, 귀면류 등 다양한 조각상 장식은 다른 객사 건물에서는 찾아보기 드물다. 객사가 원래 임금을 상징하는 전패를 두고 왕이 계신 곳을 향해 예를 올리던 곳이라서 그런 위엄을 더하는 장식을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각 고을에 설치한 관아 객사

객사는 고려 초기부터 각 고을에 설치했던 관사(館舍)다. 외국 사신이 내왕할 때 이곳에서 묵으면서 연회도 열었다. 객사에 전패를 두고 향망궐배 하는 예를 올리게 된 것은 조선조에 들어와서다. 건물의 구조는 정당(正堂)을 중심으로 좌우에 익실(翼室:본채의 좌우 양편에 달린 방)을 두고, 앞면에 중문(中門)·외문(外門), 옆면에 무랑(廡廊:곁채, 행랑채) 등을 두었다. 정당은 기와와 돌을 깔고 좌우의 익실은 온돌이었다.

현전하는 객사 건물로 조선 전기의 것으로는 강릉 임영관 삼문(국보)·전주 풍패지관(보물), 안변 객사의 가학루(1493), 고령 객사의 가야관(1493, 1930년대 사라져 건물 사진만 남음) 등이 있다. 후기의 것으로는 상주 상산관(1639), 경주 객사의 동경관 좌우 익실(1786), 평남 성천 객사 동명관의 강선루, 통영 삼도수군통제영의 객사 세병관(국보), 여수의 전라좌수영 객사 진남관(국보) 등이 남아 있는데, 조선시대의 목조 건축양식을 잘 나타내고 있다.  밀양 영남루와 제천 한벽루도 각각 밀양객사와 제천각사에 딸린 누각(樓閣)이다. 

▲ 현전하는 객사들. 강릉 임영관 삼문은 고려시대의 것이고, 나머지는 모두 조선시대 전기와 후기의 것이다.

이들 객사의 관리는 아전들이 맡았는데, 고려 때는 지방에 두었던 잡직(雜職)의 하나로, 객사사(客舍史)라 불리는 아전이 담당하였다. 1018년(현종 9)에 각 고을의 아전 수를 정할 때 1천 정(丁: 성인 남성) 이상의 군에는 객사사 4인, 500정 이상의 군에는 3인, 300정 이상의 군에는 2인씩을 두었다고 한다.


망국으로 단절된 역사, 잊힌 왕조의 유물

무슨 용도인지도 모르는 건물 한 채만 덩그렇게 남아 있는 선산객사는 그 이력이 거의 드러나지 않았다. 이는 현존하는 다른 지방의 객사들과 달리 선산이 중요 고을도 아니고, 외국 사신이 드나들던 경로에 있지 않아서였을까. 우리 역사는 주권을 빼앗기면서 왕조가 끊어지고, 35년간의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적지 않게 전 시대와의 단절을 겪었다.

나라가 망했지만, 사람들은 백성들의 삶과 무관했던 왕조를 그리워하지도 그 과거의 제국을 다시 소환하지 않았다. 다만 새로운 백성의 나라를 꿈꾸며 ‘민국’을 열었을 뿐이다. 그래서 왕조의 유물은 단지 이미 화석이 되어버린 역사의 일부로서 무심히 일별되는 데 그치는 것이다. 한때 왕의 전패를 두고 예를 행했던 선산객사 건물 하나가 읍내에 덩그렇게 남았지만, 사람들이 무심히 그 앞을 스쳐가고 마는 까닭이다.

 

2023. 2. 1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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