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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①] ‘충효’는 무엇이며, ‘열부’는 또 무엇이뇨

by 낮달2018 2020.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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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읍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 삼강정려는 봉한리 마을에서 난, 삼강의 충효열을 실천한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를 한데 모아놓았다. 경북 문화재자료 제333호.

고향 가까운 도시 구미로 옮아와 산 지 10년이 가깝다. 올 때만 해도 주말이면 작정하고 선산·구미의 골골샅샅을 더듬어 보리라는 포부가 만만했지만, 웬걸 사는 일이 그리 간단치 않다. 초기에만 해도 얼마간 움직이긴 했는데, 정작 근처에 갈 만한 데가 없다고 여기면서 나는 슬그머니 주저앉아 버렸다.

갈 만한 데가 없다고 여긴 이유는 전에 살던 안동과 달리, 이 고을에는 가볼 만한 고가도 몇 안 된다는 걸 확인하면서다. 선산(善山)은 조선 인재의 반을 영남이 내고, 그 영남 인재의 반을 낸다는 고장이다. 안동과 달리 일찍이 개화해 버린 동네여서일까. 지역을 관향(貫鄕)으로 하는 성씨도 적지 않건만, 고색창연한 종갓집도, 문화재자료 등으로 지정된 고가도 손꼽을 정도이니 말이다.

코로나19로 사실상 칩거 생활을 하면서 가볼 만한 문화재가 어디 없을까 하다가 지자체의 ‘문화·관광’ 누리집을 꼼꼼하게 들여다볼 기회가 있었다. 거기서 나는 시뻐 보았던 구미에도 국가 지정문화재인 국보가 1점, 보물이 12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도 지정문화재도 유·무형 문화재와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 모두 69점이나 되었다.

이들 도 지정문화재는 국보나 보물 같은 국가지정문화재보다 격이야 떨어지지만, 그것과 무관하게 지역의 역사와 삶을 일정하게 드러내고 있는 문화재들이다. 시간 나는 대로 이들을 찾아보자고 작정한 것은 그러니까 그리 무리한 결심은 아니지 않겠는가.

몇 회나 이어갈지는 알 수 없지만, 틈나는 대로 문화재를 찾아 거기 깃든 이런저런 이야기를 주절거릴까 한다. 어떠한 격식에도 얽매이지 않고, 눈에 보이는 풍경을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선산의 속살을 들여다보기로 한다.


봉한리, 한마을에서 충신, 효자, 열녀를 내다

문화재자료인 선산 삼강정려(三綱旌閭)가 첫 목적지였다. 고아읍 봉한리라니 가깝겠다 싶었는데, 내비게이션은 불과 10여 분만에 목적지 근처에 데려다주었다. 굳이 ‘근처’라고 쓴 것은 목적지 근처에 가면 길치가 되는 지피에스(GPS) 탓에 몇 바퀴 동네 뺑뺑이를 돌아야 했기 때문이다. 목적지 근처에 가면 내비가 멍텅구리가 되는 이유는 현재의 지피에스의 오차범위가 17~37m에 이르기 때문이다.

마을 안에서 헤매다가 동네 젊은 아주머니한테 물으니 모른다 해서,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촌로 한 분이 큰길 가에 있으니 이리저리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다. 정작 삼강정려는 마을 안이 아니라, 마을 초입의 큰길 가 논밭 가운데 아담하게 서 있었다.

▲ 삼강정려는 도로변 논밭 사이에 자리 잡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짜리 조그만 맞배집이었다.

삼강정려는 도로변 논밭 사이에 단출하게 자리 잡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짜리 조그만 맞배집이었다. 세 칸이니 아주 아담한 건물이다. 삼강정려는 봉한리 마을에서 난, 삼강(三綱)의 충효열(忠孝烈)을 실천한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旌閭)를 한데 모아놓았다. 정면 세 칸을 한 칸씩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를 각각 빗돌과 편액(扁額)으로 구분해 놓았다.

충신은 고려 충신 야은 길재(1353∼1419), 효자는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한 배숙기, 열녀는 왜구에게 잡혀간 남편을 그리며 정절을 지킨 조을생의 아내 약가(藥哥)다. 외가인 봉한리에서 태어난 야은 길재와 약가는 동시대인이고, 배숙기는 조선 성종(1457~1494) 때 사람이다.

▲ 여말선초에 금오산 아래 은거한 야은 길재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영조 44년(1768년)에 금오산 아래 건립한 정자 채미정.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과 함께 여말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야은 길재는 구미를 대표하는 역사적 인물이다. 여말의 개혁적 지식인이었던 야은은 역성혁명으로 새 왕조를 건설하려 한 정도전과 다른 길을 선택했고, 포은처럼 목숨을 바쳐 고려 왕조를 지키는 대신 새 왕조에 대한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낙향을 선택했다. [관련 글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배숙기는 1470년(성종 1) 진사를 거쳐 문과에 등제하여 벼슬이 홍문관저작에 이르렀다. 부모를 편히 잘 모시는 능양(能養)을 극진히 하여 좋은 음식을 대접하고 외출하여 늦게 돌아와 양친이 잠을 자면 밖에서 잠이 깰 때까지 기다려 문안을 드리곤 하였다. 항상 말과 행동을 조심하여 부모에게 욕이 돌아가지 않게 하는 불욕(弗辱)을 실천하였으며, 부모가 잘못된 결정을 내릴 때는 울면서 간(諫)하여 잘 판단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 '고려충신길재지려'라 새긴 야은 길재의 정려비. 약가의 비보다는 크고 짜임새가 있다.

길재는 정려비를, 배숙기는 정려 편액을 걸었다. 길재의 정려비는 비좌(碑座)에 높이 119㎝의 몸돌을 올리고 그 위에 높이 38㎝의 덮개돌을 얹은 형태다. 비신 앞면에 ‘고려충신길재지려(高麗忠臣吉再之閭)’라는 비명(碑銘)이 있다.

배숙기는 비석 대신 뒷벽 서까래 밑에 ‘효자홍문저작배숙기지려(孝子弘文著作裵淑綺之閭)’라 새긴, 높이 26㎝, 너비는 167㎝인 정려 편액을 걸었다. 좌우에 야은과 약가의 정려비, 공간 뒤편에 걸린 정려 편액이 어쩐지 허전했다.

▲ 배숙기의 정려는 비석 대신 뒷벽 서까래 밑에 '효자홍문저작배숙기지려'라 쓴 정려 편액을 달았다.

정려(旌閭)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자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이다. 삼강정려는 정조 19년(1795)에 선산 부사 이채가 세웠다. 충효열을 실천한 인물들이 비슷한 시기에 한 마을에서 배출되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 지방 수령이 그것을 기리려 함도 당연한 일이다.

야은 길재는 말할 것도 없고, 홍문관저작 벼슬을 한 배숙기도 각각 익숙한 충효의 본보기다. 이 정려에서 관심을 끄는 이는 열녀 약가다. 그는 야은과 동시대 인물로 봉한리에서 태어나 왜구에 붙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며 8년 동안 수절한 여인이다.

약가는 남편 조을생이 병정으로 나가서 왜구와 싸우다 잡혀가자, 그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옷을 벗지 않은 채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부모의 재가 권유를 비롯한 주위의 유혹을 이겨낸 약가는 마침내, 8년 만에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남편과 재회할 수 있었다. 조선 태종 4년(1404)에 열녀로 정려하고, <속 삼강행실도>(1514)에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니 많은 이들이 시문으로 그를 기렸다.

▲ 한때 삼강정려에 걸려 있던 '백세청풍 팔년고등' 편액. 지금은 성리학 역사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최현(1563~1640)이 편찬한 경북 선산의 인문 지리지인 <일선지(一善誌)>의 첫 장에 나오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지리도십절(地理圖十絶)’에서는 여덟 번째로 약가를 소개하면서 ‘8년간의 외로운 등불’[팔년고등( 八年孤燈)]을 노래하고 있다.

아득하니 푸른 바다 위로 자봉(紫鳳)이 날아가니/ 팔 년 세월 다만 외로운 등불 벗 삼아 다스렸나니
돌아와 시험 삼아 거울 잡고 비추어 보니 / 뺨 위에 붉은 노을 반쯤이나 엉키었구나.

지역의 거유(巨儒) 여헌 장현광(1554~1637)도 시 ‘약가(藥哥) 열녀의 마을을 지나다’로 약가의 삶을 기렸다. 야은과 한마을에서 산 약가가 충신 야은의 삶을 본받아 열을 실천하지 않았겠느냐고 반문하는 형식인데, 그도 인간의 본성이 귀천과 남녀의 분별이 없다면서 약가의 실천을 높이 평가하고 있다.

우리 인간의 본성 하늘에서 똑같이 받았으니 / 어찌 귀천과 남녀의 분별이 있겠는가
소중한 것은 개발함에 그 기틀을 얻는 것이니 / 옛날은 부족하고 지금은 유여한 것 아니라오.
내 선산 고아의 봉계촌을 지나니 / 약가는 실로 야은 길재와 한마을에 살았네.
충신비 옆에 절녀비 서 있으니 / 야은이 없었다면 이 여자가 어디에서 이것을 취하였겠는가.

‘8년의 외로운 등불’을 기린 거친 자연석 빗돌

약가가 살던 시대는 15세기, 재가한 여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재가녀자손금고법(禁錮法)’이 반포되기 이전으로 보인다.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이 법은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여 벼슬길을 막음으로써 재가를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법이었다. 이 법은 결국, 양반가 부녀들의 수절 풍습을 보편화하면서 점차 상민층까지 퍼져나가게 했다.

그러나 친정 부모로부터 재가를 권유받기도 한 약가는 양반가 부녀에게 강요된 성리학의 도덕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양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편에 대한 믿음을 지킴으로서 국가로부터 ‘정려’라는 기림을 받았다. 당대의 성리학적 윤리로서는 양인 신분으로 열을 실천한 약가를 상찬하고도 남을 일이었을 것이다.

▲ 길쭉한 자연석에 '열녀 조을생 처 약가 정표(旌表)'라 새긴 약가의 정려비.

그러나 나는 그의 선택을, 단순히 열행(烈行)이라는 도덕률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남편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주체적 삶의 태도로 읽었다. 비록 ‘조을생의 처’라는 종속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함으로써 당대의 도덕률의 기림까지 받게 된.

열녀 약가의 정려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그러나 다듬은 부분은 비명을 새긴 앞쪽일 뿐, 뒷면이나 비대석(碑臺石)은 자연석의 형태 그대로다. 물론 덮개돌도 없다. 전체 높이는 125㎝, 조금 누르스름한 빛의 몸돌에 ‘열녀 조을생 처 약가 정표(旌表)’라 새겼다.

정면 지붕 아래 걸렸던 ‘백세청풍 팔년고등(百世淸風八年孤燈)’ 편액은 보이지 않았다. 시청에 문의했더니 한동안 구미 시립민속관에 전시하다가 지금은 개관을 준비 중인 구미 성리학역사관에 가 있다 한다.

크기도 그렇고 둥그스름한 덮개돌을 얹어 짜임새가 있는 야은의 비석에 비기면 약가의 비석은 거칠다. 같은 정려인데도 신분이 이들의 상찬의 형식을 달리한 것이라고 봐야 한다. 물론 이는 신분의 차이를 기반으로 한 중세 봉건사회의 모습이다.

약가의 빗돌은 자연스럽게 김천 방초정(芳草亭) 옆에 소박하게 서 있던 여종 석이(石伊)의 돌비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석이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자 못에 투신한 열행의 주인공인 최씨의 몸종인데, 그는 상전의 뒤를 따라 못에 몸을 던졌다. [관련 기사 : 수백 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 김천 방초정 옆에 앞뒤로 서 있는 상전과 몸종의 빗돌.

최씨의 열행은 나라에서 정려했지만, 후손들이 여종의 영혼을 위로하려 세운 돌비는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숙부인의 정려 앞에 천한 노비의 비를 세울 수 없다 하여 그의 빗돌은 연못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신분의 불평등이 죽음의 무게조차 갈라놓은 사례다.

주민들도 잘 모르는 삼강정려

위치 때문일까, 아니면 한자어가 낯설고 어려워서일까. 마을의 젊은 아낙은 말할 것도 없고, 주민 두어 명이 고개를 갸웃했고, 마지막에 만난 70대 노인만이 삼강정려를 단박에 알아들었었다. 결국, 이 2백 년도 더 묵은 오래된 정려각은 인근 주민들에게도 낯선 건축물이 돼 버린 듯했다.

고만고만한 유적에 갈 때마다 겪는 일이다. 당연히 그 고장 사람들은 알겠거니 하고 물으면 요령부득의 표정을 짓는 이가 한둘이 아니었다. 오래된 문화재도 마을 사람들의 삶에 직접 이어지지 않으면 낯설어질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니, 삼강정려가 기리는 충은, 효는, 절은 우리 시대에 무엇이 될 것인가.

▲ 삼강정려는 구미에서 선산으로 가는 선산대로 옆 농경지 가에 자리잡고 있어 사람들 눈에 잘 띄지 않는다.

 

2020. 9. 2.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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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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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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