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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善山) 톺아보기 - 프롤로그

by 낮달2018 2022. 1.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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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구미’ 대신 선산 인가

▲ 선산의 옛 지도

‘구미시민’이 된 지 한 주일이 지났다. 구미는 내 고향인 인근 칠곡군 석적읍 옆 동네니 내가 이 지역으로 돌아온 것도 두루뭉술하게 ‘귀향’이라고 말할 수 있을지 어떨지는 잘 모르겠다. 그러나 여기를 ‘고향’이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자락은 한편으로 이 지역을 굳이 ‘객지’라고 여기지 않는 마음의 한끝과 만난다.

 

1970년대 초 구미국가산업단지가 조성되기 이전까지만 해도 구미는 선산군 구미읍이었다. 구미가 시로 승격된 것은 1978년이었고 구미시와 선산군을 다시 합쳐 도농복합형 구미시가 된 것은 1995년이다. ‘선산군 구미읍’이었던 시절이 옛말이 되면서 ‘선산(善山)’은 ‘구미시’의 조그만 소읍으로 떨어졌다.

 

구미로의 ‘귀향’?

 

내 기억 속의 ‘구미’가 특별한 의미를 새겨지지 않는 것은 구미가 그런 대수롭지 않은 고장이었다는 잠재의식 탓일지도 모른다. 나는 고향에서 초등학교를 마친 뒤 지역에서 가장 큰 도시인 대구에서 공부하며 성장했기 때문이다.

 

지금 구미는 경북에서는 포항 다음가는 규모의 도시다. 인구가 40만을 넘으니 고작 16만에 그쳤던 안동과는 비교가 안 되는 대처(大處)다. 그래도 나는 여전히 구미역 중심으로 한 구시가지의 이미지로만 이 도시를 바라본다. 그러나 구미에 온 지 일주일, 러시아워의 도로 정체나 안동과는 다른 도시의 활기 따위를 통해 시나브로 나는 구미에 대한 이미지를 바꾸어 가고 있다.

 

돌아가신 부모님께서는 구미를 가끔 ‘귀미’로 발음하셨다. 이웃에 구미가 친정인 아낙이 있었는데 이 이의 호칭이 ‘귀미댁’이었다. ‘구미’의 ‘거북 구(龜)’ 자는 때로 ‘귀’로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은 물론 훨씬 뒤의 일이다.

 

별다른 연고가 없다고 말했지만, 구미는 내 외가가 있는 곳이다. 그러나 내 기억 속에 외가는 막연하기만 하다. 내가 외가를 찾은 것은 생애 단 한 번, 예닐곱 살 무렵에 어머니를 따라간 때뿐이었다. 외조부모는 물론이고 외삼촌, 외사촌도 세상을 떠나고 없어 머리가 하얗게 센 외숙모와 중년의 형수가 지키고 있던 외가는 낯설기만 했다.

 

어머니께서 외조부의 막내였고 내가 또 어머니의 막내였으니 내 어릴 적에 이미 외가는 세대교체가 끝나 있었다. 이후 대구에서 외사촌의 아이들과 간간이 교류가 있긴 했지만, 지금은 소식마저 끊어진 상태다. 아마 그 아이들 중 몇몇은 지금도 구미에서 살고 있으리라.

 

외가는 지금의 상모동, 어머니의 택호는 ‘용전댁’이었다. 1914년생인 어머니는 그 고장 출신인 박정희(1917~1979) 전 대통령과 거의 동년배였다. 당신께선 사범학교 교복을 입고 상모로 돌아오는 소년 박정희의 모습을 아련하게 기억하시곤 했다.

 

박정희는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 때까지 내 학창 시절 내내 대통령이었다. 고향 옆 동네에서 태어났고 구미를 오늘의 도시로 키운 인물이지만 내게 박정희는 결코 자랑스럽거나 우러러보이는 인물은 아니다. 그가 심복의 총탄에 맞아 숨진 밤에 나는 출동한 병사들을 대신해서 밤새 말뚝 보초를 서야 했다. 그의 죽음에 나는 눈물은커녕 어떤 회한의 감정도 느끼지 않았는데 눈물 바람을 했다는 주변 지인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외가, 상모동, 박정희

 

아내의 외가도 구미다. 아내는 나와는 달리 외가를 자주 오갔던 모양이다. 아내는 신평 쪽에 있던 외가에서 외사촌들과 나눈 학창 시절의 기억을 아주 소담스레 기억하고 있다. 아내의 외가도 이제는 예전과는 다른 모양이다. 하긴 우리는 어느덧 예순을 향해 달려가고 있기 때문이다.

 

구미는 어쩌다 스쳐가는 이웃 동네였을 뿐 워낙 내 삶과는 먼 고장이어서 나는 한 번도 구미에 살게 되리라고 생각해 보지 못했다. 18년 전에 고향을 떠나면서 나는 고향과의 인연이 끝난 줄로 여겼다. 거기에 살뜰한 추억도 애틋한 마음도 별로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음 정착지로 구미를 선택하면서 나는 굳이 ‘수구초심(首丘初心)’ 따위로 자신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구미는 고향이 아니라 고향 가까운 동네였을 뿐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나 주변에서 내 귀환을 그렇게 이해했을 때 나는 굳이 그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나이 들면서 익숙하고 편안한 고장을 선택한 것은 사실이었던 까닭이다.

▲구미 수출산업공단 전경 ⓒ 연합뉴스

이 꼭지의 이름을 굳이 ‘구미’가 아닌 ‘선산’으로 정한 속내는 이렇다. 선산이 역사적 유래가 있는 지명이기도 하지만, 지난해 서울의 한 통일 관련 집회에서 만난 ‘선산 사람’의 말씀이 떠올라서다. 8, 90년대 전농(전국농민회총연맹)의 의장을 지내신 윤정석 선생이 그분이다.

 

왜 '구미' 대신 '선산'인가

 

반갑게 인사하고 “여전히 구미에 계시지요?”하고 여쭈었더니, “그럼. 구미라 하지 말고 선산이라고 하는 게 좋아.”라고 말씀하셨다. 시군 통합 때 구미가 아닌 ‘선산시’로 써야 했다는 말씀을 덧붙이셨다. 나는 점촌과 문경이 합치면서 ‘문경시’를 선택한 게 옳았다는 식으로 맞장구를 쳤던 것 같다.

 

차차 살피게 되겠지만 구미보다는 선산이 더 오랜 이름이다. 상고시대부터 고려시대까지는 ‘선주(善州)’ ‘일선(一善)’으로 불렸다가 조선조 태종 때부터는 ‘선산군’으로 불리게 되었다. 선산 김씨의 본관인 선산은 일찍이 ‘선산약주(藥酒)’의 고향이기도 했다.

 

그런 뜻에서라면 70년대 이후에 발전한 구미보다는 ‘선산’이 훨씬 더 포괄적인 고장 이름이 될 터이다. ‘안동 이야기’에서 그랬던 것처럼 쉬엄쉬엄 나는 이 지역을 답습하면서 선산의 본 모습을 하나씩 배워나갈 참이다.

 

이웃 동네에서 살았지만 나는 정작 금오산에도 올라 보지 못했다. 해직 이듬해였던가, 구미역 앞에서 열린 연대집회에 참석해 선전지를 나눠주다가 구미경찰서로 연행되었던 일과 1994년 복직을 앞두고 구미교육청에서 집단면접을 받았던 기억이 아스라하다. 여전히 내게 구미는 미지의 고장이라는 뜻이다.

 

보충을 끝내고 말미가 주어지면 천천히 이 고장의 얼개부터 더듬어 보리라고 마음먹는다. 아파트 뒷산을 올라 시가지를 조감해 보고, 인근의 재래시장도 한 차례씩 들러볼까 싶다. 구미는 젊은 도시다.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 이 도시의 활기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얼마쯤의 시간이 필요할까.

 

 

2012. 1. 27. 낮달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 톺다01[톱따]〔톺아, 톺으니, 톺는[톰-]〕

「동사」

【…을】

「1」 가파른 곳을 오르려고 매우 힘들여 더듬다.

「2」 틈이 있는 곳마다 모조리 더듬어 뒤지면서 찾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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