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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②]향랑의 죽음 - ‘수절’인가 ‘저항’인가

by 낮달2018 2020. 9.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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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②]시내 형곡동 열녀 ‘향랑’의 노래비와 무덤

▲ 구미시 형곡동 시립 중앙도서관 뜰에 세운 향랑의 노래비.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산유화가'를 새겼다.

향랑의 노래  산유화가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없는 책을 빌리러 형곡동의 시립 중앙도서관에 적잖이 들렀다. 도서관 주변을 빙빙 돌다가 간신히 차를 대고, 서둘러 책을 빌려 나오기 바빠서 도서관 구내를 돌아볼 생각을 전혀 하지 못했다. 거기 생육신 이맹전의 유허비와 향랑(香娘, 1683~1702)의 노래비가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게 요즘 들어서다. 모르는 게 없는 것처럼 깐죽대지만, 우리는 정작 우리 주변에 대해서 알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이다.

 

도서관 건물 뒤쪽 정원에 이맹전(1392~1480) 유허비와 향랑의 노래비가 있다. 생육신 가운데 한 분인 이맹전의 유허비는 단청을 칠한 비각 안에 모셔져 있고, 향랑의 노래비는 3단으로 된 돌 기단 위에 자연석을 얹은 형태였다. ‘烈女 香娘 노래 碑’를 새긴 자연석 아래 그가 남겼다는 노래 ‘산유화가’가 오석에 새겨져 있다.

 

향랑은 고아 봉한리의 약가(藥哥)와 마찬가지로 열녀비로 기려지는 양인이다. 그는 남편의 학대와 폭력,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의 재가 권유조차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이른바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의’를 지킨 여인으로 나라의 정려를 받았다.

 

향랑은 숙종 때 일선부(一善府) 상형곡(上荊谷, 지금의 구미시 형곡동)에서 태어났는데 일찍 어머니를 여의었다. 아비가 후취를 들였는데, 이 계모가 모진 여자라 학대를 받으며 자랐다. 열일곱에 같은 마을의 세 살 아래인 임칠봉과 혼인했으나, 칠봉은 성질이 고약하여 손찌검과 패악이 극심했다.

 

그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향랑은 친정으로 갔으나 계모는 그를 모질게 내쳤다. 부친이 그를 숙부에게 보내자, 조카를 부담스러워한 숙부도 재가를 권했다. 이를 거절한 그는 결국, 남편의 폭력과 학대가 기다리고 있는 시가로 되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 형곡동 뒷산에 있는 향랑의 무덤 앞 사당 정렬사. 1992년 구미문화원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이 사당을 세웠다.

시부조차 재가를 권유하자 마침내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려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아래 있는 오태소(吳太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꽃다운 열아홉이었다. 선산 부사 조구상이 향랑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삼강행실도를 모방하여 ‘열녀 향랑 의열도(義烈圖)’를 그려 조정에 알리니 숙종 29년(1703)에 나라에서 정려(旌閭)하였다.

 

‘산유화가’의 변주와 향랑 서사 설화 정착

 

향랑이 죽기 전에 한 초녀(樵女)에게 남긴 노래가 ‘산유화가’다. ‘산유화가’는 메나리(강원도와 경상도, 그리고 충청도 일부 지방에 전승되는 민요)의 한역(漢譯)으로, 고문헌에는 백제의 가요에서 비롯되었다는 설과 조선 숙종 때 선산의 향랑이 지었다는 설 등이 전하니, 이 노래는 구전된 민요인 듯하다.

 

天何高遠(천하고원)   하늘은 어이하여 높고도 멀며

地何廣邈(지하광막)   땅은 어이하여 넓고도 아득한고.

天地雖大(천지수대)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하나

一身靡託(일신미탁)   이 한 몸 의탁할 곳 없다네.

寧投江水(영투강수)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서

葬於魚腹(장어어복)   물고기 배 속에 장사 지내리라.

▲ 향랑이 투신한 오태소 부근에 있는 '지주중류' 비. 야은의 충절을 기린 비다.

이 평민 여성의 절행(節行)에 감명받은 사대부들이 이를 민간에 전하면서 향랑의 서사는 노래뿐 아니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른 윤색이 두드러진 ‘전(傳)’의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설화’로도 정착했다. 설화는 향랑의 ‘열녀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이 설화는 계모와 남편의 학대가 중심 모티프여서 ‘학처형(虐妻型) 설화’로 분류된다.

 

산유화가는 구전되면서 지금의 채록본에는 “구경 가세 / 구경 가세 / 만경창파 구경 가세 / 세상천지 넓다 해도 / 이 몸 하나 둘 데 없네 / 차라리 물에 빠져 / 물고기의 배 속에나 장사하세”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 한 여인이 노래한 절망과 그 극한의 절망에서 선택한 죽음이 노래와 이야기로 변주되어 온 것이다.

 

문인들은 ‘산유화’를 여러 가지로 지어 불렀는데 특히 이안중은 <향랑전>을 짓고 향랑의 ‘산유화’가 너무 속되므로 다시 고쳤다며 세 편을 짓기도 했다. 그중 한 편은 “산에 꽃이 피었으나 / 나는 홀로 집이 없다네 / 그래 집 없는 이 몸이란 / 꽃보다도 못하다오.(山有花 / 我無家 / 我無家 / 不如花)”다.

 

향랑 설화는 <동국문헌비고>·<영남악부>·<일선읍지>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나, 서울대학교 도서관이 소장한 가람문고의 <일선의열도>가 가장 자세한 내용을 담고 있다.

 

향랑 설화를 다룬 고전소설로는 1814년(순조 14) 김소행이 지은 2권 2책의 한문 필사본 <삼한습유(三韓拾遺)>가 있다. 표제는 ‘삼한습유’지만, 속 제목은 ‘의열녀전’·‘향랑전(香娘傳)’으로 되어 있다. 전기적 작품으로는 선산 부사 조구상의 <향랑전>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그 밖에 이광정의 <임열부향랑전(林烈婦嚥娘傳)>, 이안중의 <향랑전>, 이옥의 <상랑전(尙娘傳)> 등이 있다.

 

전문 연구 가운데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경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고려대 정창권)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지역에서는 구미 시립 중앙도서관 뜰에 향랑의 시비를 세우고, 형곡동 뒷산 기슭의 향랑 묘 부근에 사당을 짓고 묘비를 정비하는 등으로 그의 열행을 기리고 있다.

▲ 향랑의 묘 앞 열녀비. 가운데에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운 흔적이 보인다. .
▲ 사당 뒤편에 있는 향랑의 무덤과 빗돌. 오석으로 지은 새 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옛 열녀비가 있다.

원형의 삶과 진실 찾기는 뒷사람의 몫

 

열녀, 또는 열부(烈婦)는 ‘남편이 죽은 후에 수절하거나 위난 시 죽음으로 정절을 지킨 여성’이다. 유교 사회에서 부부관계는 ‘남편에 대한 아내의 순종과 수절(守節)’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었는데 이는 중세 봉건사회를 유지하는 가부장적 질서의 기초였다. 조선왕조에서는 이 유교적 여성관을 널리 알리고 후세의 규범으로 삼고자 관련 서적을 펴내고 이를 실천한 여성을 ‘정려’하면서 열녀는 저절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는 구조가 되었다.

 

이 일부종사의 봉건적 여성관이 꾸준히 학습된 결과,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수많은 열녀가 생산되었다. 열녀 이데올로기는 조선 후기로 가면서 상층계급에서 하층계급으로까지 침투되어 조선 사회에 일반화되어 갔다. 19세기 말 심지어는 20세기까지도 열녀가 나왔던 이유다.

 

숙종 때의 향랑이 열녀로 정려된 것은 적잖이 특수한 예다. 향랑은 남편이 죽은 것이 아니라, 남편의 극심한 학대에도 일부종사의 의를 지켰다. 시부까지 권유한 재가를 끝내 거부하고 그는 스스로 자진함으로써 결과적으로는 ‘불경이부(不敬二夫)’를 관철했다. 이에 나라에서는 양인 향랑을 정려하여 그의 수절을 기린 것이다.

▲ 무덤에서 바라본 정렬사. 무덤앞 크고 높은 새 비석이 묵은 열녀비를 압도한다.;
▲ 충노(忠奴) 석이지비(石伊之碑)

그러나 ‘열녀’라는 윤리적 광휘(아우라)를 걷어내면 향랑이 강인한 의지와 자기주장이 강한 주체적 여성이라는 사실이 보일 듯도 하지 않은가. 주어진 시련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과 맞서고자 했던 이 17세기의 여인은 마침내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것 또한 왜곡된 삶과 현실에 대한 저항이며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태어났고 그예 나라의 기림까지 받은 것이다.

 

향랑의 묘 앞에 세운 옛 빗돌도 약가와 석이의 빗돌과 닮았다. 거친 자연석의 질감이 묻어나는 빗돌에서는 잘 다듬어진 오석(烏石)과 값비싼 석재에서 보이는 위화감이 없다.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웠지만, 1992년에 새로 세운 오석에 지붕돌을 얹은 크고 세련된 새 묘비보다 훨씬 정겹고 편안하다. [관련 글 : 수백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그 당대에는 석재를 달리하고, 덮개돌을 얹는지에 따라 그 신분을 드러내었을지언정 풍화를 견디며 살아온 빗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새기는 것은 뒷사람의 몫이다. 충효든, 열이든 그것이 투영하고 있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그 가공되지 않은 원형의 삶과 그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2020. 9. 4.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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