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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독동리 반송, 그 다소곳한 자태로 ‘천연기념물’이 되다

by 낮달2018 2022. 11.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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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㉑] 선산읍 독동리 반송(盤松)

*PC에서 ‘가로 이미지’는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 선산 장날 풍경. 오전이어선지 어물전이 한산하다. 2012년 8월에 찍은 사진이다.
▲ 한적한 귀퉁이에 차린 옹기전. 역시 2012년 8월의 사진이다.

가끔 2일과 7일에 각각 서는 선산 장에 들르곤 한다. 마트에서와 달리 인심이 넉넉하고, 때로 에누리도 해 주는 시골 장의 풍경이 좋아서다. 특히 아내가 즐겨 드나드는데 며칠 전에는 김장용 마늘을 사러 들렀다. 아무래도 잘 고르면 실한 놈을 시내보다 싸게 살 수가 있다.

 

2일과 7일에 서는 ‘선산 오일장’

 

우리는 그냥 ‘선산 장’이라고 부르는데 정식 이름은 ‘선산 전통 시장’, 또는 ‘선산 봉황시장’이란다. 선산 읍성 남문인 낙남루(落南樓) 뒤편으로 비봉산에서 흘러내린 단계천(丹溪川) 복개도로로 이어진 시장판은 늘 시끌벅적하고 활기가 넘친다. 우리는 낙남루 뒤쪽 도로변에 트럭을 대고 장사하던 붙임성 좋은 청년에게서 의성 마늘 한 접을 3만5천 원에 샀다. 물에 불린 마늘을 내가 먼저 깠는데, 쪽이 좋고 아주 단단해서 아내도 썩 만족해했다.

 

장을 보고 돌아오는 길은 늘 큰길인데, 그날은 독동리 반송을 찾아볼까 하여 선산도서관 앞으로 이어지는 교동천 옆길을 따라 내처 달렸다. 수천교 앞에서 왼쪽 길로 곧장 와 흰티고개를 넘으면 길가의 독동리 반송에 이른다. 반송은 비닐하우스 앞 농로 옆에 홀로 서 있다.

 

반송(盤松)은 상록 침엽 교목으로 소나무의 한 품종이다. 줄기가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고 전체적으로 우산 모양이다. 줄기 밑 부분에서 거의 같은 크기의 가지가 많이 나와 나무 전체가 반원형을 띠며, 소나무에 비하여 훨씬 작다.

▲ 구미시 선산읍 독동리의 반송. 수령 400년의 이 반송은 1988년에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우산 모양의 반송

 

반송은 지상 40㎝ 높이에서 가지가 남북 2개로 갈라졌다. 남쪽 줄기는 80㎝ 높이에서 3개로 갈라졌으며 각 밑부분의 둘레는 1.7m, 1.6m 및 1.2m이고 북쪽 줄기는 40㎝ 높이에서 두 갈래, 60㎝ 높이에서 세 갈래, 80㎝ 높이에서 두 갈래 120㎝ 높이에서 모두 아홉 개의 줄기로 갈라졌는데 각 밑부분의 둘레는 1.5m, 1.3m, 1.1m(3개) 등이다.


반송의 높이는 13.1m, 가슴높이 둘레가 7.2m이고, 지면 부 둘레가 4.05m이다. 가지의 길이는 동·서쪽이 14.9m, 남쪽과 북쪽이 15.65m다. 농로 옆에서 홀로 자라며, 이웃 마을에 활터가 있었다고 한다. 이 마을의 안강 노씨(盧氏)가 입향할 때부터 자라온 나무라고도 하지만 자세한 내력은 알지 못한다. 반송은 나이가 약 400년으로 추정되는데 1988년 4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었다.

 

반송은 수형이 아름다워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보호받는 경우가 많다. 선산 독동리 반송 말고도 무주 삼공리 반송(1982), 문경 화산리 반송(1982, 상주 상현리 반송(1982), 함양 목현리 구송(1988), 영양 답곡리 만지송(1998) 등이 대표적이다. 요즘에는 공원이나 정원의 조경수로 널리 심어진다.

▲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반송들. 상주와 영양, 문경 등 경북, 함양(경남), 무주(전북) 등에 있다.

예부터 선비들의 사랑을 받은 반송

 

예부터 선비들이 반송을 좋아한 것은 그 아름다운 모습 때문이다. 조선 초기 한양에서 개성으로 가는 길목인 지금의 서울특별시 서대문구 천연동 부근에는 고려 때부터 커다란 반송 한 그루가 자라고 있었다. 그늘이 수십 보를 덮을 만큼 큰 나무라서 길 가는 사람들의 좋은 휴식처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시대 어느 임금도 남쪽으로 행차하다가 비를 만나 잠시 반송 밑으로 피했는데, 훗날 거기 ‘반송정(盤松亭)’이란 이름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태종 7년(1407)에는 반송정 옆에 중국 사신을 맞이하는 모화루(慕華樓)를 짓고 서지(西池)라는 못까지 팠다고 전해진다.

 

반송정은 귀한 손님을 맞거나 떠나보낼 때 ‘영접과 환송의 장소’로 유명했다. 그래서 옛 문인들은 ‘반송송객(盤松送客)’이란 시를 여럿 남겼다. 조선 초기의 학자 서거정(1420~1488)이 한양의 명소 10곳을 소재와 주제로 삼은 한시집 <한도십영(漢都十詠)> 중에도 반송송객이 들어 있다.

▲ 반송은 줄기가 밑동에서부터 여러 갈래로 갈라져서 줄기와 가지의 구별이 없다.
▲ 독동리 반송은 농로 옆에 홀로 서 있다. 이 나무는 독동리에 안강 노씨가 입향할 때부터 자라왔다고 하지만,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한다.

반송송객(盤松送客)    반송정에서 손을 보내며

 

故人別我歌遠遊(고인별아가원유)    친구가 나와 이별함에 원유시를 불러주니

何以送之雙銀甌(하이송지쌍은구)    은사발처럼 서로 짝이었는데 어찌 보내야 하나.

都門楊柳不堪折(도문양류불감절)    도성 문의 수양버들 꺾기를 참아내지 못하니

芳草有恨何時休(방초유한하시유)    방초에 맺힌 한은 어느 때야 그칠는지

 

去年今年長參商(거년금년장참상)    지난해나 올해나 늘 서로 멀리 떨어지고

富別貧別皆銷膓(부별인별개소장)    부자나 빈자의 이별은 모두 다 마음을 녹이네.

陽關三疊歌旣闋(양관삼첩가기결)    양관곡 세 번 거듭하는 노래도 이미 끝냈는데

東雲北樹俱茫茫(동운북수구망망)    동녘의 구름과 북쪽의 나무들 모두 어둡고 아득하구려.

 

한반도 어느 산이든 울창하게 자라는 소나무는 한민족에게 가장 가깝고 정겨운 나무다. 거대하게 자란 노목의 장엄함이나, 눈 서리를 이겨내는 푸른 기상은 굳은 절조와 의지를 상징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 소나무 가운데서도 독특한 수형으로 뭇사람들에게 그윽한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반송이 사람들의 사랑을 받은 건 당연하다.

 

나는 차를 세우고 방향을 달리해 가면서 사진을 여러 장 찍었다. 주변에는 한낮인데도 인적이 드물고, 시골 특유의 고적감이 반송 주변에 안개처럼 서려 있었다. 선산 지역의 선인 가운데서는 이 반송을 노래한 시인 묵객은 따로 없었던가, 머리를 갸웃하며 나는 천천히 독동리의 반송을 떠나 집으로 차를 몰았다.

 

 

2022. 11. 29. 낮달

 


▲ 태풍으로 쓰러진 독동리 반송. 관계자들이 살펴보고 있다. 네이트 뉴스 사진
▲ 오늘 찾은 독동리 반송. 왼쪽에 철제 지지대로 쓰러진 가지를 받치고 세워놓았다. 자른 가지는 하나뿐인 듯했다.

지난 8월 10일 6시 20분쯤 제6호 태풍 ‘카눈’의 영향으로 천연기념물 ‘독동리 반송’의 일부가 쓰러져 현장을 확인한 뒤 가지 4개 규모를 잘라냈다는 보도가 있었다. 블로그의 이 글이 100회 이상 조회된 이유다.

 

오늘 선산 오일장에 말린 고추를 보러 갔다가 오는 길에 독동리에 들렀다. 가지를 잘랐다고 하는데, 자른 흔적이 있는 가지는 하나밖에 보이지 않았다. 넘어진 가지를 당겨서 오른쪽의 가지에 붙들어 맸고, 군데군데 꺾어진 부분에도 천으로 동여매어 놓았다.

 

책임자인 듯한 이에게 저렇게 하면 살아나느냐고 물었더니, 일단 완전히 꺾어진 게 아니어서 비상조치를 하고 두고 보려고 한다고 했다. 오른쪽에는 작업 트럭을 대고 성한 가지를 자르고 있었는데, 중량을 줄이려고 한다고 했다. 어쨌든 태풍 때문에 쓰러진 나무가 다시 살아나 옛 모습을 찾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 왼쪽에 일으켜 세우고 지지대를 받친 가지가 보인다. 왼쪽에서 두 번째 가지는 줄로 오른쪽 가지에 묶어두었다. 부러진 부분도 헝겊으로 쌌다.
▲ 오른쪽 성한 가지 쪽에서 작업차량에 탄 인부가 성한 가지를 자르고 있다. 중량을 줄이기 위해서라고 했다.

2023.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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