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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야은 길재, 삼은 가운데 우뚝한 ‘절의의 상징’

by 낮달2018 2022. 3.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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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⑨] 야은 길재를 기리는,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 지주중류비는 구미시 오태동 길재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400m 떨어진 낙동강 강변에 있다. 저 멀리 비각의 지붕이 보인다.

야은 길재(1353~1419)를 기리는 빗돌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는 오태동, 남구미 나들목 근처에 있다. 경북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이 빗돌은 1587년(선조 20)에 인동 현감으로 있던 겸암(謙唵) 류운룡(1539~1601)이 길재의 묘역을 정비한 뒤 주변에 사당과 오산서원(吳山書院)을 창건하고 그 앞에 세운 비석이다.

 

인동현감으로 있던 류운룡이 세운 낙동강 강변의 지주중류비

 

1585년에 인동 현감으로 부임한 류운룡은 3년 차인 1587년(선조 20)에 길재의 높은 충절을 기리기 위한 역사(役事)를 벌였는데 이 빗돌은 그것을 매조지는 일이었다. 지금은 터만 남은 오산서원은 1609년(광해군 1)에 사액 되었으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고 이후 복원되지 못하였다.

 

길재의 묘소에서 동쪽으로 약 400m 정도 떨어진, 낙동강 강변의 구릉 위에 세워진 사암 비석은 덮개돌 없이 윗부분이 평평하고 모서리에 각이 있는 형태다. 비신은 높이 320㎝, 너비는 109㎝, 두께 37.5㎝, 3m가 넘는 높이와 1m가 넘는 너비의 비석은 여느 비석과는 달리 사람을 압도하는 규모다.

▲ 지주중류비. 처음 세운 비석이 홍수에 유실되어 다시 세운 것이다 .
▲ 야은 길재의 묘소. 지주중류비로부터 500m 서쪽에 있다.

‘지주(砥柱)’란 중국의 황하 중류에 있는 지주산(砥柱山)을 가리킨다. 황하가 범람할 때 탁류 중에 있으면서도 흔들리지 않는 지주산은 중국 은나라 충신 백이·숙제의 곧은 절개의 비유로 흔히 쓰였는데, 고려에 대한 길재의 충절 역시 이 산에 비긴 것이다.

 

비의 앞면에는 한강 정구(1543~1620)가 중국에서 탁본해 온 중국의 명필 양청천의 글씨를 새겼고, 뒷면에는 류성룡이 지은 ‘야은 선생 지주비 음기(冶隱先生砥柱碑陰記)’가 음각되어 있다. 지주중류비는 처음 세운 비석이 홍수에 유실되어 1780년(정조 4)에 다시 세운 것이다.

 

백이 숙제의 충절에 비긴 야은의 절의

 

야은(冶隱) 길재는 이색, 정몽주, 권근 등에게서 배웠으며, 벼슬이 문하주서에 올랐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사직하고 귀향했다. 고려가 망하고 조선 왕조에 들어 태종이 관직을 내렸으나 두 왕조를 섬길 수 없다면서 사양하고, 선산에 은거하여 절의를 지켰다. 1419년(세종 1) 67세로 세상을 떠나자 나라에서 ‘충절(忠節)’이란 시호를 내렸다.

 

길재는 목은(牧隱) 이색(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1337~1392)와 함께 고려의 ‘삼은(三隱)’이라 불리면서 그 충절과 학덕이 기려졌다. 세종이 길재의 절의를 기리는 뜻에 그 자손을 등용하려 하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과 같이 자손들은 새 왕조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출사(出仕)를 인정해 주었다고 한다. 어쨌든 그는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왕조의 교체를 추인한 것이다.

 

이욕(利慾)에 뜻을 두지 않고 자신을 흠모하는 학자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는 등 그는 오직 도학을 밝히고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는 김숙자(1389∼1456)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관련 글 :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 야은 길재 영정. 야은사에 모셔진 영정이다.

무릇 성리학을 공부한 선비들 가운데 불사이군의 굳은 절의로 은둔의 삶으로 드러내 보인 길재를 숭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200여 년 뒤에 인동현감으로 부임하여 묘소를 참배하러 온 류운룡이 중국 백이숙제의 사당 앞에 세운 지주중류비에 빗대어 이 빗돌을 세운 것이다.

 

서애 류성룡이 쓴 음기

 

빗돌의 뒷면에는 서애 류성룡(1542~1607)이 지은 비문이 음각되어 있다. 비문에는 지주중류비를 세운 다음, 류운룡이 아우인 서애에게 비문을 짓게 한 경위가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서애가 ‘지주’의 뜻을 묻자 겸암은 이렇게 말한다.

 

“여기에 어떤 절개 있는 선비가 우뚝 떨치고 일어나 죽음으로써 올바른 도리를 지키며 그 한 몸으로 우주의 삼강(三綱)과 오상(五常)의 무거운 책임을 졌다. 부귀도 그를 현혹하지 못하고 빈천도 그를 움직이지 못하며 위엄과 무력이 그를 굴복시키지 못하니, 정의와 충절은 당대에 빛나고 그 교화와 명성은 후세의 모범이 되었다. 이것으로 저것을 비유하면 그 누가 그렇지 않다고 하겠는가.

 

길 선생은 고려 말기에 벼슬을 하여 장차 망할 것을 미리 알고 구름 덮인 숲으로 은거하여 몸을 보전하였다. 성인이 나와 만물이 우러러보고 일월이 빛을 내고 산천이 모양을 고칠 때가 되어서는 전날 왕씨(王氏)의 문에 의지해 먹고 살던 자들은 분주하게 날뛰면서 뒤질까 걱정하였지만, 선생은 정색하고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는 의리를 주창하며 자취를 감추어 문을 닫고 들어앉아 죽기로 맹세하고 일어나지 않았으니 그 충성이 빛나는도다.

 

대개 천하의 큰 어려움을 당해서 천하의 큰 절개를 세우고 천하의 사람들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여 오직 금오산 한 구역에서 왕씨의 연호를 수십 년 동안 지켰으니, 아, 장하다. 그것이 참으로 지주(砥柱)였으니, 여기에서 그 뜻을 취하였다.”

▲ 서애 류성룡이 쓴 지주중류비 뒷면의 음기.

음기(陰記)는 서애가 이에 화답하여 노래한 시로 끝난다.

 

오산에 무엇이 있던가 / 터가 있고 서당이 있도다 

낙동강이 굽이쳐 흐름이여 / 그 흐름이 크고도 길도다

한 줌의 흙 거친 언덕이여 / 오직 선생의 무덤이로다 

돌을 깎아 글을 새김이여 / 만년을 두고 빛을 밝히리라 

충성을 다하고 효도를 행함이여 / 우리에게 주신 은혜 가없어라 

좋은 안주 드리고 좋은 술 올리니 / 흡사 영혼이 거니는 것 같도다

높은 산 우러러보고 맑은 물 굽어보면 / 선생의 생각을 잊을쏜가 

높은 산 우러러보고 맑은 물 굽어보면 / 선생의 생각을 잊을쏜가

▲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 주변에 있는 야은 길재 유허비

지주중류비는 원래 비각 없이 세워져 있었으나 해평 길씨 문중에서 관리하면서 비각을 지은 듯하다. 비각 주변은 잔디밭을 가꾸어 놓았고 거기 고풍스러운 팔걸이의 나무 벤치 두 개가 나란히 서 있다. 입구 쪽에서 바라보면 비각은 주변에 심은 소나무에 가려 간신히 지붕만 언뜻 보일 뿐이다.

 

비의 보전을 위해서는 비각이 도움이 되긴 하겠다. 그러나 대체로 빗돌이 좁다란 비각 안에 갇혀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비각을 짓기 이전의, 석재울타리만 친 지주중류비가 훨씬 의젓하고 장중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충남 금산에 또 다른 지주중류비가 세워진 까닭

 

지주중류비는 충남 금산군 부리면에 있는 청풍(淸風)서원 앞에도 세워져 있다. 1678년(숙종 4) 길재의 청절(淸節)을 기리고자 창건한 청풍서원은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1970년대에 복원하였다. 선산 출신인 길재를 추모하는 서원이 금산에 세워진 것은 부친 길원진이 1383년 금주(금산의 옛 지명) 지사로 부임할 때 야은이 따라가서 4년여 동안 머무른 연고 때문이다.

▲ 비각이 세워지지 않았을 때의 지주중류비
▲ 충남 금산군 부리면 길재를 기려 세운 청풍서원 앞에도 구미의 지주중류비와 똑 같은 빗돌이 세워졌다.

지주중류비는 1948년 청풍사(淸風祀) 앞에 구미의 지주중류비를 탁본하여 세웠다. 지주중류비 오른쪽에는 영조 37년(1761)에 금산군수 민백홍과 지방 유림이 세운 ‘백세청풍(百世淸風)’비도 있다. ‘백세청풍’은 원래 황해도 해주 수양산(백이·숙제가 주려 죽었다는 산과 이름이 같음) 청성묘(淸聖廟)에 백이·숙제를 기려 세운 비석에 쓰인 글로 “백이와 숙제의 청풍(淸風)이 백세(百世)에 영원하라”는 의미다.

 

여말선초 당시 성리학을 공부한 신진 사대부들은 이성계의 역성혁명에 참여한 이들과 고려 왕조에 대한 절의를 지킨 이로 나뉘었다. 이른바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이들 중 포은 정몽주는 태종 이방원에게 죽임을 당했고, 목은 이색과 야은 길재는 낙향과 출사하지 않는 소극적 저항을 선택했다.

▲ 왼쪽부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여말 삼은은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맨 오른쪽)을 넣기도 한다.

야은을 삼은의 한 사람으로 기리긴 하지만, 역사학자 이병도는 <국사대관>(1954)에서 야은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을 내세웠다. 그는 길재에 대해서는 고려말의 한 유자(儒者)이지만, 고려 말보다는 조선 초에 더 유명했다고 한 것이다.

 

삼은 중 길재는 이색·정몽주를 사사한 데서 보듯 포은과 목은보다 16년에서 25년 연하다. 그러나 그는 살아남아 ‘유학연원(儒學淵源)’을 이었고,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않는 대신 구미 금오산 아래에서 자제들을 교육함으로써 조선시대 사학(私學)을 일으킨 업적이 크다고 했다. 결국 그는 삼은 가운데서 절의의 상징 ‘백세청풍’과 ‘지주중류’로 기려지게 된 것이다.

 

 

2022. 3. 10.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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