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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18

항저우 서호(西湖)와 ‘공산주의’ 항저우(杭州)에 들른 것은 지난 1월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 여정의 둘째 날이었다. 우리는 임시정부 항주 시기의 첫 청사였던 군영반점에서 하룻밤을 묵었다. 이튿날에는 임시정부 항주 옛터 기념관을 거쳐서 전장(鎭江)으로 떠나기 전에 짬을 내 서호(西湖)에 들른 것이다. 항저우(杭州)는 장강(長江) 델타 지역에 자리 잡은 저장성(浙江省)의 성도(省都)다. 중국의 7개 고도(古都) 가운데 하나로 손꼽히는 이 도시는 수나라 때 건설된 대운하의 남쪽에 자리 잡고 있어 일찍부터 대운하를 이용한 상업이 발달하였다. 10세기에 항저우는 난징(南京)과 청두(成都)와 함께 남송(南宋) 문화의 중심지였다. 12세기 초부터 1276년 몽골이 침입하기까지 남송의 수도였는데, 이때는 임안(臨安)으로 불리었다. 당시 북쪽엔 여진이 .. 2021. 4. 8.
[임정답사]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그 가뭇없는 꿈의 안부’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충칭(重慶)③ 광복군의 국내 진공 계획 '독수리 작전'과 임정의 귀국 충칭에 복원한 한국광복군 총사령부의 전시물은 대부분 사진 자료다. 1940년대 사진이라 해상도가 매우 낮아 사람의 얼굴이나 사물을 제대로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의 사진도 적잖다. 이는 80여 년 전의 역사를 재구성하는 게 쉽지 않았던 탓이다. 망명한 민족 지도자들이 임시정부를 세운 지 21년 만에 ‘광복군’이라는 이름의 직속 군대를 창설한 것은 감격스러운 일이긴 했다. 그러나 중국 정부의 허락을 받아 조직한 군대라는 점 외에도 광복군의 열악한 존재 조건은 일일이 셀 수 없었다. 임정은 창군(創軍)은 했지만, 실질적 무장력이 될 병사도 없었고, 그 군대를 운영·유지할 돈도 없었다. ‘병사’를 모으는 광복군의 활.. 2021. 3. 14.
[임정답사]‘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충칭(重慶)② 한국광복군의 창설과 일본의 패망, 그리고… 답사의 마지막 날은 충칭의 롄화츠(연화지 蓮花池) 청사와 복원된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을 찾는 일정이었다. 롄화츠 청사와 한국광복군 총사령부는 1919년 임정을 수립한 뒤 20년 넘게 이어온 항일 투쟁을 수렴하면서 광복을 맞을 때까지 가장 활발한 독립운동을 전개해 나간 행정과 군사의 사령탑이었다. ‘민족 대표와 독립운동 중심기구’로서의 위상 회복한 충칭 임정 상하이를 떠난 이래 8년여 동안 항저우, 전장, 창사, 광저우와 류저우, 치장을 거쳐온 임정은 전쟁으로부터 비교적 안정된 지역인 충칭에 정착하면서 조직과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였다. 임정은 충칭에 오기 전인 1940년 5월 민족주의 세력을 통합하여 한국독립당을 창당함.. 2021. 3. 6.
[임정답사]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重慶)① 토교마을에서의 삶과 토교대(土橋隊) 넷째 날, 오후에 우리는 버스 편으로 마지막 임정 청사가 있었던 충칭 시내로 들어갔다. 해방까지 머문 충칭은 상하이를 빼면 임정이 가장 오랜 기간 주재(駐在)한 도시다. 1941년 태평양전쟁이 일어나면서 급박하게 전개되어 간 제2차 세계대전의 추이에 따라 충칭 임시정부도 바빠졌다. 임정은 여기서 광복군을 창군함으로써 비록 소규모지만 직속 군대를 보유하게 되면서 본격적인 항일전쟁을 준비하기 시작한 것이다. 토교마을에서 시작된 충칭 생활 그로부터 80여 년 뒤, 충칭을 찾은 한국인들이 엄청나게 변모한 이 거대한 도시에서 임정의 자취를 찾는 건 그리 쉽지 않았다. 요인과 가족들이 머문 토교마을과 그들이 묻힌 허상산 묘지, 조선의용대.. 2021. 3. 2.
[임정 답사]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치장(綦江), 광복군의 밑돌 ‘한국청년전지공작대’ 결성 셋째 날, 우리는 류저우역에서 고속열차를 타고 5시간쯤 걸려 쭌이(遵義)에 도착했다. 인구 800만의 이 도시는 1935년 1월, 중국공산당의 장정(長征) 도중 열린 ‘쭌이 회의’로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아 이후 장정을 이끌게 된 곳이다. 중국공산당 권력의 한 축이었던 보구(博古) 등 볼셰비키 그룹은 이 회의에서 패전을 책임지고 물러나야 했다. 4월 초순 떠나 월말에야 치장에 도착 우리는 쭌이에서 묵고 다음 날 쭌이 회의장을 둘러본 뒤, 바로 구절양장(九折羊腸)의 ‘72굽이 산길’을 돌아 치장으로 내달았다. 류저우를 떠나 치장까지 오는데 이동 시간만 따지면 7시간이 채 되지 않았다. 그러나 1939년 4월 초순, 임정과 식.. 2021. 3. 1.
[임정 답사] 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⑨] 류저우(柳州), ‘망명정부’의 다섯달-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결성 둘째 날, 우리는 광저우 남역에서 고속열차를 탔다. 5년 만의 방문이지만, 그새 중국의 모습은 5년 전의 그것과는 사뭇 달라져 있었다. 첫 방문에서는 무심하게 중국을 바라보기만 했다면, 이번엔 뭐라고 할까, 보이는 것 너머가 언뜻 눈에 띄기 시작하면서 슬그머니 기가 죽는 기분이었다. 우선 사회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시장경제가 떠받치는 이 나라의 규모가 새롭게 눈에 들어왔다. 대구는 말할 것도 없고 서울로도 비기지 못할 듯한 큰 규모의 도시가 그랬고, 광저우 남역도 마찬가지였다. 그럴 때마다 14억명 나라라는 사실을 환기하곤 했지만, 그것만으로 그 규모가 해명되진 않았다. 상상 너머의 덩치가 드러내는 게 이 거대국가의.. 2021. 2. 17.
[임정 답사]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광저우(廣州) ② 광저우 기의(起義)와 한중 로맨스, 조선의용대의 결성 둘째 날의 여정은 광주기의열사능원과 1921년 임정의 국무총리이자 외무총장이었던 신규식이 정식 외교 사절로 쑨원을 만난 동교장(東較場), 루쉰기념관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모두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가 된 황푸군관학교로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규식이 쑨원을 만나 임정의 정식 승인과 한국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 등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한 동교장은 이미 2만7천 규모의 광저우시 체육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역사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사실의 기록이다. 그러나 건물 외관만 둘러보고 돌아서는 여정은 씁쓸하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에 시작된 광저우 기의(起義)는.. 2021. 2. 10.
[임정 답사]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광저우(廣州) ①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 황푸군관학교 2015년 상하이(上海)에서 항저우(杭州)와 전장(鎭江)을 거쳐 난징(南京)에서 마무리한 4박 5일(1.23.~1.27.)간의 1차 임시정부 노정 답사를 이은 2차 답사를 떠난 것은 지난해 1월이었다. 답사의 기억이 바래 가는 5년 만에 다시 길을 떠날 수 있었던 것은, 그러나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느닷없는 코로나19의 기습으로 답사 한 달 뒤부터 나라 밖 여행이 꽁꽁 묶여 버렸기 때문이다. 5박 6일(1.9.~1.14.)간의 2차 답사는 일정상 창사(長沙)를 건너뛰고 광저우(廣州)에서 출발하여 류저우(柳州)·치장(綦江)을 거쳐 충칭(重慶)에서 마무리하는 여정으로 진행되었다. 82년 전, 임시정부 요인과 가족들은 창.. 2021. 2. 9.
사라진 제국 그 후… 이 정부가 없었다면 왕정에서 공화정으로, 임시정부 100년… 임시정부기념관 건립을 그리며 1919년 4월 11일은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수립된 날이다. 그동안 4월 13일을 임정 수립 기념일로 기려온 것은 대한민국 임시헌장을 선포한 날을 중심으로 잡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임정은 이틀 전인 4월 11일에 수립됐다고 하는 게 옳고, 정확하다(따라서 기념일은 다시 지정하는 게 마땅하다). 4월 11일, ‘왕정’에서 ‘민주 공화정’으로 상하이에서 우리 독립운동가 29명이 오늘날의 국회 격인 임시 의정원(議政院·의장 이동녕)을 구성하고 제1회 임시의정원 회의를 연 것은 그 하루 전인 4월 10일이었다. 밤 10시부터 시작된 회의는 다음날까지 계속됐고 마침내 국호를 ‘대한민국’으로 하는 임시헌장을 제정해 통.. 2019. 3. 13.
갑자기 김구 곁을 떠난 며느리, 지금껏 ‘수수께끼’ 해방 70년과 겹치는 독립운동가 김인 70주기 독립운동가 김인(金仁, 1918~1945)의 70주기가 3월 29일이란 사실을 나는 청년백범 4기의 임시정부 노정 답사단의 해설을 맡았던 홍소연 선생으로부터 전해 들었다. 2013년 자료실장을 끝으로 백범기념관에서 정년 퇴임한 홍 선생은 그리던 해방을 맞지 못하고 스물여덟의 짧은 생애를 마쳐야 했던 한 청년 투사의 죽음을 느꺼워하고 있었다. 임정 요인 백범 김구의 맏아들로 태어나 열일곱 어린 나이에 독립운동을 시작해야 했던 김인은 폐병을 앓다가 쓰촨성(四川省) 충칭(重慶)에서 병사했다. 1945년 3월 29일, 해방 다섯 달 전이었다. 그의 70주기가 해방 70년과 겹치는 까닭이다. 해방 전후사를 살펴볼 때마다 안타까운 것은 숱한 독립운동가들이 해방을 맞지 .. 2019. 3. 11.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일본군 위안소와 난징 대학살 경남에 거주하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효순 할머니의 부음을 전해 들으면서 나는 난징에서의 둘째 날, 호텔에서 지척이었던 리지샹(利済港) 2호에 있는 ‘긴스이루(樓)’를 떠올렸다. 2014년에 장수성(江蘇省)의 ‘문물보호단위’로 지정된 유적은 굳게 잠겨 있었으므로 우리는 출입문 사이로 보이는 퇴락한 건물 앞에 세워진 표지석밖에 찍을 수 없었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 그리고 박영심 리지샹 위안소는 면적이 6700㎡로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에 세운 위안소 가운데 가장 규모가 크고 가장 온전하게 보존된 위안소 유적이다. 시멘트 담장과 가림막 너머 낡고 황량한 대형 건물 7동이 뉴스의 조명을 받게 된 것은 이곳이 일본군 위안소였기.. 2019. 3. 9.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난징, 항공열사와 조선혁명군사정치간부학교 대한민국 임시정부(아래 임정)가 공식적으로 난징(南京)에 청사를 둔 일은 없다. 훙커우 의거 이후 상하이를 떠난 임정은 항저우에서 3년을 머물렀고, 1935년에는 난징과 자동차로 두 시간 거리에 있는 전장(鎭江)으로 옮겨갔다. 난징에 남은 임정의 자취들 당시 난징은 장제스의 국민당 정부 수도였으므로 임정도 난징으로 가는 게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임정이 난징 대신 전장으로 옮기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은 일본의 협박 때문이었다. 일본 해군은 난징 성안에 임정 청사를 두면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가 난징을 폭격하겠다고 을러댔던 것이다. 청사는 전장에 두고 임정 요인들은 대부분 난징에 거주했다. 뤄양(洛陽)의 군관학교에 한인특별반을.. 2019. 3.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