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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⑦]‘주화매국’ 화강암에 새긴 척양(斥洋)의 의지

by 낮달2018 2022. 2.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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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⑦]구포동 구미 척화비(斥和碑)

▲ 구미 척화비는 구포동의 구미 3공단에서 구미 2공단으로 넘어가는 솔뫼 고개의 도로변에 있다.

구미 척화비는 구포동 산 52-1번지에 있다. 2020년 9월 첫 방문 때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갔지만, 찾기가 쉽지 않았다. 빗돌은 구미시 구포동의 구미 3공단에서 구미 2공단으로 넘어가는 솔뫼 고개의 도로변에 있지만 비탈에 드러나지 않게 돌아앉아 있기 때문이었다.

 

흥선대원군이 1871년에 서울과 전국 각지에 세운 척화비

 

척화비는 흥선대원군이 1871년, 서울과 전국 각지의 길가에 세우도록 한 빗돌이다. 비석에는 “서양 오랑캐가 침입하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하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다(洋夷侵犯 非戰則和 主和賣國)”의 12자는 큰 글자로, 그 옆에 “우리 만대 자손에게 경고하노라!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운다(戒我萬年子孫 丙寅作 辛未立)”는 작은 글자로 새겼다.

 

19세기 중엽 이래, 조선은 안으로는 각지에서 일어난 민란으로, 밖으로는 서양 각국의 계속되는 통상 요구 등의 위협에 직면해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정권을 잡은 고종의 부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은 전제 왕권을 강화하고자 과감한 개혁에 나섰다. 그는 무너진 정치 기강을 바로 세우고,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애썼고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여 국방도 튼튼히 하였다.


1866년(고종 3) 흥선대원군의 천주교 탄압에 대한 보복으로 프랑스군이 강화도에 침입한 병인양요(丙寅洋擾)가 일어났다. 1866년 초에 대원군이 천주교 금압령을 내려 프랑스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수천 명을 학살한 ‘병인박해’의 결과였다.

 

프랑스는 주중(駐中) 프랑스 함대 사령관 로즈(Roze, P.G)의 주재하에 군사적 응징 원정을 단행했다. 로즈는 강화해협을 중심으로 서울까지의 수로를 탐사하기 위한 예비적 탐사 원정을 마친 뒤, 10월 11일 2차 원정에 착수했다.

 

프랑스군의 강화도 침입, 병인양요(1866)

 

로즈는 10월 16일에 강화부를 점령하고, “동포 형제를 학살한 자를 처벌하러 조선에 왔다.”라는 내용의 포고문을 발표했다. 그는 “조선이 선교사 9명을 학살하였으니, 조선인 9,000명을 죽이겠다”라며 강경한 응징 보복 의지를 드러냈다.

▲ 정족산성 전투를 지휘한 양헌수 장군
▲ 정족산성. 병인양요 때 이곳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프랑스 함대가 물러갔다. ⓒ 우리역사넷

조선은 순무영(巡撫營)을 설치, 프랑스군의 침략에 맞섰다. 강화부를 점령한 프랑스군은 10월 26일 문수산성 전투에서 강력한 화력으로 조선군을 압도하였다. 이때 양헌수(1816~1888)는 화력의 절대 열세를 극복하고 적을 제압하려면 기병(奇兵) 작전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심야에 강화해협을 건너 정족산성에 잠입해 프랑스군의 내습을 기다렸다.

 

조선군을 얕잡아 본 프랑스군 160명이 경무장으로 산성을 공략하자, 조선군은 포격으로 이를 격퇴해냈다. 전사자 6명 포함, 6, 70명의 사상자를 내고 프랑스군은 퇴각했다. 조선군의 피해는 전사 1명, 부상 4명에 그친 이 전투가 정족산성 대첩이다.

 

흥선대원군은 “서양 오랑캐가 침입해 오는데 그 고통을 이기지 못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팔아먹는 것이며, 그들과 교역하면 나라가 망한다”라는 내용의 글을 반포, 쇄국 의지를 강하게 천명하였다. 조선은 프랑스의 침입에 강력하게 대응함으로써 프랑스군을 물리칠 수 있었다.

 

미국 아시아 함대의 강화도 침입, 신미양요(1871)

 

그러나 5년 후, 1871년(고종 8)에는 미국 아시아 함대가 강화도에 쳐들어왔다. 1866년 8월 평양 대동강에서의 제너럴셔먼(General Sherman)호 사건을 계기로 조선의 개항 문제에 적극적인 관심을 두기 시작한 미국은 조선의 개항을 끌어내려 조선 원정에 나선 것이었다. 조선은 서양 각국의 계속되는 통상 요구를 침략 위협으로 보고 이에 응하지 않고 있었다.

 

6월 2일 서울로 가기 위한 수로를 탐색한다는 구실로 미국은 강화해협의 탐측 항행을 강행하였다. 함대가 손돌목에 이르자 연안 강화포대로부터 기습공격을 받아 조·미간에 최초로 군사적 충돌사건이 벌어졌다. 이에 미국은 평화적 탐측 활동에 대한 포격은 비인도적 야만 행위라며 협상과 사죄·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조선은 미군 함대가 조선의 정식 허락 없이 항행한 것은 주권 침해요, 영토침략행위라고 규탄하면서 협상 및 사죄를 단호히 거부하였다. 이에 미국은 6월 10일 초지진 상륙작전을 단행하였다. 역사상 최초로 조미(朝美)전쟁이 시작된 것이었다.

▲ 신미양요 때 미군에게 점령당한 광성보 용두돈대 ⓒ 문화유산채널

미군은 함상 함포사격으로 초지진을 초토화하고 점거하였다. 이어 덕진진을 무혈 점거한 뒤, 마지막으로 광성보 작전을 수행하였다. 광성보에는 어재연(1823~1871)이 이끄는 조선 수비병 600여 명이 배치되어 있었다. 미군은 수륙 양면 포격을 한 시간 벌인 끝에 광성보를 함락하였다. 조선군은 치열하게 저항하였으나 화력 열세로 전멸에 가까운 피해를 남기고 덕포진으로 패퇴하였다.

 

조선은 전쟁에서 패배했으나 미군의 철수를 ‘패퇴’로 간주

 

전투에서는 대승을 거두었으나 무력으로 강제 개항을 시도한 미국의 침략은 실패로 끝났다. 미국은 대원군의 강력한 쇄국양이(鎖國攘夷) 정책에 부닥쳐 조선 개항을 포기하고 7월 3일 함대를 철수하였다. 조선은 전쟁에서 패배했지만, 미군 함대의 철수를 패퇴로 간주하였다.

 

미국이 철군하자,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력히 추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하였다. 이에 따라 서울 종로 네거리와 성균관 그리고 전국 각지에 척화비를 세웠다. 먼저 종로에 비를 세우고 이를 탑본하여 전국 각지에 내려보내는 방식이었다. 척화비는 두 차례 양이(攘夷)를 물리친 대원군이 강력한 통상 수교 거부의 의지를 드러내고, 전국적인 척양(斥洋) 의지를 집결하려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고종(재위 1863~1907) 또한 척화비 건립에 동의하면서, “이 오랑캐들이 화친하려고 하는 것이 무슨 일인지는 알 수 없으나, 수천 년 동안 예의를 지켜 온 나라로서 어찌 금수 같은 놈들과 화친할 수 있단 말인가? 비록 몇 년 동안 서로 대치한다고 하더라도 단연코 거절할 것이다. 만약 화친하자고 말하는 자가 있으면 매국(賣國)의 법을 적용할 것이다”라고 하여 서양 열강과의 항전 의지를 강하게 드러내었다.

▲ 종로에 세웠다가 현재 중앙박물관에 보관중인 척화비(왼쪽)과 경주에 세운 척화비
▲ 경북 영주시 순흥면사무소의 척화비(왼쪽)과 군위군 군위읍 역사문화체험 테마공원의 척화비

척화비는 임오군란(1882) 직후 일본 공사의 요구로 철거되었다. 임오군란으로 대원군이 청나라에 납치된 후인 1882년(고종 19년) 8월 5일 고종은 “이미 서양과 수호(修好)를 맺은 만큼 서울과 지방에 세운 척양(斥洋)에 관한 비석들은 상황이 달라졌으니 모두 뽑아 버리도록 하라”라고 명을 내린 것이다.

 

이처럼 척화비를 세운 1871년부터 철거 때까지 11년 동안 조선은 강화도 조약, 개항 반대 운동, 미국과의 조약 체결, 임오군란 등을 거치면서 ‘쇄국’에서 ‘개국’으로 대외 인식과 정책 전환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척화비 철거는 곧 대원군의 정치적 퇴장을 의미했다.

 

척화비의 높이는 서로 차이가 있어 부산의 것은 1.8m이지만, 함양군 함양읍의 것은 1.2m이다. 그러나 대체로 너비는 40∼45㎝이고, 두께는 25㎝ 정도이다. 화강암으로 만들었고, 귀부와 이수를 갖추지 않은 통비(通碑) 형태다.

▲ 구미 척화비의 비문. 12자만 제대로 보인다.

구미 척화비는 칠곡 사람(당시 구포동은 칠곡)들이 서울로 드나드는 길목인 현 위치에 세웠다. 현재 남아 있는 전국의 척화비 가운데 유일하게 자연석 화강암에다 비문을 새겼다. 바위는 높이 175㎝, 너비 186㎝인데, 비석 부분은 높이 115㎝, 너비 50㎝다.

 

전체 바위는 그대로 두고 한쪽 면을 평평하게 깎아내고 비문을 새겼다. 임오군란 이후에 다른 지역 척화비가 거의 다 부서지거나 땅에 묻혔지만, 자연석을 활용한 구미 척화비는 그 형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한 석공이 이 비석 바위를 다듬어 상석을 만들려고 했는데 주민들의 만류로 그대로 두었다고 한다.

 

해외시장 개척에 나선 열강, 조선의 ‘개항’ 요구

 

근대 구미 자본주의 국가들은 19세기 들어 산업혁명을 끝내고, 과잉 생산 문제를 해결하고자 해외시장 개척에 나섰다. 이들은 중국과 일본을 자본주의 세계시장에 편입하고 마지막 남은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대원군은 위정척사사상에 따라 단호한 쇄국정책으로 자본주의 국가들의 침략을 저지하려 했다. 그는 중국이 아편전쟁과 태평천국의 난 등으로 위태로워진 것은 문호 개방 탓이라고 생각했고, 왕조를 수호하려면 외부의 영향을 차단하는 수밖에 없다고 믿었다. 프랑스와 미국과 전쟁을 벌인 것은 그러한 정책 아래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나 위정척사사상의 바탕은 봉건 지배계급의 배타적인 주자학 이데올로기였다. 쇄국정책은 새롭게 성장하는 민중 세력의 반봉건 항거를 봉쇄하고 봉건왕조의 존속을 꾀하고자 하는 지배계급의 이해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나 새로운 역사적 주체로 성장한 민중에게 봉건적 지배 질서는 청산해야 할 역사적 장애물이었을 뿐이었다.

 

따라서 이 시기 조선이 맞닥뜨린 역사적 과제는 외국의 선진 과학기술을 받아들여 나라의 부강 발전과 근대화를 실현하고 외부 침략자들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쇄국만이 봉건왕조를 수호할 수 있다고 믿었던 대원군은 나라의 빗장을 닫아걸어 국제적 위기를 심화했다.

▲ 흥선대원군 이하응. 그는 쇄국만이 왕조를 지킬 수 있다고 믿었다.

결국 1873년 대원군이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축출된 뒤 쇄국정책도 그 명운을 다했다. 1876년 일본과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 이래, 미국(1882), 영국·독일(1883), 이탈리아·러시아(1884), 프랑스(1886)와 수호 통상 조약을 차례로 체결하며 개항이 이루어진 것이다.

 

대원군의 퇴장으로 쇄국정책도 끝

 

그러나 침략적 의도로 접근한 일본과 불평등 조약을 맺고 개항함으로써 열강 침투의 길을 열어 준 결과가 되었다. 그로부터 조선은 근대국가로 나아가려 했지만, 20세기 초반에 일본의 식민지로 편입되면서 역사에 일찍이 없었던 시련을 겪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뒤, 한국인들은 35년간의 식민지 시대를 거쳐 6·25전쟁까지 치르는 고단한 근대사를 헤쳐와야 했다. 근대화의 역정을 통해 값비싼 수업료를 내야 했던 한국인들은 그로부터 150년 후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이 되었다. 정치 사회적 역동의 시대를 슬기롭게 극복해온 한국은 마침내 오랜 개발도상국 시대를 끝내고 선진국에 진입했다.

 

역사 발전의 과정에서 보면, 19세기 십여 년을 풍미한 쇄국의 상징 ‘척화비’는 근대화의 길목에서 조선이 어쩔 수 없이 겪어야 했던 성장통이었던 셈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당시 서양 오랑캐[양이(洋夷)]들과 친선뿐 아니라, 동맹으로 서로 돕고 깁는 관계를 유지하는 동반자가 되었다.

 

 

2022. 2. 19.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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