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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⑧] 청백리 짚신 건 선돌, 이제 무심히 지나는 바위 되었네

by 낮달2018 2022. 2.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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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 구미시 진평동의 인동입석. 왼쪽이 출포함, 오른쪽이 짚신 건 바위, '괘혜암'이다.

입석(立石)은 우리말로 ‘선돌’이라고 부른 돌기둥이다. 학술적으로는 “선사시대에 땅 위에 자연석이나 그 일부를 가공한 큰 돌을 하나 이상 세워 기념물 또는 신앙대상물 등으로 삼은 돌기둥 유적”이라고 정의한다.

  

입석은 선사시대에는 주로 고인돌[지석묘(支石墓), dolmen] 주변에 세워 묘의 영역을 나타냈다. 역사시대에 와서는 마을 입구에 세워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표시했고, 토착 신앙과 합쳐져 장수를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였다.

▲ 도둑 잡는 바위, 출포임. '대정기념비'가 '대한민국건국기념'으로 바뀌었다.

비보풍수(裨補風水)와 인동입석 출포암

 

안동 입석은 진평동 627-4번지, 진평동사무소 맞은편에 있다. 원래 3기가 세워져 있었지만, 현재는 2기만 남았다. 정면에서 볼 때 왼쪽 입석이 ‘출포암(出捕岩)’이라 불리는 선돌인데, 그 뜻이 ‘도둑을 잡는 바위’라는 뜻이다. 옛날 인동에 관아를 설치할 때 지관(풍수지리설에 따라 집터나 묏자리 따위를 가려서 고르는 사람)이 “이 마을은 마을로서 적당하지 않다”라고 하였다.

 

이유는 동쪽의 산이 고개를 내밀어 마을을 집어삼킬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도둑이 남의 집에서 물건을 훔치려고 들여다보는 형국이라 여기에다 고을을 정하면 오래 못 가고 이내 망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고을 원이 도둑이 넘보는 풍수를 방비할 방법을 물었고, 지관은 고을 입구 세 군데에 바위 세 개를 세우라고 했다.

 

이에 비보풍수로 세워진 바위가 안동 입석이다. 비보(裨補)란 신라 말 도선(道詵)의 비보설에서 비롯한 것으로 ‘풍수에서 부족한 땅의 기운을 인위적으로 보충’해 주는 것이다. 문자 그대로 도둑이 넘볼 수 있는 풍수를 세 개의 바위가 ‘돕고 깁는다[裨補]’는 뜻이다.

 

출포암은 화강암 재질로 높이 약 2.5m, 너비 73cm, 밑동의 둘레가 2.5m의 크기이다. 출포암에는 일제강점기에 일본인이 ‘大正紀念碑(대정 기념비)’라 새겨놓은 것을 해방 후에 ‘大韓民國建國記念(대한민국 건국 기념)’으로 고쳐 새겼다.

▲ 괘혜암. 한자로 괘혜암이라 새긴 옆면에 사연이 새겨져 있다.
▲ 짚신을 건 바위라는 뜻의 '괘혜암'(왼쪽)은 선조 때 새겼고, 오른쪽 측면의 사연은 1937년에 새긴 것이다.

오른쪽 바위는 ‘신걸이 바위’, 말 그대로 ‘신을 건 바위’다. 한자로 ‘‘괘혜암(掛鞋岩)’이라 불리는데, ‘문화재청 국가 문화유산 포털’(문화재 정보 관리는 구미시)과 <위키백과>에서는 ‘신 혜(鞋)’ 자를 잘못 읽어 ‘괘혁암’이라고 쓰고 있다.

 

괘혜암의 앞면에는 한자로 ‘괘혜암’이, 뒷면에는 ‘인동수구석(仁同水口石)’, 오른쪽 옆면에는 ‘괘혜암’이라 부르는 사연이 새겨져 있다. 괘혜암은 ‘짚신을 걸어두었던 바위’라는 뜻으로, 이 사연은 1584년에 인동 현감으로 부임해 선정을 펴다 같은 해 12월 이임한 이등림(1535~1594)의 일화에서 비롯하였다.

 

입석에 건 짚신, ‘청백’과 ‘박절’ 사이

 

칠곡 출신의 문신 이등림(李鄧林)은 본관이 벽진으로 학문이 깊었다. 동강 김우옹(1540~1603), 한강 정구(1543~1620) 등과 교유한 그는 뒤에 벼슬이 공조좌랑에 이르렀다. 임기를 마치고 인동을 떠날 때 여종이 새 짚신을 신고 있었다. 여종이 맨발로 길을 나서니 딱하게 여긴 아전이 건네준 것이었다.

 

이에 이등림은 그럼 그게 관의 물건이 아니냐, 신을 벗어 길가 바위에 걸어두라 하고 길을 떠났다. 조선 선조 때 마을 사람들이 그의 청백(淸白)을 기려 ‘괘혜암’ 석 자를 바위에 새겼고, 그 사연은 350여 년이 지난 1937년에 괘혜암의 오른쪽 측면에 새겨졌다.

 

사람들은 그걸 청백으로 길이 기리고자 바위에 글자를 새겼지만, 되짚어 여종의 처지에서 보면 야박하기 이를 데 없다. 이임하는 수령이야 가죽 신발에 말이나 교자를 탈 테지만, 수백 리를 맨발로 걸어가야 하는 여종에게 그것은 얼마나 인색하고 박절한 처사였을까.

 

관의 물자를 허투루 쓰는 건 외려 벼슬아치로서 누리는 여러 가지 편의를 서로 주고받는 형식으로 나누는 양반들에게 빈번했다고 하니 말이다. 한쪽에서는 ‘청백리’와 그들이 지켰던 도덕과 윤리를 기리지만, 조선시대는 ‘청탁’을 ‘인정’으로 여긴 시대였다. [관련 글 : 열일곱 아들 때문에조선 양반이 보낸 욕망의 편지]

 

양반이나 벼슬아치들은 주로 편지로 온갖 형식의 청탁을 주고받았는데, 그걸 들어주는 것은 그들 양반사회의 사회관계망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이었다. 청탁하는 쪽도 받는 쪽도 ‘부정’에 대한 인식은 없었으니, 지나치지 않은 청탁은 ‘인정(人情)’이라고 여긴 시대였기 때문이다.

 

‘인동수구석’에 담긴 뜻

▲ 괘혜암 각자 뒤편에는 '인동수구석'이라는 글자를 새겨놓았다.

바위에 새긴 글자 가운데 흥미로운 것은 ‘인동수구석’이다. ‘수구(水口)’는 “하수도나 저수지 따위에서 물을 끌어들이거나 흘려 내보내는 곳”, 또는 “풍수에서 득(得)이 흘러간 곳”을 이르는 말이다. <한국민속대백과사전>에서 ‘수구맥이’는 풍수지리설에서 마을 어귀에서 수구를 막는 특정한 신격을 지칭한다고 풀이한다. 특히 경상도 지방에서는 마을 어귀의 거리 신을 ‘수구맥이’라고 하는데 이 신은 수구를 막고 허(虛)한 방위를 보완하는 구실을 한다.

 

수구맥이는 마을 어귀에서 수구를 막고 허한 기운을 보하는 비보 장승을 비롯한 마을의 비보풍수와 깊은 관련이 있는데, ‘인동수구석’은 바로 비보 장승이나 비보 선돌을 대신한 바위로 여김 직하다. 실제로 전북 순창군 동계면 구미리에 ‘수구막이 선돌’이 있다.

▲ 높이 4.5m, 밑둘레 2m로 국내 최대인 신동(칠곡군 지천면) 선돌(왼쪽)과 전북 순창의 구미리의 '수구막이 선돌'

수구막이는 수구(水口)를 막아 주는 기능을 한다는 풍수지리적 용어이다. 수구막이는 주로 숲이나 선돌을 이용하는데, 구미리에는 두 개의 선돌이 수구막이 기능을 하고 있다. 인동수구석이 그런 역할을 한다고 보려면 주변에 물길이 있어야 하는데, 인동입석이 원래 서 있던 자리는 원래 낙동강 강변의 드넓은 하안대지(河岸大地)였다고 하니 얼추 맞아떨어지는 듯한 느낌이 있긴 하다. 그러나 그런가 보다 할 뿐 그 진위 여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까마득한 선사시대에 고인돌의 영역을 나타냈든, 역사시대 이후에 마을 입구에서 귀신을 막거나 경계를 표시했든 토착 신앙과 어우러져 장수를 비는 신앙의 대상이 되었든 이제는 다 옛이야기다. 이 21세기의 사람들은 무심코 거기 무슨 곡절 있는 바윗덩이가 있다는 얘기를 귓등으로 흘리며 분주히 주변을 오가고  있을 뿐이다.

 

 

2022. 2. 26.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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