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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선산 톺아보기 ⑤] 구미 의우총 이야기, 소의 의로움이 이와 같았다

by 낮달2018 2022.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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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⑤] 봉곡동 ‘의우총(義牛塚)’ 빗돌과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 봉곡도서관 구내의 '의우총' 빗돌

가끔 들르는 우리 동네의 구미 시립 봉곡도서관 구내에는 돌비가 두 기 서 있다. 하나는 고종 연간에 세운 구황불망비(救荒不忘碑)고 다른 하나는 ‘의로운 소의 무덤’이라는 ‘의우총(義牛塚)’ 비석이다. 개의 경우는 ‘의견(義犬)’, 또는 ‘의구(義狗)’라 하여 무덤으로 기리는 예가 있지만, “웬 소?” 싶으면서도 무심코 지나다닌 지 여래 해가 지났다.

 

의견 설화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거나 은혜를 갚는 개에 관한 설화”(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로 전국에 분포해 있다. 그중 가장 지배적인 유형은 ‘들불을 꺼 주인을 구한다는 유형’, 이른바 ‘진화구주형(鎭火救主型)’이다. 술에 취한 주인이 들판에서 잠들었는데 불이 나자, 개가 제 몸을 물에 적셔 불을 꺼서 주인을 구하고 난 뒤 지쳐서 숨진다는 이야기다.

 

의견 설화 속 개는 인간만이 가지고 있다는 지(智)·인(仁)·용(勇)을 갖추어 사람보다도 낫다는 칭송을 듣는 인격화된 짐승이다. 인간에게도 쉬 요구하기 어려운 자기희생, 주인을 구하고자 목숨을 버리는 이들의 충의(忠義)에 인간은 빗돌을 세워 그를 기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빗돌의 주인공은 소다. 그러다 가만 생각해 보니 군위로 가는 산동면 인덕리 25번 국도변에서 ‘의우총’ 팻말을 본 듯해 <금석문으로 읽어보는 구미·선산 이야기> 책자로 확인해 보니 둘은 서로 다른 소의 무덤이다. 소의 무덤을 지은 예는 구미 말고는 다른 지방에서는 거의 보이지 않았다. 농가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가축인 소의 무덤이 구미에서만 두 기나 있는 것이다.

 

봉곡동 의우총 빗돌

▲ 봉곡도서관 구내의 '의우총' 빗돌. 뒤쪽 누각은 효자 이명준의 정려각이다.

봉곡동의 ‘의로운 소’는 조선 말기 지역에 살던 여양 진씨(陳氏) 진숙발의 처 밀양박씨가 거둔 소였다. 밀양박씨는 가난한 데다 일찍이 홑몸이 되어 암소 한 마리를 기르며 살았다. 그런데 어느 날 암소는 송아지를 낳은 지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밀양박씨는 어미 잃은 송아지를 불쌍히 여겨 흰죽과 나물죽을 끓여 손에 발라 송아지가 핥게 하였다. 간혹 보리죽도 먹여가며 기른 송아지는 무럭무럭 자라 큰 소가 되어 2년 동안 박씨 부인과 함께 논밭을 갈았다. 늙은 박씨는 세상을 떠나기 전에 소를 인근 김천 개령 사람에게 팔았다.

 

밀양박씨의 장례를 지내는 날 상여가 출발하려 할 때 웬 암소 한 마리가 상여 앞으로 달려들어 눈물을 흘리더니 미친 듯이 부르짖기 시작했다. 바로 개령에 팔려 간 소가 우리를 뛰어넘어 30리 길을 달려온 것이었다. 소는 미친 듯 날뛰다가 상여 앞에서 기진해 죽고 말았다.

 

일찍 어미를 잃은 자신을 돌보고 키워 준 주인 박씨의 죽음을 온몸으로 슬퍼하다가 기진해 숨진 것이다. 소의 기특함과 기이함에 마을 사람들은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 자신의 목숨을 거두어 준 주인에 대한 소의 의로운 행동은 인간의 충의에 못지않은 것이었다. 사람과 짐승은 그 근본이 다른데도 그 의(義)가 다르지 않아 기이하게 여긴 것이다. 사람들은 죽은 소를 밀양박씨의 무덤 아래에 묻고, 표석(表石)을 세웠다.

▲ 빗돌 앞면에는 '사실 재읍지(事實在邑誌)와 세운 날짜를 각각 새겨 놓았다.

길러준 옛 주인에 대한 의열(義烈)이 인간의 충의에 못지않아 의를 행하고 순사(殉死)한 의로운 소의 의행(義行)을 기념하고자 1867년(고종 4) 무덤을 마련하고 비를 세웠다. 비는 자연석을 다듬어 상부를 귀접이(석재의 모서리를 깎아 내어 둥글게 하는 일)한 규형비(圭形碑)로 높이 105㎝, 너비 40㎝, 두께 9㎝의 사암(沙巖)으로 조성했다.

 

비석 앞면에는 해서체(楷書體)로 ‘의우총(義牛塚)’이라 새겨져 있다. 양옆으로 읍지에 그 내용이 실려 있다고 ‘사실 재 읍지(事實在邑誌)’, ‘정묘 팔월 일립(丁卯八月日立)’이라 각각 새겨 놓았다. 이 비석은 봉곡동 미실산에 지름 1.6m 정도의 봉분과 함께 남아 있었으나 주거 단지 개발로 봉분은 없어졌다. 빗돌은 도시 계획에 따른 구획 정리 작업으로 봉곡동 녹지 지구 솔밭에 옮겼다가 다시 봉곡도서관 구내에 재조성되었다.

 

산동면 인덕리 의우총

▲ 조그만 자연석에 새긴 '의우총' 글자가 희미해졌다.
▲ 의우총 전경. 뒤쪽 건물은 엘에스(LS)전선 기숙사인 선인재 건물이다.

구미시 산동면 인덕리, 엘에스(LS) 전선 기숙사인 ‘선인재’ 정문  정문 오른쪽에 있는 의우총은 경북 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소 무덤이다. 묘를 설치한 연대는 확실하지 않으나 조선 인조 연간(1623~1649)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1703(숙종 29) 선산 부사 조구상(1645~1712)이 펴낸 <의열도(義烈圖)>에 전임 부사(府使) 조찬한(1572~1631)이 쓴 의우도서(義牛圖序)’에 유래담이 전한다.

 

<의열도>는 ‘의로운 소’와 ‘열녀 향랑(香娘)’의 이야기를 담은 1권 1책의 목판본이다. 내지에는 호랑이로부터 주인을 구한 소[義牛]를 그린 그림 8장과 이 사건의 경위를 적은 조찬한의 서문을 수록했다. 또, 남편에게 학대받고 억울하게 세상을 뜬 향랑(香朗) 이야기를 그린 그림 2장과 이 경위를 쓴 선산 부사 조구상의 열녀도기(烈女圖記)’가 실려 있다.[향랑 관련 글 : 빗돌로 남은 두 여인, ‘열녀인가 주체적 여성인가]


조선 숙종 29년(1703)에 간행된 『의열도(義烈圖)』

▲ 선산부에서 간행된 책 <의열도>
▲ 의열도 속 선산 부사 조찬한(1572~1631)이 1630년에 쓴 '의우도서(義牛圖序)'

문수점(文殊店, 지금의 인덕리)에 사는 김기년이 암소 한 마리를 길렀는데 어느 해 여름, 이 소를 부려 밭을 갈고 있을 때였다. 갑자기 숲속에서 호랑이 한 마리가 뛰어나와 소에게 덤벼들었다. 기년이 당황하여 소리를 지르며 가지고 있던 괭이로 휘두르며 호랑이와 맞섰다.

 

호랑이는 소 대신 사람에게 덤벼들었다. 기년이 급하여 양손으로 호랑이를 잡고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소가 크게 우짖고는 뿔로 호랑이의 배와 허리를 떠받기 시작했다. 소의 끊임 없는 공격에 마침내 호랑이는 피를 흘리고 힘이 다하여 달아나다가 몇 걸음 못 가서 죽고 말았다. 기년은 다리를 여러 군데 물렸으나 정신을 차려 소를 끌고 집으로 돌아왔다.

▲ 의우총 돌비. 자연석에 한자로 '의우총'을 새겼다.
▲ 의우층 뒤쪽에는 가로 6.88m, 세로 0.8m, 폭 0.2m 크기의 화강암에 의우도를 새겨 보존하고 있다.

그러나 기년은 그로부터 20일 후에 이 상처로 말미암아 죽고 말았다. 죽기 전에 가족에게 “내가 호랑이에게 잡아먹히지 않고 살아남은 것은 누구의 힘이겠는가. 내가 죽은 후에도 이 소를 팔지 말고, 늙어서 스스로 죽거든 그 고기를 먹지 말며 내 무덤 옆에 묻어달라.”라고 이르기를 잊지 않았다.

 

소는 원래 물린 데가 없었고, 주인이 누워 있을 때는 스스로 논밭 일을 하더니 주인이 죽자 크게 울부짖고 마구 뛰며 쇠죽도 먹지 않더니 사흘 만에 죽고 말았다. 마을 사람들이 놀라 이 사실을 관에 알렸는데 인조 8년(1630) 부사 조찬한이 그 사실을 돌에 새겨 무덤가에 세우고 ‘의우총’이라 이르고 화공에게 8폭짜리 의우도를 그리게 했다.

 

의우총은 봉분과 비만 퇴락한 채 방치되어 있던 것을 1994년 선산군에서 봉분에 흙을 덧씌우고 깨끗하게 단장하여 뒷사람의 교육용으로 정비하였다. 비는 나지막한 자연석에 한자로 ‘義牛塚’을 새겼다. 봉분은 밑 둘레 지름이 2m가량 되며 무덤 뒤에 가로 6.88m, 세로 0.8m, 폭 0.2m 크기의 화강암에 의우도를 새겨 보존하고 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의우 설화는 모두 8가지 유형이 있는데, 이중 인덕리 의우 설화는 소가 호랑이를 물리쳐 주인을 구한 후 주인이 그 상처로 죽자 따라 죽었다는 이야기로 투호구주자진형(鬪虎救主自盡型)에 든다. 또 봉곡동 의우 설화는 소가 옛집에 찾아와 주인의 죽음을 애도하다가 죽었다는 이야기로 귀소조문자진형(歸巢弔問自盡型)이다.

상주의 의우 설화, 현대의 의로운 소

 

이웃 상주에도 의로운 소 이야기가 있다. <상주지>(1989)에 실린 의우 설화는 지금으로부터 100여 년 전 낙동강 강변에 살던 권씨 집안 이야기다. 암소가 새끼를 낳았는데, 10살배기 외아들 상복이 송아지를 어여삐 여겨 온갖 정성으로 길렀다. 송아지는 자라서 황소가 되었고, 상복은 서당에 갈 때마다 소를 타고 다녔다. 서당이 파할 때면 황소는 미리 서당 안으로 들어와 상복을 기다렸다.

 

어느 날 상복은 서당에서 늦게 귀가하게 되었는데, 난데없이 대호(大虎) 한 마리가 나타났다. 상복이는 너무 놀란 나머지 그만 잔등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호랑이와 황소의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다. 기절했던 상복이 눈을 뜨니 대호는 황소 뿔에 찔려 죽어 있었고 황소 역시 심한 상처를 입어 숨이 경각에 달려 있었다.

 

상복은 눈물을 흘리며 피투성이가 된 황소를 한동안 쓰다듬다가 집으로 달려갔다. 부모와 동네사람들이 현장에 와서 탄성을 금하지 못했다. 권씨 부부는 소를 묻어 주고 그 앞에 ‘의우총’ 비석을 세웠다. 소가 호랑이와 싸워 주인을 구하고 죽었다는 이야기로 투호살신구주형(鬪虎殺身救主型) 설화다.

 

의우는 20세기에도 현존했다. 상주시 사벌면 묵상리 서씨가 암소 한 마리를 사서 길렀다. 이웃집 김씨 할머니가 매일 외양간과 맞붙은 길목에 나와 외롭게 있는 소를 쓰다듬어 주고 주인이 없을 땐 먹이도 주며 따듯한 정을 나누었다.

 

그러다가 1993년 5월 할머니가 87세를 일기로 돌아가서 장례를 마친 이튿날 외양간의 암소가 사라졌다. 소는 집에서 약 2km 떨어진 산 중턱의 김씨 할머니 묘소에 가 있었다. 구부러진 들길과 수풀이 우거진 산길을 어떻게 찾았을까. 외양간을 나가본 적이 없던 소는 묘 앞에서 애도하듯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가까스로 달래어 마을로 데려왔는데 소는 우리로 가기 전에 할머니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듯 머리를 조아렸다. 가슴 뭉클한 소의 행동에 주인 서씨는 막걸리와 두부 배추 등으로 예를 갖추어 소를 접대했다. 이 소는 뒤에 임씨가 기르다가 19살의 노령으로 2007년 1월 할머니의 사진을 보며 눈을 감았다. 소는 꽃상여에 태워 경천대 박물관 옆에 의우총을 만들어 안장하였다.

 

이 말 못 하는 짐승이 던져준 교훈은 ‘동화책’으로도 나왔다. 메마른 인정 속에 무심하고 강파르게 살아가야 하는 이 세기의 동시대인들에겐 아픈 죽비로 다가오는 이야기다.

 

의로운 소 이야기를 했지만, 그에 비겨지는 인간의 저열한 모습은 따로 적지 않는다. 흔히 금수(禽獸)로 통칭하는 짐승은 인간의 부림을 받는 존재이면서도 더러는 인간 못잖은 의로움을 실천하기도 하여 인간에게 부끄러움을 환기한다는 점만 부기해 둔다.

 

2022. 2. 10. 낮달

 

[선산 톺아보기 프롤로그] 구미대신 선산인가

[선산 톺아보기 ①] 선산 봉한리 삼강정려(三綱旌閭)

[선산 톺아보기 ②] 형곡동 향랑 노래비와 열녀비

[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정사

[선산 톺아보기 ④] 옥성면 옥관리 복우산 대둔사(大芚寺)

[선산 톺아보기 ⑥] 선산읍 원리 금오서원

[선산 톺아보기 ⑦] 구포동 구미 척화비

[선산 톺아보기 ⑧] 진평동 인동입석(仁同立石) 출포암과 괘혜암

[선산 톺아보기 ⑨] 오태동의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선산 톺아보기 ⑩] 지산동의 3대 자선, ‘박동보 구황비와 계선각(繼善閣)

[선산 톺아보기 ⑪] 해평면 낙산리 삼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⑫] 선산읍 죽장리 오층석탑

[선산 톺아보기 ⑬]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

[선산 톺아보기 ⑭] 청화산 주륵사지(朱勒寺址) 폐탑(廢塔)

[선산 톺아보기 ⑮] 황상동 마애여래입상

[선산 톺아보기 ⑯] 해평면 낙산리 의구총(義狗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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