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시] 구미성리학역사관 특별기획전 “매학(梅鶴)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
구미성리학역사관의 특별기획전 “고산(孤山) 황기로 탄생 500주년 기념 – 매학(梅鶴)을 벗 삼아 펼친 붓 나래”에 들른 것은 우연이었다. 아내와 함께 역사관 앞 금오지(金烏池) 둘레길을 돌다가 역사관 앞을 지나는데 전시를 알리는 현수막이 눈에 띄어서였다.
고산 황기로(1521~1567)는 9년 전 구미에 옮겨와 인근 문화재를 찾아 나선 길에 처음 만난 매학정(梅鶴亭)의 주인이다. 고산은 낙동강 강변 언덕 아래 정자를 짓고 자연을 벗하며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냈다. 아호인 ‘고산’과 ‘매학정’은 중국 서호(西湖) 고산(孤山)에 매화를 심고 학을 길러 ‘매처학자(梅妻鶴子)’로 불리며 처사(處士)로 살았던 북송의 은둔 시인 임포(967~1028)의 삶을 동경해 붙인 이름이다.
역사관 여기저기에는 ‘고산’과 ‘초성’이 나란히 쓰인 현수막이 걸렸다. 애당초 나는 그를 매학정의 주인이고, 율곡의 아우 이우(李瑀, 1542~1609)를 사위로 맞은 이 정도로만 알았다. 그러나 전시관을 돌아보고 얻은 팸플릿과 소책자로 그가 초서로는 김구(金絿, 1488~1534)·양사언(楊士彦, 1517~1584)과 함께 제일이라는 평을 받았다는 걸 처음 알았다.
오늘날 글씨는 더는 인간의 평가하는 기준으로 쓰이지 않는다. 그러나 근대 이전에만 해도 중국 당나라 때 인재 전형 방식에서 유래한 ‘신언서판(身言書判)’이 사람의 내면과 외면세계를 두루 판단하는 기준이었다. 외모와 언변, 판단력과 함께 글씨를 그 인격을 드러내는 지표로 여긴 것이다.
통일신라 시대 ‘신품제일(神品第一)’이라 불린 김생을 비롯하여 조선조의 안평대군, 석봉 한호, 추사 김정희 같은 ‘명필’을 꼽고 이들의 글씨를 그 전범으로 기리는 까닭이 거기 있다. 물론 그 궁극의 지향은 추사가 이른, “책을 많이 읽고 교양을 쌓으면 그림과 글씨에서 책의 기운이 풍기고 문자의 향기가 난다”[문자향(文字香) 서권기(書卷氣)]는 경지일 터이다.
구미시 고아읍 예강리에서 태어난 고산은 1534년 사마시에 합격하였으나 부친 황이옥이 조광조를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사판(士版 : 벼슬아치 명단)에서 삭제된 일로 인해 평생 벼슬에 나아가지 않았다. 그가 처한 개인적 상황이 그가 글씨와 술로 일생을 보내고, 초서의 대가로 거듭난 배경인 셈이다.
그는 슬하에 딸 하나만 두었는데, 딸은 이율곡의 아우이자 시서화에 거문고를 잘하여 4절(四絶)이라 불린 이우와 혼인했다. 장인 못지않게 글씨에 능했던 이우는 ‘옥산서병(玉山書屛)’ 같은 글씨를 남겼다. 사위의 서법을 일러 “장대함은 나보다 낫고 미려함은 미치지 못한다”라고 한 고산은 매학정을 이우에게 물려 주었다.
고산은 초서(草書)에 능해 ‘해동초성(草聖)’으로 불리었다. 초서는 “행서(行書)를 속사(速寫)하기 위하여 짜임새와 필획을 생략하여 곡선 위주로 흘려 쓰는 한자 서체”(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다. 황기로는 김구·이황·양사언·한호 등과 함께 동진의 서예가 왕희지(303~361) 풍(風 : ‘양식’의 뜻)의 전통적 초서를 바탕으로 하면서도 회소(懷素·725~785) 풍의 초서 양식을 이루었다.
당나라의 승려 서예가 회소의 초서는 기이한 변화와 펼침이 자유로웠고 “용필(用筆)이 돌풍이 불고 벼락이 치는 형세가 있어 ‘광소(狂素)’”라고도 불리었다. 17세기 서예가 미수 허목이 “황기로의 초서 대자(大字) 같은 경우는 귀신조차도 피하여 달아나게 할 정도”라고 한 것은 그러한 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의 초서는 근대 서예가 위창 오세창이 소장한 ‘초가서행’ 발문에서 “초서 필법이 신비롭고 기이하여 마땅히 우리나라의 종장(宗匠)으로 삼는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고산의 초서 작품 가운데 ‘이군옥시’와 ‘차운시’는 각각 보물(제1625-1, -2)로 지정되었다. 그는 암각서로 금오산 암벽의 ‘금오동학(金烏洞壑)’을, 영주 소수서원의 ‘경렴정(景濂亭)’과 안동 ‘귀래정(歸來亭)’의 현판을 썼다. 유묵첩으로 1549년에 회소의 글씨를 찬미한 이백(李白)의 시를 초서로 쓴 ‘초서가행(歌行)’이 석각본과 목각본으로 간행되어 전한다.
매학정 황기로는 초서로 일가를 이루고 초성으로까지 불리었지만, 마흔여섯에 세상을 떠났다. 취흥에 겨워 글씨를 썼다는 기록이 적지 않은 그의 삶을 율곡 이이가 만시(輓詩)에서 “묵향(墨香)에 취하고 술잔 기울인[취묵감상(醉墨甘觴)] 오십 년 세월”이라 한 것은 굳이 과장이랄 수 없겠다.
2020년 10월 개관한 구미성리학역사관은 제1종 전문박물관으로 등록한 공립박물관이다. 40만 인구의 구미에서 처음 마련한 박물관이지만, 아직 시민의 사랑받는 문화 시설이 되었다고 하긴 어려울 듯하다. 그건 개관한 지 얼마 되지 않아서가 아니라 ‘성리학’이란 주제가 어렵고 낯설기 때문이다.
올해는 고산 황기로 탄생 500주년이지만, 그는 시민들에게 가까운 인물도 아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이나 익숙하지 야은 길재는 물론, 근대 인물인 왕산 허위도 잘 알지 못하는 시민들이 적지 않기 때문이다. 낙동강 강변에 세워진 정자지만 매학정을 알거나 찾아본 시민들도 많지 않을 것이다.
기념관은 저수지 금오지 가에 있다. 금오지 둘레길로 숱한 시민들이 걷지만, 그들은 무심히 기념관 앞을 스쳐 지나갈 뿐이다. 오전이긴 했지만, 우리가 전시관을 찾았을 때도 관람객은 보이지 않았다. 박물관을 놀이시설과 견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그들의 발길을 잠시라도 붙드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보이지 않는 관념 성리학이 아니라, 눈에 보이는 글씨로 고산을 소개하고, 그 시대를 불러내는 것은 어쩌면 시민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는 방법이 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오늘날 한글도 아닌 한문 서예에 관한 관심을 끌어올리기는 쉽지는 않은 일이겠지만.
기념관에서는 고산 전시회에 팸플릿 말고도 12쪽의 소책자 <해동초성 고산 황기로>를 발간하여 관람객의 이해를 돕고 있다. 팸플릿과 소책자는 누리집(www.gumi.go.kr/museum/)에서도 피디에프(PDF)로 내려받을 수 있다. 멀리 있는 이들도 누리집으로 고산 황기로와 그의 초서를 만날 수 있다는 뜻이다.
요즘 금오지 주변에 천천히 가을이 스며오고 있다. 잔잔한 수면 위로 드리운 산과 하늘, 정자의 반영이 아름답다. 비록 데크로 만든 길이긴 해도 산과 맞닿은 길을 걷다 보면, 마치 숲과 물의 경계를 넘나들며 걷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황기로 전은 10월 31일까지 열린다. 곧 한가위, 구미 일원으로 귀향하는 이들은 금오지를 찾아보시라. 주변 풍광을 즐기면서 둘레길을 걷다가 성리학역사관이 나오면 망설이지 말고, 기획 전시관에 들러 ‘해동초성 고산 황기로’의 초서를 감상하시라.(추석 당일은 휴관) 글씨로나마 선인의 삶과 시대를 들여다보는 옹글고 알찬 한가위를 보낼 수 있으리니.
- 전시 기간 : 2021.8.3.(화) ~ 10.31.(일) ※ 매주 월요일, 추석 당일, 대체공휴일 다음 날 휴관
- 관람 시간 : 09시부터 18시까지
- 전시 장소 : 구미성리학역사관 기획전시관(경북 구미시 금오산로 336-13)
- 문 의 : 054-480-2681~2687 (구미성리학역사관 사무실)
2021. 9. 1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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