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관의 문화재 ②] 구미시립 중앙도서관의 이맹전 유허비
도서관에 가면 ‘문화재’가 있다고 하면 어리둥절해할지 모르겠다. 그러나 경북 구미에 있는 시립도서관 여섯 군데 중 세 곳이 그렇다. 원래 다른 데 있던 빗돌인데, 도시개발로 제 자리를 잃고 옮겨온 것들이다. 지자체마다 이들을 따로 모아 관리하는데, 박물관이 없는 도시라, 도서관 뜰에 이들을 다시 세운 것으로 보인다. 이들 오래된 빗돌이 전하는 서사를 따라가 본다.
1994년, ‘시립도서관’이라는 이름으로 문을 연 구미시립 중앙도서관은 구미에서 두 번째로 문을 연 도서관이었다. 첫 도서관은 1986년에 개관한 경상북도립 구미도서관(지금은 경상북도교육청 구미도서관)이었다. 구미공단의 발전에 힘입어 구미가 시로 승격한 게 1978년이었으니 첫 시립도서관이 세워지기까지 16년이 걸렸다.
생육신 이맹전 유허비
이웃한 형곡 근린공원과 경계 없이 이어진 도서관은 공원 면적을 포함하면 1만 평이 넘는다. 공원 중앙에 비각 하나가 있는데, 생육신 중 한 분인 경은(耕隱) 이맹전(李孟專)의 유허비(遺墟碑)다. 유허비란 선현의 자취가 있는 곳을 길이 후세에 알리거나 이를 계기로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다.
엄밀히 따지면 이 유허비는 근린공원에 있지만, 유허비 관련 안내는 대부분 중앙도서관 경내에 있다고 소개한다. 그러나 그걸 굳이 바로잡아야 할 필요는 없다. 공원과 도서관은 의좋게 나무와 숲, 그리고 문화재를 공유하는 셈이니 말이다.
이맹전(1392~1480)은 본관은 벽진, 야은 길재의 제자다. 선산 출신으로 동향의 김숙자·김종직(1431~1492) 부자와 평생을 가까이 지냈다. 1427년(세종 9) 과거에 급제하여 1436년(세종 18) 정언에 임명되었고, 얼마 뒤 거창 현감이 되었는데, 선정을 베풀어 고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으며 청렴결백하다는 평판을 받았다.
1453년(단종 1) 수양대군이 단종을 보좌하는 황보인·김종서 등 대신을 죽이고 정권을 빼앗은 계유정난(靖難)이 일어나자 이맹전은 이듬해 벼슬을 버리고 선산으로 낙향하였다. 그는 장인인 직제학 김성미가 사는 선산 망장촌(구미시 고아읍 오로리)으로 내려와 은거하면서 스스로 ‘경은(耕隱)’이라 호를 썼으니, ‘밭을 갈며 숨어 지낸다’라는 뜻이었다.
‘청맹과니’로 산 청빈의 삶 30년, “물려줄 가업으로 가난만 한 게 있겠느냐”
이후 그는 아무도 만나지 않고 두문불출하면서 출사(出仕)하라는 조정과 주변의 권유를 한결같이 물리쳤다. 마침내 그는 “볼 수도 없고 들을 수도 없다”라고 하면서 세상을 등지고 침잠해 버렸다. 겉보기에는 눈이 멀쩡하나 앞을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라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찾아오는 이를 물리치고 이어간 은둔의 세월 30여 년간 그가 잊지 않고 챙긴 것은 매월 초하룻날에 의관을 정제하고 단종 유배지인 영월 쪽으로 예를 올리는 일이었다. 한양이 있는 북쪽으로는 앉기는커녕 고개조차 돌리지 않았다고 한다.
그간 그의 삶은 청빈을 넘어 궁핍했다. 남는 것은 낡은 집밖에 없겠다는 제자의 근심 어린 말에 그는 “물려줄 가업 중에 가난만 한 것이 있겠느냐. 걱정할 거 없다.”라고 받았다. 이맹전은 “내가 죽은 뒤에 비갈의 문자를 새기지 말라” 하고 89세에 세상을 떠났는데, 이때가 되어서야 비로소 자제들은 그가 일부러 청맹과니 행세를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이맹전은 왕위를 빼앗은 세조에게 한평생 벼슬하지 않고 단종에 대한 절의를 지킨 여섯 명의 신하, 즉 생육신으로 불린다. 생육신들은 세조의 찬위(簒位)를 불의로 단정하고 은둔하거나 방랑으로 일생을 보낸 이맹전을 비롯하여 김시습·원호·조려·성담수·남효온 등 여섯 신하다.
생육신은 1456년(세조 2) 단종의 복위를 도모하다가 죽은 박팽년·성삼문·이개·하위지·유성원·유응부 등 사육신에 대칭하는 이름이다. 이들 여섯 신하는 삶과 죽음으로 갈리긴 하지만, 나름의 방식으로 무도한 권력에 저항하고 절의를 지킨 이로써 그 경중을 다투기 어렵다.
중종반정(1506) 후 사림파가 등장하고, 사육신에 대한 새로운 평가가 나오면서 이들의 절의 또한 새로운 평가를 받게 되었다. 이맹전은 숙종 때 선산 월암서원 등에 제향 되었고, 1781년(정조 5) 이조판서와 시호 ‘정간(靖簡)’을 추증받았다.
유허비는 숙종 때에 선산 부사 김만증이 이맹전이 태어난 형곡에 비각과 함께 세웠다. 사각 받침돌 위로 몸돌을 세운 간결한 구조인데, 도시개발로 중앙도서관 옆으로 옮겨왔다. 이맹전은 해평면 금호리 미석산에 묻혔는데, 뒷날 세운 비석의 비문은 대산 이상정(1711~1781)이 지었다.
사육신 하위지, 이맹전과 함께 월암서원에 제향
생육신 이맹전을 낳은 구미는 사육신 하위지(河緯地, 1412~1456)의 고향이기도 하다. 본관이 진주, 호를 단계(丹溪)로 쓰는 하위지는 1438년 식년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부터 주로 집현전에서 일했다. 강직한 성품으로 권세에 굴하지 않는 기개를 보여주며 성장한 하위지는 계유정난 후 수양대군이 영의정이 되자, 조복을 벗어 던지고 선산으로 퇴거하였다.
1456년(세조 2) 김질의 고변(告變)으로 단종 복위 운동이 탄로 나 국문을 받게 되자 그는 “이미 나에게 반역의 죄명을 씌웠으니 그 죄는 마땅히 주살하면 될 텐데, 다시 무엇을 묻겠단 말이오.”라며 기개를 굽히지 않았다.
그는 1456년 6월(음력) 성삼문·이개·유응부·김문기·권자신 등이 군기감 앞에서 조정 대신들이 입회한 가운데 수레로 찢겨 죽임을 당하는 거열형(車裂刑)을 당했다. 그의 두 아들도 연좌로 죽임을 당했다. [관련 글 : 사육신,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으로 처형되다] 뒷날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1454~1492)은 자신의 문집 <추강선생문집>에 실린 사육신 전기 ‘육신전’에서 하위지의 인품을 다음과 같이 논평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했으며, 말이 적어 하는 말은 버릴 것이 없었다. 그리고 공손하고 예절이 밝아 대궐을 지날 때는 반드시 말에서 내렸고, 비가 와서 길바닥에 비록 물이 고였더라도 그 질펀한 길을 피하려고 금지된 길로 다니지 않았다. 또한, 세종이 양성한 인재가 문종 때에 이르러 한창 성했는데, 그 당시의 인물을 논할 때는 그를 높여 우두머리로 삼게 된다.”
하위지는 사후 235년이 지난 1691년(숙종 17)에야 단종 복위와 함께 ‘사육신’으로 복권되었다. 1758년(영조 34)에는 자헌대부 이조판서로 증직(사후에 벼슬과 품계를 추증하는 것)하고 ‘충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그는 노량진의 민절서원, 영월의 창절사, 선산의 월암서원(月巖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월암서원은 1630년(인조 8)에 지방 유림이 고려의 유신 김주(1339~1404)와 사육신 하위지와 생육신 이맹전의 학문과 덕행을 기리고자 도개면에 창건했다. 김주는 본관이 선산으로 고려 말에 사신으로 명나라에 갔다가 귀로에 압록강에서 고려가 망하고 조선조가 개국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는 통곡하며 부인에게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고 하였으니 내가 강을 건너가면 몸 둘 곳이 없다”라는 편지를 쓰고 끝내 고국으로 돌아오지 않은 이다.
월암서원은 1694년(숙종 20)에 사액서원이 되었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뒤 2010년에야 복원하였다. 훼철될 때 김주와 하위지·이맹전의 위패를 묻었던 사당 상의사(尙義祠) 왼쪽에 매판소(埋版所) 비가 지금도 남아 있다. 선산 읍내에 선산 부사 김만증이 세운 단계 유허비가 있다.
한 고을이 사육신과 생육신을 함께 낳은 경우는 선산 말고는 없다. 두 사람은 스무 살 차의 동시대인으로 단종에 대한 단심을 공유한 이들이었지만, 교유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설사 교유하지 않았더라도 둘은 상대의 존재를 강렬하게 인식하고 있었으리라.
두 사람은 1630년 월암서원에서 후학들의 기림으로 다시 만났다. 그러나 238년 뒤에 서원이 훼철되면서 위패가 묻히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정치적 신의 따위는 이미 깃털처럼 가벼워진 시대, 500년도 전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지켜낸 이들의 절의는 이미 낡아 바스러진 이야기에 그칠지 모른다.
양인 ‘향랑’도 절의 지켜 열녀가 되었다
이맹전 유허비 남쪽에 나무 사이로 난 길가에 1997년에 세운 ‘열녀 향랑(香娘) 노래비’도 대상이 다를 뿐 ‘절의’를 지킨 사람의 것이다. 향랑(1683~1702)은 남편의 학대와 폭력,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의 재가 권유조차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부종사의 의’를 지킨 여인이다. (관련 기사 : ‘열녀’라는 아우라 걷어내면 시대의 저항자가 보인다)
친정과 시가로부터 각각 재가를 권유받은 그의 신분은 양인이다. 재가한다고 해서 비난받을 일이 없는 신분이었지만, 그는 그것을 거부하고 맞닥뜨린 시련과 맞섰다. 그러나 왜곡된 삶과 현실에 대한 저항과 부정은 결국 좌절되고 그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향랑은 죽기 전에 땔나무를 하는 여인에게 ‘산유화가’라는 노래를 남겼다. 그것은 이 17세기 여인이 차마 감당하지 못한 절망의 노래였다.
“하늘은 어찌 높고도 먼가 / 땅은 어찌 넓고도 광막한가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 이 한 몸 의탁할 수 없으니 /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 물고기 배 속에 장사지내리.”
중앙도서관 뜰을 거닐며 생육신 이맹전, 사육신 하위지와 그의 시대를, 향랑이 절망한 시대를 되짚는 마음은 그야말로 서글프고 쓸쓸하다. 그러나 도서관 뜰을 거니는 시민들은 물론, 도서관에서 코를 박고 공부하고 있는 학생들 가운데 이들을 기억하는 이는 드물다. 이 오래된 돌비의 소임이 그 ‘역사의 기억’을 환기하게 하는 일이라는 건 참으로 쓸쓸한 역설이 아닐는지.
2022. 3. 1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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