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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도서관의 일본인 빗돌 내력과 송덕비 미스터리

by 낮달2018 2022.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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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의 문화재 ③] 구미시립 인동도서관의 빗돌들

▲ 인동도서관은 2000 년에 문을 연 ,구미의 두 번째 시립도서관이다 .
▲ 인동도서관 뜰에는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 거사비 등의 비석을 옮겨와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

인동도서관은 2000년에 문을 연, 구미의 두 번째 시립도서관이다. 인동은 원래 칠곡군 인동면이었으나, 1978년 시 승격 때 구미로 편입된 지역이다. 구미 원 시가지에서 낙동강 건너에 있는 인동은 인구도 10만이 넘어 독자적인 생활권이어서 도서관 규모도 중앙도서관에 이어 두 번째다.

 

도서관 뜰에 모아놓은 빗돌 11개

 

인동도서관 뜰에는 산업화 과정에서 제자리를 지키지 못하고 사라질 위기에 처한 역대 현감과 부사의 선정비, 불망비, 거사비(去思碑) 등의 비석을 옮겨와 한자리에 모아 놓았다. 인동 현감 이보와 인동 부사 김응해·원세정·이희원·정소·정홍채, 경상도 관찰사 홍훈 등 이른바 ‘방백(方伯 : 조선시대의 지방 장관)을 기린 송덕비가 7개, 지역 유지의 송덕비가 2개, 그리고 조선시대 표석과 괘불 걸이대까지 모두 11개다.

 

송덕비의 이름도 여러 가지다. 방백 송덕비 7개 중 선정비가 하나, 불망비가 셋, 거사비(去思碑)가 둘, 유애비(遺愛碑)가 하나다. 조선 후기에는 학정을 일삼은 수령들이 백성의 돈을 거둬 스스로 비석을 세우고 떠나 고을마다 선정비가 넘쳤다 한다. 뒷날 분노한 백성들이 비를 깨뜨려 토막 난 선정비가 수두룩했다는 걸 고려하면 선정의 내용도 눈여겨볼 필요가 있겠다.

▲ 가뭄으로 굶주린 이웃을 구제해 준 서현주의 덕을 기려 1918년에 세운 송덕비

송덕비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수령이 아닌, 지역 유지의 덕을 기린 빗돌 2개다. 둘 다 일제강점기 때 세운 빗돌인데, 하나는 조선인, 하나는 일본인의 송덕비다. 두 사람 다 가뭄이 극심했던 시기에 곡식을 풀어 이웃을 구제한 이다.


이웃 구휼 빗돌 둘 가운데 하나는 일본인 송덕비

 

‘전위원서공현주송덕비(前委員徐公顯周頌德碑)’는 인동 출신 서현주의 덕을 기리는 비다. ‘전 위원’은 직함인 듯한데 무엇을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다. 서현주가 가뭄이 심하여 굶주린 이웃을 구제해 주자, 도움받은 이들이 그를 기려 이 빗돌을 세웠다. 비 왼쪽 옆면에 새긴 ‘‘무오십이월일립(戊午十二月日立)’이라는 기록으로 1918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비석은 팔작지붕 모양의 덮개돌에 귀부를 갖춘 형태로 귀부와 몸돌, 덮개돌을 합치면 높이가 209cm에 이르니 빗돌들 가운데 키가 큰 편이다. 봉곡도서관 뜰에 있는 선달 박래민 구황비와 마찬가지로 어려운 시기에 이웃을 도운 기념물로 의미가 적지 않다.

▲ 흉년에 곳간을 열어 이웃을 도운 일본인 다카기 쇼지를 기린 송덕비

일본인 송덕비는 ‘유지고목창치군구황기념비(有志高木昌治君救荒紀念碑)’다. 다카기 쇼지(高木昌治)는 인동우체국 근처에 산 일본인으로 인동 지방에서 최초로 자전거를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는 곡물상이었는데, 함경도까지 왕래하며 조를 많이 취급하였다고 한다.

 

곡물상이어서 여러 지방을 다니면서 굶주림을 견뎌야 하는 백성의 처지를 알아서였을까. 1926년부터 이어진 흉년으로 기근이 심했을 때 그는 곳간을 열고 곡식을 내어 주린 이웃들을 도왔다. 이에 인동 사람들은 그의 덕을 기려서 1930년 1월에 ‘구황 기념비’를 세웠다. 앞면에 비 이름과 글을, 왼쪽 옆면에 건립 시기를 새겼다.

 

곳간 열어 이웃 살린 일본인은 곡물상이었다

 

비 이름 양옆에 새긴 글은 한발로 향민들이 힘들어할 때 다카기 쇼지가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하니 사람들이 그 은혜를 돌에 새겨 오래 간직하겠다는 내용이다. 

 

한발이 재앙이 되어서 / 어진 마을을 가혹하게 하였는데 / 오직 그대 의로움을 내어서 / 곡식 창고 열어 황폐한 고을을 진휼했네 / 정이 9년 세월 깊어가서 / 송축(頌祝)이 한 지방에 전하니 / 한 조각의 돌에 은혜를 기록해 / 길이 잊기 어려움을 맹세하노라.

 

비는 사각형 시멘트 받침대 위에 회색 화강암 몸돌에 지붕형 덮개돌을 얹었는데, 전체 높이는 136.5cm이다. 다카기 쇼지의 구황비는 원래 인동초등학교 뒤편 우시장에 세워져 있었다. 그러나 도시 계획에 따라 인동지역이 개발될 때, 비지정 문화재로 분류된 비석들과 함께 2001년 7월 현재의 자리로 옮겨졌다.

 

식민지에 살던 일본인이 흉년으로 굶주리는 조선인들에게 곳간을 열어 이들을 구제했고, 도움을 받은 이들이 이를 잊지 않으려 기념비를 세웠다는 이야기는 뜻밖의 미담이다. 저간의 사정이야 모르지만, 어쨌든 이 일본인은 이민족에게 ‘환난상휼(患難相恤)’을 실천한 것이다.

 

인동 사람의 증언에 따르면 다카기 쇼지는 해방 후 고향 오사카로 돌아갔는데, 뒷날 그 자손들이 진평동을 방문하여 기념비를 돌아보고 주민들에게 큰 호의를 베풀고 돌아간 적이 있다고 한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을 수탈했지만, 민간에서는 어려운 이웃들에게 도움의 손길을 내민 것이니, 그것은 식민지 종주국과 종속국이라는 상황을 넘는 선린 교류라 할 만하다.

▲ 수탈로 유명했고 뒤에 고금도에 위리안치되기도 한 홍훈의 송덕비는 미스테리다.

비석들은 도서관 뒤뜰 산 아래 일렬로 늘어섰는데, 맨 왼쪽에 이를 안내하는 팻말은 ‘청백리 공원’이라는 팻말이 서 있다. 어쨌든 선정비를 남긴 수령들이니 저마다 맑고 깨끗한 목민관이었다는 얘긴데, 다른 이는 몰라도 그냥 지나치기 어려운 인물의 빗돌도 있다.

 

백성 수탈하여 유배된 관찰사 송덕비의 미스터리

 

빗돌 가운데 가장 큰 것은 몸돌 176cm에다가 덮개돌 46cm를 합쳐 2m가 넘는 ‘‘순상홍공휘훈거사비(巡相洪公諱坃去思碑)’’다. 조선 후기 경상도 관찰사를 역임했던 홍훈의 선정비로 1880년에 세워졌다. 관찰사로 인동부를 돌아본 뒤 백성을 잘 보살펴 주었다고 세운 비석이다.

 

홍훈은 음사(蔭仕 : 과거를 거치지 않고 조상의 덕으로 벼슬을 함)로 벼슬길에 진출하여 여러 관직을 두루 지냈고, 1874년(고종 11) 경상도 관찰사로 부임하였다. 관찰사로서의 그의 행적은 <고종실록>의 기록에 따르면 ‘청백리’와 거리가 멀다.

 

1875년에는 부유한 백성과 지방 사족에 대한 수탈과 횡포가 극심하여 죄를 씌워 재물을 빼앗고, 세납물을 갖가지 방법으로 횡령하고 돈이나 곡식 따위를 마구 징수하여 15만 냥 이상을 축재함으로써 경상도민의 원성이 높았다. 이에 이붕순이 상소하여 처벌을 원하였으나 왕은 ‘협잡’이라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결국 그는 1876년 경상도 관찰사에서 물러난 뒤 경상도 암행어사의 보고로 전라도 강진현 고금도로 유배되었고, 곧 위리안치(귀양살이하는 곳에서 달아나지 못하도록 가시로 울타리를 만들고 그 안에 가두어 두는 일)되었다. 홍훈이 이러한 인물인데, 그로부터 4년 뒤인 1880년에 인동부에 그의 선정비가 세워진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 이를 제대로 조사하여 그 내용을 밝히는 게 필요하겠다.

▲ 불화를 거는 데 쓴 돌구조물인 괘불대(왼쪽)와 관결표석.

일렬로 선 비석들 사이에 글자를 새긴 바위와 돌 구조물이 각각 하나씩 끼어 있다. 이보의 비각 왼쪽에 있는 나지막한 바위가 ‘관결표석(官決標石)’이고, 다카기 쇼지의 송덕비 오른쪽에 세워진 돌 구조물은 ‘괘불(掛佛) 걸이대’다.

 

괘불 걸이대와 관결 표석

 

자연석으로 된 높이 65㎝, 너비 38㎝, 두께 25㎝ 정도의 표석은 한자로 ‘관결표석’이라 새겨져 있다. ‘관결(官決)’은 조선시대 관아에서 어떤 사안에 대하여 처분을 내리는 것을 이르는데, 건립 시기는 확인할 수 없으나 토지의 경계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 세운 돌 표지로 보인다. 분쟁의 내용은 어떠했으며, 이 관결은 무엇을 획정한 것이었을까.

 

마치 절집 앞의 당간지주를 연상시키는 괘불 걸이대는 불화(佛畫)를 거는 데 쓰는 돌 구조물이다. 오른쪽 기둥에 청나라 연호인 ‘咸豐(함풍)’ 6년이라 쓰여 있어 1856년에 만든 것으로 추정한다. 괘불은 당연히 절집 앞에 있었을 터이지만 정확히 어디에 있었던 구조물인지는 알 수 없다.

 

비록 비지정 문화재지만, 사라질 위기에 처한 비석들을 한자리에 모아놓은 것은 단순한 보존이 아니라, 거기 담긴 역사적 의미를 널리 알리자는 뜻일 터이다. 그러나 일렬로 세운 비석은 화단 사면을 두른 회양목 울타리에 가려서 비신만 제대로 보일 뿐이고, 받침돌 등 빗돌의 전체 모습은 잘 드러나지 않는다.

 

빗돌을 보호하려는 뜻인 것 같지만, 그것은 오히려 사람들의 접근을 막으면서 사람들과 멀어진 것은 아닐지. 도서관을 들를 때마다 확인하는 것은 빗돌은 ‘저만치’ 서 있고, 사람들은 그 옆을 분주히 지나다닐 뿐이라는 것이다.

 

2022. 3.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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