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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by 낮달2018 2019. 5.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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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은(冶隱) 길재(吉再)와 구미 금오산 채미정(採薇亭)

▲ 채미정 경내의 강학 공간인 구인재(求人齋). 매우 검박하면서도 단아한 팔작집이다 .

구미에 들어와 산 지 어느새 4년째다. 선산 골짝을 골골샅샅 훑는 데만 족히 서너 해가 걸릴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왔건만, 골골샅샅은커녕 아직 금오산에도 오르지 못했다. 블로그의 ‘선산 톺아보기’에 쓴 글도 8편이 고작이니 ‘개점휴업’이라 해도 할 말이 없다.

 

금오산 어귀의 채미정(採薇亭)을 지날 때마다 자신의 게으름을 돌이켜보곤 한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 있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善山)에 있다.”(<택리지(擇里志)>)고 할 때 그 인맥의 출발점이 곧 야은(冶隱) 길재(吉再, 1353~1419)이기 때문이다.

 

야은은 목은(牧隱) 이색(1328~1396), 포은(圃隱) 정몽주(1338~1392)와 함께 여말 삼은(三隱)으로 불리는 이다.(야은 대신 도은陶隱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 이들은 모두 여말에 송나라로부터 들어온 실천적 주자학, 즉 성리학을 공부한, 이른바 ‘신흥사대부’들이었다.

 

이들 신진 사류(士類)들은 당시 고려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였던 불교와는 달리, 개인의 고락보다 사회의 안녕을, 부처의 힘보다 인간의 힘을 더 중시했다. 이들은 인간의 힘으로 사회질서를 회복하려고 하는 성리학의 긍정적 기능을 받아들여 낡은 이데올로기인 불교에 도전하면서 새로운 이념인 신유학을 정립해 갔다.

 

여말, 정도전과 정몽주의 엇갈린 선택

 

이 신진 사대부들은 기울어가고 있던 고려사회를 성리학적 이상으로 개혁해 민본정치를 구현하고자 했던 고려 말의 개혁적 지식인이었다. 그러나 그들은 현실을 개혁할 것인가, 아니면 역성혁명을 통해 새 왕조를 건설할 것인가를 두고 첨예하게 갈라졌다.

 

여말 최고의 성리학자 이색의 문하생으로 개혁에 대한 열망을 공유하며 연대했던 정몽주와 정도전의 엇갈린 선택은 그들의 운명을 갈라놓았다. 정도전과 함께 권근 등이 새 왕조 건설에 참여하지만, 이숭인, 길재, 박상충 등은 정몽주의 길을 갔다.

 

정몽주가 지키고자 한, 충(忠)과 의(義)는 바로 성리학적 질서의 핵심 가치였다. 그는 그것을 지키고자 하다가 목숨을 내놓아야 했지만, 남은 사람들은 목숨을 바쳐 고려 왕조를 지키는 대신 새 왕조에 대한 출사(出仕) 거부와 낙향을 선택했다.

▲ 돌다리를 건너 흥기문을 들어서면 오른쪽이 채미정이다 .
▲ 채미정 앞의 담장 . 5 월의 신록은 마냥 푸르기만 하다 .

야은 길재는 공민왕 2년(1353)에 선산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평(海平). 자는 재보(再父), 호는 야은과 함께 금오산인(金烏山人)을 썼다. 11세에 선산 도리사(桃李寺)에서 글을 배웠고, 18세에 <논어>와 <맹자> 등을 읽고 비로소 성리학을 접하였다. 개경에서 이색·정몽주·권근 등 여러 선생의 문하를 섭렵하며 학문의 지론(至論)을 들었다.

 

1374년(공민왕 23)에 생원시에 합격한 이래, 1388년에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는데, 공직에 있을 때는 태학(太學)의 생도들이, 집에서는 권문의 자제들이 모두 그에게 모여들어 배우기를 청하였다. 1389년(창왕 1)에 문하주서(門下注書)가 되었으나, 나라가 장차 망할 것을 알고서 이듬해 봄, 노모를 모셔야 한다는 핑계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했다.

 

망국을 전후하여 여러 차례 벼슬자리가 주어졌으나 물리치고 나아가지 않았다. 우왕의 부음(訃音)에 채소, 과일과 혜장(醯醬, 식초와 장) 따위를 먹지 않고 3년 상을 행하였다. 그것은 그가 고려 왕조에 대해 표시한, 신하로서의 마지막 의리였다.

 

야은, 은둔으로 여민 절의(節義)

 

고려가 망하자, 왕조에 대한 지조를 지키기 위해 조복(朝服, 관복)을 벗어 던지고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간 일흔두 명의 선비들이 있었다. 새 왕조에 출사하지 않다가 불에 타 죽거나 참살당한 이들 선비에 비기면 벼슬을 물리치고 낙향해 은둔의 길을 택한 야은 같은 이들은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자신들의 절조를 표현한 셈이다.

 

두문동의 선비든 낙향한 야은 같은 이들이든 기울어가는 사직을 굳이 지키고자 하지 않은 것은 자신들의 충의와 무관하게 왕조의 명운은 이미 결정되어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적어도 고려 왕조의 쇠망은 역사적 필연이었다는 것을 그들은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 했다.

 

세종은 즉위(1419)한 뒤, 야은의 절의(節義)를 기리는 뜻에서 그의 자손을 서용(敍用)하려 했다. 야은은 이에 자신이 고려에 충성한 것처럼 자손들은 조선에 충성해야 할 것이라며 자손들의 관직 진출을 인정해주었다고 한다. 그는 매우 온건한 방식으로 왕조의 교체를 추인한 것이다.

▲ 채미정은 야은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 건립한 정자다. 중앙에 온돌방을 놓고 사방으로 □ 형태로 마루를 둘렀다.
▲ 채미정 누마루에 올라앉아 쉬는 시민들 .어쨌든 채미정은 시민들의 쉼터가 되었다 .

오백 년 도읍지(都邑地)를 필마(匹馬)로 돌아드니,
산천(山川)은 의구(依舊)하되 인걸(人傑)은 간데없다.
어즈버, 태평연월(太平烟月)이 꿈이런가 하노라.

 

낙향 은거하던 야은이 백의(白衣)의 몸으로 옛 고려의 도읍 송도를 찾아온 감회를 읊은 이 시조는 ‘회고가’로 불린다. ‘산천’과 ‘인걸’로 자연의 불변성과 인간의 가변성을 대조하고 ‘태평연월’과 ‘꿈’을 통하여 나라와 인간사의 흥망성쇠를 비기니 고려 왕조에 대한 회고의 정과 삶에 대한 무상감이 물씬 묻어나는 작품이다.

 

이 노래는 원천석의 “흥망이 유수하니…”와 함께 고려 유신(遺臣)의 회고가(懷古歌)를 대표하는 작품인데, 전편에 흐르는 애상적 정조는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의지를 강조하는 정몽주의 <단심가>와는 꽤 멀리 떨어져 있다. 그것은 포은과는 다른 길을 선택한 야은의 태도로 보아도 무방하겠다.

 

낙향 이래, 야은은 집에 들어와서는 효도하고 밖에 나가서는 공손하며 이욕(利慾)에 뜻을 두지 않았다. 그를 흠모하는 학자들이 모여들면 그들과 경전을 토론하고 성리학을 강해(講解)하는 등 그는 오직 도학을 밝히고 후학의 교육에만 힘썼다. 문하에서는 김숙자(金叔滋, 1389∼1456) 등 많은 학자가 배출되어, 김종직·김굉필·정여창·조광조로 그 학통이 이어졌다.

 

야은은 세종이 즉위하던 해(1419) 67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뒷날 세상 사람들이 그를 기려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선산의 금오서원(金烏書院), 인동(仁同)의 오산서원(吳山書院)에 향사(享祀)했다. 남긴 책으로 <야은집>·<야은속집(續集)>이 있다. 시호는 충절(忠節)이다.

▲ 왼쪽부터 포은 정몽주, 목은 이색. 도은 이숭인. 여말 삼은은 야은 대신 도은 이숭인을 넣기도 한다.

기존의 왕조에 충성을 다하는 것은 새로운 왕조에 대해서는 불충이다. 그러나 우리 역사는 이들을 ‘충의의 화신’으로 기린다. 정몽주가 그랬고 두문동 72현이, 사육신이 그랬다. 야은 길재 역시 마찬가지다.

 

금오산 어귀에 있는 ‘채미정’은 야은의 충절과 학문을 추모하기 위해 조선 영조 때(1768) 건립한 정자다. 새 왕조의 개국에 참여하지도 협력하지도 않았지만, 그가 지킨 절의는 어떤 왕조든 마땅히 기리고 따라야 할 미덕임을 누구나 알고 있었다.

 

채미정, 후세의 기림

 

‘채미’란 이름은 길재가 고려 왕조에 절의를 지킨 것을 중국의 충신 백이·숙제가 ‘고사리를 캐던 고사’에 비겨 붙인 것이다. 무왕이 은나라를 멸하고 주나라를 세우자, 백이·숙제 형제는 수양산에 들어가 고사리를 캐어 먹으며 은둔하다 굶어 죽었다.

 

형제의 고사에 대해 사육신의 한 사람인 성삼문은 비록 푸새(풀)에 불과하더라도 그게 누구의 땅에 났더냐고 반문한다. 그는 주려 죽는다 하더라도 ‘채미’는 왜 하는가 묻는다. 수양산을 바라보며 백이·숙제를 한(恨)할 만큼 성삼문의 결기는 차고 넘쳤다.

 

수양산 바라보며 이제(夷齊)를 한(恨)하노라.
주려 죽을진들 채미(採薇)도 하는 것가.
비록애 푸새엣것인들 긔 뉘 따헤 낫다니.

 

누구나 자신 같으라고 요구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누구나 포은 정몽주 같아야 한다고, 그를 따르라고 할 수는 없다. 비록 포은처럼 목숨을 내놓지 못했지만, 벼슬을 물리치고 스스로 은둔의 삶을 선택하는 것도 쉽지 않은 까닭이다.

 

채미정은 금오산 공용주차장 앞 개울 건너편에 있다. 돌다리를 건너 흥기문(興起門)으로 들어서면 오른쪽에 날렵하게 서 있는, 정면 세 칸, 측면 세 칸의 팔작집이 채미정이다. 왼쪽으로는 강학 공간인 구인재(求人齋)가 있고 뒤편에는 유허각과 경모각이 있다.

▲ 유허각의 야은 길선생 유허비
▲ 채미정 앞 돌다리 아래로 개울이 흐른다 . 개울물에 비친 풍경이 아름답다 .

경모각 안에는 선생의 영정과 숙종의 어필오언구(御筆五言句)가 있다. 임금은 야은의 덕을 찬양하고 그의 절의가 뒷사람을 일깨우길 바랐다.

 

금오산 아래 돌아와 은거함이여.(歸臥烏山下)
맑은 품격은 엄자릉에 비하리라.(淸風比子陵)
어진 임금은 그 아름다움을 찬양하시고(聖主成其美)
뒷사람에겐 절의를 일깨워 주리라.(勸人節義興)

 

*엄자릉 : 후한(後漢)의 선비였던 엄광(嚴光). 그는 일찍이 광무제(光武帝)의 죽마고우였는데 광무가 임금이 되자 산으로 들어가 숨어 살며 낚시로 여생을 보냈다.

 

그의 충절을 찬양한 게 어찌 옛사람뿐이랴. 구미시에서도 길거리에다 아호를 붙여 그의 절의를 기린다. 시내 신평동에서 김천으로 나가는 일직선의 주도로가 바로 야은로다. 그의 아호를 딴 야은초등학교도 있다.

 

길에다 이름을 붙인 이유야 그를 기리는 것뿐 아니라 그의 충절을 따르자는 뜻이겠다. 구미 시내의 거리 이름으로 기려지는 인물은 그 말고도 한말 의병장 왕산 허위와 전 대통령 박정희가 있다. 박정희야 반신반인으로, 거의 살아 있는 사람처럼 추앙받고 있으니 더 말할 나위가 없지만, 왕산이나 야은은 좀 다르다.

 

글쎄, 지역 사람들 가운데 그를 아는 인물은 얼마나 될까. 단순히 이름이 아니라 여말선초의 격변기를 살았던 이 도학자의 삶과 처세를 기억하는 이들은 또 얼마나 될까. 한말 12도 창의군을 이끌고 서울로 진격했던 의병장, 서대문형무소에서 순국한 첫 한국인, 왕산을 떠올릴 수 있는 사람은 또 얼마일까.

▲ 채미정 앞 길가 바위에 새겨진 야은 길재의 시 . 흔히 '회고가'라 불리는 시조다 .

채미정 앞 길가, 큰 바위에 그의 <회고가>가 새겨져 있다.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데없다.’ 600년 전 한 선비의 탄식은 연면하게 후대로 이어진다. 산천은 예와 다르지 않지만, 사람은 가고 없는 것이다. 이를테면 새 왕조에 출사를 거부하고 낙향한 야은 같은 인물 말이다.

 

왕조가 바뀐 것과 비길 수는 없지만, 정권교체 때 여야와 무관하게 입각을 거듭하는 정치인과 관료들이 유난히 눈에 띄는 것은 그 때문이다. 이들은 때로는 침묵으로 때로는 모호한 언술로 자신이 봉직했던 전임 정부를 비난하거나 거기 동조함으로써 자기 정체성을 부정하기도 하니 말이다.

 

‘영혼 없는’ 관료들은 그렇다 치더라도 정치인들은 달라야 하지 않은가. 그러나 그들은 수십 년간 쌓아온 자신의 신념을 일거에 무너뜨리며 권력의 품으로 뛰어들곤 한다. ‘절의’ 따위는 미덕이랄 것도 없는 세상에 우리는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2015. 5. 2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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