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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빗돌로 남은 두 여인, ‘열녀’인가 ‘주체적 여성’인가

by 낮달2018 2020. 9.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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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에서 정려한 구미 열녀 약가(藥哥)와 향랑(香娘)을 찾아서

▲ 삼강정려는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한 마을에서 나은 충신, 효자, 열부  세 사람을 기린 정려각이다 .

코로나19로 사실상 칩거 생활을 한 지 꽤 오래됐다. 안 되겠다 싶어서 지자체의 ‘문화·관광’ 누리집을 길라잡이 삼아 인근 문화재를 찾기 시작했다. 누리집에서 나는 시뻐 본 구미에도 국가 지정문화재인 국보가 1점, 보물이 12점이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도 지정문화재도 유·무형 문화재와 민속자료, 문화재자료 등 모두 69점이나 되는데, 그중 흥미로운 데부터 하나씩 들러 보기로 하면서 숨통을 틔우기로 했다. 

 

삼강정려의 열녀 약가의 ‘주체적 수신(守信)’

 

처음으로 찾은 데가 문화재자료인 선산 삼강정려(三綱旌閭)다. 삼강정려는 구미시 고아읍 봉한리 한 마을에서 나은 충신, 효자, 열부, 세 사람을 기린 정려각(旌閭閣)이다. 내비게이션을 길라잡이 삼아 나섰는데, 목적지 근처에 가면 길치가 되는 지피에스(GPS) 탓에 동네를 몇 바퀴 돌아야 했다.

 

동네 젊은 아주머니한테 물으니 모른다 해서, 어쩌나 고민하고 있는데, 촌로 한 분이 큰길 가에 있으니 이리저리 찾아가라고 알려주었다. 찾아갔더니 뜻밖에 삼강정려는 도로변 논밭 사이에 단출하게 자리 잡은 정면 세 칸, 측면 한 칸짜리 조그만 맞배집이었다. 정면 한 칸씩 충신, 효자, 열부의 정려를 각각 빗돌과 편액(扁額)으로 구분해 놓았다.

 

충신은 고려 충신 야은 길재(1353∼1419), 효자는 부모를 지성으로 봉양하여 자식의 도리를 다한 배숙기, 열녀는 왜구에게 잡혀간 남편을 그리며 정절을 지킨 조을생의 아내 약가(藥哥)다. 효자 배숙기는 정려 편액을 걸었고, 길재와 약가는 비석(정려비)을 세웠다.

▲ ‘고려 충신 길재지려’ 정려비. 약가의 빗돌보다 크고 돌의 재질도 달라 보인다.

정려(旌閭)란 국가에서 미풍양속을 장려하고자 효자·충신·열녀 등이 살던 동네에 붉은 칠을 한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하던 풍습이다. 삼강정려는 정조 19년(1795)에 선산 부사 이채가 세웠다. 한 마을에서 충효열을 각각 실천한 인물들을 냈다는 건 예사롭지 않은 일, 지방 수령이 그것을 기리려 함도 당연한 일이다.

 

야은 길재는 말할 것도 없고, 홍문관저작 벼슬을 한 배숙기도 각각 익숙한 충효의 본보기다. 이 정려에서 관심을 끄는 이는 열녀 약가다. 그는 야은과 동시대 인물로 봉한리에서 태어나 왜구에 붙잡혀간 남편을 기다리며 8년 동안 수절한 여인이다.

 

약가는 남편 조을생이 병정으로 나가서 왜구와 싸우다 잡혀가자, 그날부터 고기를 먹지 않고 옷을 벗지 않은 채 남편이 돌아오기만 기다렸다. 부모의 재가 권유를 비롯한 주위의 유혹을 이겨낸 약가는 마침내, 8년 만에 구사일생으로 귀환한 남편과 재회할 수 있었다. 조선 태종 4년(1404)에 열녀로 정려하고, <속 삼강행실도>(1514)에 기록하여 후세 사람들의 본보기로 삼으니 많은 이들이 시문으로 그를 기렸다.(많은 자료에서 <삼강행실도>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약가의 열행을 기록한 책은 <속 삼강행실도>다.)

▲  약가의 정려 앞에 걸렸던 편액 , ‘ 백세청풍 팔년고등 ’. ‘ 팔년고등 ’ 은 약가의 열행을 기린 점필재 김종직의 시문에 나오는 내용이다 .

최현(1563~1640)이 편찬한 경북 선산의 인문 지리지인 <일선지(一善誌)>의 첫 장에 나오는 점필재 김종직(1431~1492)의 ‘지리도십절(地理圖十絶)’에서는 여덟 번째로 약가를 소개하면서 ‘8년간의 외로운 등불’[팔년고등( 八年孤燈)]을 노래하고 있다.

 

아득하니 푸른 바다 위로 자봉(紫鳳)이 날아가니/ 팔 년 세월 다만 외로운 등불 벗 삼아 다스렸나니

돌아와 시험 삼아 거울 잡고 비추어 보니 / 뺨 위에 붉은 노을 반쯤이나 엉키었구나.

 

‘8년의 외로운 등불’을 기린 거친 자연석 빗돌

 

약가가 살던 시대는 15세기, 재가한 여인에게 불이익을 주는 ‘재가녀자손금고법(禁錮法)’이 반포되기 이전으로 보인다. 1485년(성종 16)에 반포된 이 법은 재가녀(再嫁女)의 자손은 과거에 응시할 수 없게 하여 벼슬길을 막음으로써 재가를 제도적으로 억압하는 법이었다. 이 법은 결국, 양반가 부녀들의 수절 풍습을 보편화하면서 점차 상민층까지 퍼져나가게 했다.

 

그러나 친정 부모로부터 재가를 권유받기도 한 약가는 양반가 부녀에게 강요된 성리학의 도덕적 규범으로부터 자유로운 양인 신분이었다. 그러나 그는 남편에 대한 믿음을 지킴으로써 국가로부터 ‘정려’라는 기림을 받았다. 나는 그의 선택을, 단순히 열행(烈行)이라는 도덕률을 답습한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서 남편에 대한 믿음을 지키려는 주체적 삶의 태도로 읽었다. 비록 ‘조을생의 처’라는 종속적 존재로 자리매김하지만, 가장 힘든 길을 선택함으로써 당대의 도덕률의 기림까지 받게 된.

▲ 약가의 정려비.‘열녀 조을생 처 약가 정표’라 새겼다. 투박하게 다듬은 자연석 빗돌은 소박하다.

열녀 약가의 정려는 길쭉한 직사각형의 자연석을 다듬어 만들었다. 그러나 다듬은 부분은 비명을 새긴 앞쪽일 뿐, 뒷면이나 비대석(碑臺石)은 자연석의 형태 그대로다. 물론 덮개돌도 없다. 전체 높이는 125㎝, 조금 누르스름한 빛의 몸돌에 ‘열녀 조을생 처 약가 정표(旌表)’라 새겼다. 정면 지붕 아래 걸렸던 ‘백세청풍 팔년고등(百世淸風八年孤燈)’ 편액은 개관을 준비 중인 구미 성리학역사관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약가의 거친 비석에 비기면 야은의 비석은 조금 다르다. 비대석에 앉힌 빗돌의 높이는 119cm지만, 그 위에 38cm의 둥그스름한 덮개돌 때문에 훨씬 짜임새가 있다. 비석에 새긴 비명은 ‘고려 충신 길재지려(之閭)’다. 빗돌의 빛깔도 약가의 비보다 희고 깨끗하다. 이는 물론 신분의 차이 때문일 것이다.

 

약가의 빗돌은 자연스럽게 김천 방초정(芳草亭) 옆에 소박하게 서 있던 여종 석이(石伊)의 돌비를 떠올리게 해 주었다. 석이는 임진왜란 때 왜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자 못에 투신한 열행의 주인공인 화순 최씨의 몸종인데, 그는 상전의 뒤를 따라 못에 몸을 던졌다. (관련 기사 : 수백 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  여종 석이의 돌비와 오석에 새긴 숙부인 최씨의 정려비 .  신분의 차이가 죽음의 무게도 갈랐던가 .

최씨의 열행은 나라에서 정려했지만, 후손들이 여종의 영혼을 위로하려 세운 석이의 돌비는 다시 햇빛을 보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필요했다. 숙부인의 정려 앞에 천한 노비의 비를 세울 수 없다 하여 그의 빗돌은 연못에 던져졌기 때문이다. 신분의 불평등이 죽음의 무게조차 갈라놓은 사례다.

 

구미에는 약가 말고도 열녀비로 기려지는 여인이 있다. 남편의 학대와 폭력, 이를 보다 못한 시아버지의 재가 권유조차 거부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어 ‘일부종사(一夫從事)의 의’를 지킨 향랑(香娘, 1683~1702)이다.

 

숙종 때 지금의 구미시 형곡동에서 태어난 향랑은 일찍 어머니를 여의고 계모 아래 자라 열일곱에 같은 마을 임칠봉과 혼인했다. 세 살 아래의 남편 칠봉은 성질이 고약하여 패악질이 극심했다. 그의 폭력과 학대를 견디다 못해 향랑은 친정으로 갔으나 계모는 그를 모질게 내쳤다. 부친이 그를 숙부에게 보내자, 조카를 부담스러워한 숙부는 재가를 권했다. 이를 거절한 그는 남편의 폭력과 학대가 기다리고 있는 시가로 돌아오지 않으면 안 되었다.

 

‘산유화가’의 변주와 향랑 서사의 설화 정착

 

시부조차 재가를 권유하자 마침내 향랑은 죽기를 결심하고 야은 길재의 충절을 기려 세운 지주중류비(砥柱中流碑) 아래 있는 오태소(吳太沼)에 몸을 던져 죽으니 꽃다운 열아홉이었다. 선산 부사 조구상이 향랑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삼강행실도를 모방하여 ‘열녀 향랑 의열도’를 그려 조정에 알리니 숙종 29년(1703)에 나라에서 그의 열행을 정려하였다.

 

“하늘은 어찌 높고도 먼가 / 땅은 어찌 넓고도 광막한가 / 하늘과 땅이 비록 크다고 해도 / 이 한 몸 의탁할 수 없으니 / 차라리 강물에 몸을 던져 / 물고기 배 속에 장사지내리.”

▲  구미시 형곡동 시립 중앙도서관 뜰에 세운 향랑의 노래비 .  그가 죽기 직전에 남긴 산유화가를 새겼다 .
▲ 형곡동 뒷산에 있는 향랑의 무덤 앞 사당 ‘정렬사’. 1992년 구미문화원에서 묘역을 정비하고 이 사당을 세웠다 .
▲ 사당 뒤편에 있는 향랑의 무덤과 빗돌. 오석으로 지은 새 비 앞에 자연석으로 만든 옛 열녀비가 있다 .

향랑이 죽기 전에 한 초녀(樵女)에게 남긴 노래 ‘산유화가’다. 평민 여성의 절행(節行)에 감명받은 사대부들이 이를 민간에 전하면서 이 서사는 노래뿐 아니라, 서술자의 관점에 따른 윤색이 두드러진 ‘전(傳)’의 형식으로 소개되었고 ‘설화’로도 정착했다. 설화는 향랑의 ‘열녀성’을 강조하지만, 실제 이 설화는 계모와 남편의 학대가 중심 모티프여서 ‘학처형(虐妻型) 설화’로 분류된다.

 

산유화가는 구전되면서 지금의 채록본에는 “구경 가세 / 구경 가세 / 만경창파 구경 가세 / 세상천지 넓다 해도 / 이 몸 하나 둘 데 없네 / 차라리 물에 빠져 / 물고기의 배 속에나 장사하세”로 바뀌어 전승되고 있다. 한 여인이 노래한 절망과 그 극한의 절망에서 선택한 죽음이 노래와 이야기로 변주되어 간 것이다.

 

전문 연구 가운데 “향랑은 열녀가 아니라 18세기경 가부장제가 정착해 가는 과정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의 희생자”(고려대 정창권)라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지역에서는 구미 시립 중앙도서관 뜰에 향랑의 시비를 세우고, 형곡동 뒷산 기슭의 향랑 묘 부근에 사당을 짓고 묘비를 정비하는 등으로 그의 열행을 기리고 있다.

▲ 향랑의 묘 앞 열녀비. 가운데에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은 흔적이 보인다.

 

원형의 삶과 진실 찾기는 뒷사람의 몫

 

그러나 ‘열녀’라는 윤리적 광휘(아우라)를 걷어내면 향랑이 강인한 의지와 자기주장이 강한 주체적 여성이라는 사실이 보일 듯도 하지 않은가. 주어진 시련을 회피하기보다는 그것과 맞서고자 했던 이 17세기의 여인은 마침내 좌절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으니 그것 또한 왜곡된 삶과 현실에 대한 저항이며 부정이었다. 그러나 그는 지배 이데올로기를 강화하고자 하는 지배층의 의도에 따라 새롭게 태어났고 그예 나라의 기림까지 받은 것이다.

 

향랑의 묘 앞에 세운 옛 빗돌도 약가와 석이의 빗돌과 닮았다. 거친 자연석의 질감이 묻어나는 빗돌에서는 잘 다듬어진 오석(烏石)과 값비싼 석재에서 보이는 위화감이 없다. 세월을 견디면서 두 동강이 난 몸돌을 때웠지만, 1992년에 새로 세운 오석에 지붕돌을 얹은 크고 세련된 새 묘비보다 훨씬 정겹고 편안하다.

 

그 당대에는 석재를 달리하고, 덮개돌을 얹는지에 따라 그 신분을 드러내었을지언정 풍화를 견디며 살아온 빗돌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새기는 것은 뒷사람의 몫이다. 충효든, 열이든 그것이 투영하고 있는 당대의 지배 이데올로기를 걷어내고, 그 가공되지 않은 원형의 삶과 그 진실을 들여다보는 일 말이다.

 

 

2020. 9. 6. 낮달

 

 

'열녀'라는 아우라 걷어내면 시대의 저항자가 보인다

나라에서 정려한 구미 열녀, 약가(藥哥)와 향랑(香娘)을 찾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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