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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수백 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by 낮달2018 2019. 12.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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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물로 지정 예고된 정자, 경북 김천 방초정 이야기

▲방초(芳草) 이정복이 창건한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인데 규모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인다.

 인근 김천에 있다는 정자 ‘방초정(芳草亭)’의 이름을 들은 것은 7년 전, 구미로 들어와 살면서다. 안동에 살면서 웬만한 정자는 다 돌아본 터라, 선산도 어떨까 싶었는데 정작 이름난 정자가 몇 되지 않았다. 방초정은 범위를 넓히다 김천에서 확인한 정자였다. 

 

그러나 여러 해가 지나도록 나는 그쪽 걸음을 통 못했다. 방초정 이름을 다시 들은 건 지난달 하순이다. 문화재청에서 국가지정문화재(보물) 지정을 예고한 10건의 문화재 가운데 강릉 경포대 등과 함께 김천 방초정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제야 나는 방초정 소재지가 김천시 구성면임을 알았다. 구성(龜城)이라면 흑돼지로 유명한 지례로 가는 길목에 있으니, 그간 지례를 두어 차례 찾으면서도 모르고 스쳐 지나간 셈이었다. 언제쯤 가 보나 견주기만 하다가 지난 12월 4일, 방초정을 찾았다. 

 

가운데 온돌방을 꾸민, 영남에 보기 드문 ‘중재실형(中在室型)’ 정자

 

방초정은 연안 이씨 집성촌인 김천시 구성면 상원리 원터마을의 들머리에 있었다. 물 좋고 경관 좋은 계곡도 아닌, 마을 앞 너른 들판을 건너다보며 서 있는 정자의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정자는 마을 앞을 지나는, 김천과 거창을 잇는 국도 3호선을 건너다보고 있었다. 큰길에서 마을로 드는, 농경지와 마을이 만나는 경계선에 자리 잡았으니 마을 공동의 누정(樓亭)이 있을 만한 자리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연안 이씨가 원터마을에 정착한 것은 15세기 말, 이숙기(1429~1489)의 차남 이세칙 때였다. 이숙기는 세조 때 이시애의 난을 토벌한 공으로 적개공신에 올라 연안군(延安君)으로 봉해지고 벼슬이 호조판서에 이른 이다. 이후 이 지역에서 세거한 연안 이씨는 지역 명문가로 성장했다. 

 

방초정을 창건한 이는 이숙기의 5세손 방초(芳草) 이정복(1575-1637)이다.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한 것으로 짐작되는 이 정자는 몇 차례의 중수 뒤 1787년에서 1788년에 걸쳐 ‘5량가 3칸(五架而三間)’ 규모로 중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방초정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락집인데 규모보다 훨씬 더 크고 높아 보인다. 유려한 곡선으로 들린 팔작지붕의 추녀를 받치고 선 활주(活柱)가 오히려 부실해 보일 정도다. 중심부에 한 칸 크기의 온돌방을 꾸미고 사방으로 개방된 마루방을 둔, 영남에서는 보기 드문 이른바 ‘중재실형(中在室型)’의 정자다.

▲ 방초정은 중심부에 한 칸 크기 온돌방을 꾸미고 사방으로 개방된 마루방을 둔  '중재실형' 정자다. 온돌방 사방에 분합문이 걸려 있다.

 온돌방을 꾸미느라 대들보의 아래로 샛기둥을 두어 칸 나누고, 샛기둥 사이로는 사방으로 3짝의 분합문을 달았다. 분합문(分閤門)은 주로 대청과 방 사이 또는 대청 앞쪽에 다는 네 쪽 문으로 2짝씩 접어서 문짝을 위로 접어 올릴 수 있다. 여름에 통풍을 돕고,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행사에서 방과 마루를 연결하여 넓게 쓰고자 문을 들어 올려서 사용하기 때문에 ‘들어열개문’이라고도 한다. 

 

정자 왼쪽에 난 계단을 오르니 겨울인데도 분합문을 활짝 들어 올려 서까래에 달린 걸쇠에 걸어 놓았는데, 사용자가 없으니 불을 땔 일이 없는 온돌방을 포함한 구조를 나들이객을 위해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계자 난간 아래로 건너다보이는, 섬이 둘 있는 네모 난 연못이 ‘최씨담(崔氏潭)’이다.

 

최씨담? 연못 이름치고는 좀 재미없는 이름이지만, 정자를 지은 이정복의 아호 방초도 만만치 않다. 방초란 말 그대로 ‘꽃다운 풀’인데, 당나라 시인 최호(崔顥)의 시 ‘등황학루(登黃鶴樓)’의 일절 “꽃다운 풀은 앵무주에 무성하도다(芳草萋萋鸚鵡洲)”에서 따 왔다. 글쎄, 선비가 꽃이나 풀을 아호로 삼는 건 흔한 일은 아니지 않은가 말이다. 

▲ 화순 최씨가 순절한 뒤 방초정 앞에 방지(方池)를 조성하면서 최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최씨담이란 이름이 붙었다.

 두 여인의 열행과 연못 최씨담

 

최씨담은 이정복의 처 화순 최씨 부인에게서 유래한 이름이다. 열일곱에 방초와 혼인한 최씨는 신행길에 임진왜란(1592~1598)을 맞았는데 시가에서 죽겠다며 원터마을로 오다가 왜병을 만나자 정절을 지키고자 못에 투신하였다는 열행(烈行)이 <경상도 읍지>에 전한다. 

 

신행길이라면 혼인 후, 신부가 처음으로 시집에 들어가는 길이다. 아직 시가 구경도 못 한 새색시가 이른바 ‘출가외인’의 논리를 기꺼이 좇아 죽음을 택한 것이다. 신행길이라 했으니 방초 자신도 혼례 때밖에 보지 못한 신부를 주검으로 맞이하였을 것이다.   

 

뒷날, 방초정 앞에 방지(方池)를 조성하면서 최씨의 열행을 기리고자 최씨담이란 이름이 붙여진 듯하다. 최씨의 열행은 1632년 인조가 직접 쓴 정려문을 내려 기렸고 1752년에는 방초정 옆에 정려비(旌閭碑)를 세웠다. 그는 숙부인으로 추증되었고, 1764년 정문(旌門)을 비각 안에 함께 세웠다. 대개 정려는 비석이나 정문의 형태로 세워지는데 최씨 부인에게는 두 가지가 단칸 정려각(旌閭閣) 안에 함께 모셔져 있다.

    

정려각 옆에 비각이 하나 더 나란히 서 있다. 1937년에 세운 풍기 진씨의 열행비(烈行碑)다. 풍기 진씨(1912~1935)는 이정복의 후손 이기영의 처다. 열여덟에 이기영과 혼인했는데 늑막염으로 고생하던 남편이 친정에서 복막염으로 숨지자, 치료를 제대로 못 해준 자기 탓으로 여겼다. 

 

 진씨는 남편의 시신 옆에 가 반듯이 누워 일체의 음식을 거부하다가 결국, 그 방에서 굶어 죽었다. 그의 나이 24세였다. 전국 각 유림에서 애도문과 제문, 만사 등을 보내왔으며 이태 후에 정려를 세워 후세인의 본보기로 하였다는 게 <영남삼강록>과 <충의효열지> 열부 편에 전하는 내용이다. 

▲ 방초정 옆으로 나란히 선 화순 최씨의 정려각과 풍기 진씨의 열행비. 나들이객의 시선을 붙잡는 건 정려각 앞의 초라한 돌비다.

 300년이 넘는 세월을 두고 나란히 두 여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앞사람은 나라에서, 뒷사람은 유림에서 각각 정려하였다. 왜병에 맞서 수절한 최씨나 남편을 따라 곡기를 끊은 진씨나 중세의 도덕률을 따른 선택으로 나라와 유림의 기림을 받은 것이다. 

 

정자 앞 최씨담은 가로세로 25m에서 30m 정도 규모의 한쪽 변이 비스듬한 네모형의 연못이다. 못 가운데 원형의 섬 두 개를 조성하여 섬과 못가에 나무를 심었다. 정원 유산으로도 귀중한 이 인공 못은 단순한 조경의 수단에 그치지 않고 농경지에 농업용수를 확보하고 갈무리하는 실용적 목적도 갖추고 있다. 게다가 이 연못은 화순 최씨의 열행과 이어져 ‘교화’의 뜻도 담겨 있다. 

 

연못의 섬은 대개 삼신산을 상징하는 세 개, 또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는 천원지방(天圓地方) 사상을 드러내려 한 개를 조성하는 방지원도형(方池圓島形)이 일반적이다. 그러나 드문 행태인 최씨담의 ‘방지쌍도형(方池雙島形)’은 일월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정절을 지키고자 연못에 뛰어든 최씨와 또 ‘한 사람’을 추모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부인들의 열행과 상전에 대한 석이의 ‘충’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그는 최씨 정려각 앞의, 투박한 돌비의 주인공, 최씨의 여종 석이(石伊)다. 최씨 부인이 못에 몸을 던지자, 함께 뛰어든 노비 석이도 상전을 뒤따랐다. ‘忠奴石伊之碑(충노석이지비)’ 여섯 자가 서툴게 새겨진 이 비석은 연안 이씨 후손들이 여종 석이의 영혼을 위로하려고 만들었다.

 

자연석을 거칠게 다듬어 얕게 새겨진 글씨는 희미해졌다. 정려각 안에 서 있는 화강암으로 된 숙부인의 크고 높은 정려비에 감히 견줄 수 없다. 후손들이 만들었다고 했으나, 실제로는 노비들이나 마을의 상민들이 석이의 죽음을 기리려는 것을 용인한 것일지도 모른다. 

▲ 정려각 안 화순 최씨 정려비와 충노 석이의 비. 비록 신분과 규모로는 비길 수 없지만, 최씨의 열행과 석이의 '충'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소박하게나마 그의 충절을 기려 비석은 지었으나 감히 노비의 비석을 절부(節婦)의 정려 앞에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이 비석은 최씨담에 던져졌다. 빗돌이나마 상전인 최씨 부인의 연못에서 상전과 함께하라는 뜻이었을까.

 

이 비석이 발견된 것은 1975년 최씨담 준설공사 중에서다. 물속에 묻혀 있던 돌비는 ‘좋은 시대’를 만났다. 살아생전에 최하층 신분으로 물건처럼 사고 팔렸던 노비 신분을 면치 못했던 석이는 수백 년간 물에 잠겼다가 만민평등의 시대에 못 밖으로 나온 것이다.

 

석이의 빗돌은 화순 최씨의 정려각 바로 앞에 서 있다. 1975년 이 빗돌을 건졌을 때, 마을 사람들의 의논이 어떠했는지가 궁금하다. 물론 그 신분을 이유로 주저한 이야 없지 않았겠지만, 그걸 정려각 앞에 세우자는 결정이 이루어진 것은 전적으로 만개한 ‘민의 시대’ 덕분이다. 

 

비록 작고 볼품없는 비석이지만, 뒤의 정려각 안에서 보호받고 있는 숙부인의 정려비보다 나들이객들의 눈길을 더 사로잡을 법하다. 최씨 부인이나 진씨 부인의 열행과 상전에 대한 석이의 ‘충’의 무게는 다르지 않다. 비록 부인들과 석이의 신분은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컸겠지만. 

 

정려각 앞에다 노비의 돌비를 세운 뒷사람들의 뜻도 다르지 않았을 것이다. 비록 신분의 귀천으로 갈렸지만, 세 여인이 따르고자 한 유교의 도덕률, 그 강고한 삼강(三綱) 가운데 충과 열은 중세를 꿰뚫어 온 덕목, 더러는 삶의 목표이자 준거였다. 그 실천적 삶을 기리는 데 다시 주종을 논하기가 민망도 하였으리라. 

▲ 최씨담의 두 섬은 일월을 상징한다고도 하고 정절을 지키려 연못에 뛰어든 최씨와 석이를 추모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졌다고도 한다.

 대낮인데도 적막 속에 잠겨 있는 마을을 뒤로 최씨담을 한 바퀴 돌았다. 가녘에 수백 년은 묵었음 직한 버드나무가 물속에 발을 드리우고 있고, 섬과 못가에 잎을 떨구고 선 몇 그루의 배롱나무가 쓸쓸했다. 오후의 햇빛이 역광으로 검게 빛나는 못물 위에서 부딪치고 있었다. 

 

정려와 노비의 비석이 함께 있는 '유교적 경관'

 

보물 지정예고와 관련하여 문화재위원회는 방초정의 가치를 “충과 효, 열 등 유교적 가치관을 앞세운 재지(在地) 사족이 향촌에서 자리를 잡아가는 조선 중기의 상황”을 보여주면서 18세기 후반의 “건축적 기법을 확인할 수 있는 가늠자”로 서술한다. 

 

특히 최씨담과 관하여 “정자에서의 완상을 위한 부속시설이기도 하면서 농경지에 용수를 공급하는 실용적인 기능”을 지적한다. 또 “대개 경승지를 쫓아 정자를 만드는 조선시대의 조원(造園) 유산과 달리 적극적으로 인공의 방지(方池)를 마련한 드문 사례”도 든다. 

▲ 방초정은 자연과 비석, 정려각이 함께 모여 조선 후기 전통사회 사족 씨족 마을의 원경을 증거 하는 '유교적 경관'을 형성하고 있다.

무엇보다도 방초정은 정려와 노비의 비석이 함께 있어 “자연과 비석, 정려각이 함께 모여 조선 후기 전통사회 사족 씨족 마을의 원경을 증거 하는” “유교적 경관”을 형성함을 높이 평가한다. 비록 중세적 세계관을 가감 없이 드러내는 문화재지만, 그 경관으로 시대사의 한 장면을 환기할 수 있다는 것 아닌가. 

 

어디 없이 겨울 풍경은 황량하고 쓸쓸하다. 방초정과 최씨담이 어우러진 풍경을 제대로 들여다보려면 새봄을 기다려야 할 듯하다. “푸른 잎이 우거진 숲과 ‘향기로운 풀’이 꽃보다 나을 때[녹음방초승화시(綠陰芳草勝花時)]”가 바로 광한루의 봄이 아니던가 말이다.  

 

2019. 12. 23. 낮달

 

 

수백년간 연못에 수장된 비석의 정체

보물로 지정 예고된 정자, 경북 김천 방초정 이야기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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