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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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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택, 국책 선전으로 시종한 ‘황국신민’ 소설가 정인택(鄭人澤, 1909~1953)도 일반 독자에게는 낯설기가 이석훈이나 김용제와 마찬가지다. 대중에겐 낯설지만, 임종국은 그를 “애국반 정신의 고양, 황도 조선의 건설과 내선일체의 앙양, 지원병 징병의 권유며 대화혼(大和魂)의 예찬, 만주 개척 기타의 국책 선전 등으로 시종하여 대단히 우수한 국어 문예 작품을 우리 문학사에 선물해” 준 작가로 평가한다. 임종국은 또 그가 《매일신보》 ‘국어(일본어)면’에 “선구적 작품”을 발표하여 “1937년 1월 12일 국어면이 신설된 이래 최남선, 김소운의 다음을 이은, 문인으로서는 제3착의 영광을 누”렸다고 비꼬기도 한다. ‘국민문학’에 대한 불타는 열정으로 정인택은 1909년에 서울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태양(太陽)이었으나 1930년께에 인택으로 개명하였.. 2022. 7. 4.
새로 생긴 ‘영가대교’ 이야기 안동 낙동강의 새 다리 ‘영가대교’ 안동에 살면서 떨칠 수 없는 의문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곳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낙후 지역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경북 북부지역의 거점 도시다. 그런데도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안동은 도시의 기본 입지 조건도 갖추지 못한 곳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안동은 인구야 고작 16만을 넘는 정도지만, 그 면적은 1,520㎢로 서울(602.52㎢)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그러나 그건 도농 통합 이전의 안동군 지역, 즉 읍면 모두를 포함한 면적이다. 흔히 안동시로 불리는 시가지 지역은 학가산과 영남산 등의 산자락과 발밑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 사이에 꽉 끼어 있어 옹색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옹색함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시내 전역은 .. 2022. 7. 3.
‘그 바다’, ‘현해탄’이 아니라 ‘대한해협’이다 백년 넘게 잘못 써 온 ‘현해탄’, 버릴 때가 되었다 블로그에 쓰고 있는 꼭지 에서 김우진과 윤심덕의 정사를 다룬 글을 쓴 게 2017년 8월이다. 제목이 “1920년대식 ‘애정 증명’? 김우진과 윤심덕, 현해탄에서 지다”였는데, 어떤 독자가 댓글에서 ‘현해탄’이 아니라 ‘대한해협’으로 써야 옳다고 지적해 주어서 나는 사실을 확인하고 제목을 고쳤다. ‘현해탄’은 ‘대한해협’이 아닌, 일본의 ‘조그만 바다’다 많은 한국인이 한국과 일본 사이의 바다를 ‘현해탄’이라 쓰는 것은 ‘현해탄’을 쓰시마 해협이나 대한해협(Korea straits)과 같은 개념으로 이해하기 때문이다. 현해탄은 대한해협을 지칭하는 일본식 지리 용어이므로 ‘식민지 언어의 잔재’라 보는 의견도 있지만, 이 역시 사실과 다르다고 한다. 아래.. 2022. 7. 1.
김용제, ‘시의 칼’로 동포를 찔러 댄 시인 침략전쟁 찬양 으로 ‘ 국어문예총독상’을 받은 부역 시인 김용제 시인 김용제(金龍濟·金村龍濟, 1909~1994)의 이름도 낯설다. 그러나 임종국에 따르면 그는 “내선일체와 황도 선양” 실현을 위해 진력한, “1940년대의 문단에서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겨 버릴 수 없는 유수한 논객이요, 시인”이었다. 그는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일문 시집 『아세아시집(亞細亞詩集)』으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은 당대에 가장 잘나가는 시인이었다. 이 수상작은 ‘일본 정신에 입각한 국어 작품일 것’, ‘민중 계발의 선전 효과가 양호할 것’이라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선정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는 시집이었다. 국어총독문예상 제2회는 평론 『전환기의 조선 문학(轉換期の朝鮮文學)』으로 평론가 최재서가, 제3회는 전기소설 .. 2022. 7. 1.
7월, 더 낮게 흘러서 가자 청포도의 7월에 7월이다. 1일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합법 조직이 된 지 8돌이 되는 날이다. 다분히 과장된 구호였지만, 전교조란 조직 명칭 앞에 ‘사천만의 꿈과 희망’이란 꾸밈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혹독한 탄압의 시기였다. 1천6백여 명의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고 이 거리의 교사들이 정부청사 앞에서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집회를 벌일 때마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48시간 동안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거나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 따위의 외곽지에 짐짝처럼 버려지기도 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와 비기면 지금 전교조는 가히 ‘동네북’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보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에게서 표를 구해야 하는 의사(疑似) 개혁 정치인까지 그 발길질에 열심히 가담한다. ‘.. 2022. 6. 30.
[2022 텃밭 농사 ③] 감자 캐기, 그리고 가지와 호박을 처음 따다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6월 27일 월요일 아침에 텃밭으로 향하면서도 아내와 나는 풀이나 한번 맬 참이었다. 일주일 전에 혼자서 밭을 다녀온 아내는 풀이 짓어서(‘풀이 무성하게 나다’라는 뜻의 경상도 방언) 말이 아니라고 했다. 장마가 시작되면서 찔끔찔끔 오긴 했지만, 여러 차례 비가 내렸으니 안 봐도 비디오다. 고랑에 빽빽하게 번지는 것은 바랭이다. 쇠비름이나 다른 풀도 따위도 나긴 하지만, 잡초의 주종은 바랭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한눈에 들어오는 풍경은 비록 풀은 무성하지만, 제법 꼴을 갖춘 밭의 모습이다. 고구마순도 왕성하게 자랐고, 그간 고추 하나 못 맺었다고 지청구를 먹였던 고추도 조그마하지만 여러 개의 열매를 맺었다. 아내와 나는.. 2022. 6. 29.
[오늘] 휴전 30돌에야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 시작 [역사 공부 ‘오늘’] 1983년 6월 30일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1983년 오늘(6월 30일), 한국방송공사(KBS)는 1TV를 통해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를 방송하기 시작했다. 이 특별생방송은 한국전쟁 33주년과 휴전협정(1953.7.27.) 30주년을 즈음하여 일제 식민지 지배와 한국전쟁(1950)으로 인한 남북분단이 낳은, 약 1천만 명에 이르는 이산가족을 찾기 위해 기획한 특별 프로그램이었다. KBS는 본래 라디오에서 10여 년 동안 이산가족 찾기 방송을 해왔기 때문에 하루 동안 10가족 정도가 만나게 될 것으로 예상했었다. 그러나 예상을 뒤엎고 시민들이 끊임없이 밀어닥치는 뜻밖의 열기에 KBS는 닷새간 정규방송을 취소하고 이산가족 찾기 릴레이 생방송을 이어갔다. 상봉률.. 2022. 6. 29.
[오늘] 한강 다리 폭파 - 전날 이미 대통령 이승만은 ‘서울을 탈출했다’ [역사 공부 ‘오늘’] 1950년 6월 28일, 새벽 한강대교 폭파 1950년 6월 28일 새벽 2시 28분, 국군은 한강대교(인도교)를 폭파하였다. 사흘 전인 6월 25일 새벽 4시에 시작된 한국전쟁 70시간 30여 분 만이었다. 폭파 장면을 목격한 미 군사고문단은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되고, 500~800명의 인명이 희생됐을 것으로 추정했다. 수도 서울을 빠져나가는 유일한 통로인 이 다리가 끊어지면서 무고한 인명의 희생에 이어 서울시민 100만 명의 발이 묶였다. 병력과 물자 수송이 막히면서 북한군을 저지하고 있다가 한강 이남으로 후퇴하지 못한 국군 6개 사단이 치명적 타격을 입었고 중화기와 차량 등 다량의 군수품을 적에게 내줘야 했다. 전쟁 발발 뒤 정부의 공식 발표는 6차례에 걸쳐 있었다. 6월.. 2022. 6. 28.
‘제국대학의 조센징’, 그 엇갈린 엘리트의 초상 [서평] 정종현 지음 (휴머니스트, 2019) 지금은 이른바 ‘스카이(SKY)’로 뭉뚱그려지는 고려대나 연세대는 일제 강점기 땐 대학이 아닌 전문학교였다. 강제 병합 초기에 일제는 조선인들에게 고등교육처럼 문명화된 지식인 양성 교육을 시행할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식민지 운영에 필요한 정도의 인력 양성을 위해 초중등교육과 실업교육의 보급에 주력했다. 이에 식민지 청년들은 일본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이들 가운데에는 이른바 ‘제국대학’에서 공부한 이들도 적지 않았다. 제국대학은 1886년 도쿄제국대학을 위시하여 일제가 설립한 7곳의 관립 종합대학으로 근대 일본의 엘리트 육성 기관이었다. 일제는 식민지 조선과 대만에도 각각 경성제국대학(1924)과 대북제국대학(1928)을 세웠다. 제국대학 유학생들의 집.. 2022. 6. 28.
아! 달성(達城), 그 ‘토성 둘레 숲길’을 걷다 [달구벌 나들이] ⑥ 대구 달성공원의 숨은 숲길, ‘토성 둘레길 *PC에서는 ‘가로 사진’을 누르면 큰 규격(1000×667픽셀)으로 볼 수 있음. 달성공원은 대구에서 가장 오래된 공원이다. 1596(선조 29)년 설치한 경상감영이 있던 자리인데, 1963년 사적으로 지정되고, 1969년 8월에 공원으로 문을 열었다. 대구의 인구가 100만이 되지 않을 때, 변변한 공원 하나 없었던 시절이라 달성공원은 이내 대구의 대표적인 휴식 공간이 되었다. 1969년에 문 연 달성공원, 온 시민의 사랑을 받았다 1969년은 내가 시골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대구의 한 공립 중학교에 진학한 해다. 그해 8월에 문을 열었다는데, 글쎄 관련한 기억은 전혀 없다. 내가 언제 처음으로 달성공원을 찾았는지도 기억에 없다. 아마 중.. 2022. 6. 25.
가야산 부근, 돌탑에서 야생화식물원까지 성주 가야산 기행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지난 16일 오전, 늘 그렇듯 황 선생이 집 앞으로 차를 끌고 왔다. 우리는 ‘바람을 쐬러’ 성주의 끝, 가야산(1433m)을 경계로 경남 합천과 붙어 있는 수륜면을 향해 출발했다. 올 2월에 명퇴한 황은 내가 1994년에 경북 예천으로 복직했을 때 만난 후배다. 그는 오래 교육 운동과 시민운동에 헌신해 온 활동가다. 황은 퇴직하면서 내게 한 달에 한 번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자신이 운전해서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글쎄, 하고 웃고 말았는데, 지난 5월 18일에 첫걸음을 했다. 영덕 강구에 가서 거기 사는 후배 강 선생을 불러 회를 곁들여 소주를 한잔했다. 거기.. 2022. 6. 24.
이석훈, ‘일본인 이상의 일본인’을 꿈꾼 작가 소설가 이석훈(李石薫·牧洋·石井薰, 1907~? )은 국문학을 공부한 사람에게도 낯선 이름이다. 소설과 희곡, 수필을 썼고 방송 쪽에서 일하는 등 여러 방면에서 활동한 인물이지만, 그는 문학사에서조차 거의 거론되지 않는 잊힌 인물이다. 이는 단지 징병과 지원병을 선전하고 선동하였으며, 내선일체와 황민화 운동에 앞장섰고, 일제의 침략전쟁에 협력한 화려한 친일 부역의 전력 때문일까. 친일 부역으로 이름을 떨친 문인들조차 문학상 제정 등으로 기림을 받는 상황임을 알면 그는 좀 억울하다고 항변할지도 모를 일이다. 1940년부터 훼절, 「고요한 폭풍」으로 친일 정당화 이석훈은 평안북도 정주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이석훈(李錫壎), 호는 금남(琴南)이다. 필명으로 이석훈(李石薫)·석훈생(石薫生)·이훈(李薰)·석훈(錫.. 2022. 6. 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