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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친일문학 이야기

김용제, ‘시의 칼’로 동포를 찔러 댄 시인

by 낮달2018 2022. 7.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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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략전쟁 찬양 <아세아 시집>으로 ‘ 국어문예총독상’을 받은 부역 시인 김용제

▲ 강제동원이란 일제가 아시아태평양전쟁(1931-1945)을 수행하기 실시한 인적, 물적자금 동원 정책이었다. ⓒ 강제동원피해지원재단

시인 김용제(金龍濟·金村龍濟, 1909~1994)의 이름도 낯설다. 그러나 임종국에 따르면 그는 “내선일체와 황도 선양” 실현을 위해 진력한, “1940년대의 문단에서 절대로 호락호락하게 넘겨 버릴 수 없는 유수한 논객이요, 시인”이었다.

 

그는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일문 시집 『아세아시집(亞細亞詩集)』으로 제1회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은 당대에 가장 잘나가는 시인이었다. 이 수상작은 ‘일본 정신에 입각한 국어 작품일 것’, ‘민중 계발의 선전 효과가 양호할 것’이라는 국민총력조선연맹의 선정 기준을 충족하고도 남는 시집이었다.

▲ 김용제가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은 <아세아시집>(1942)

국어총독문예상 제2회는 평론 『전환기의 조선 문학(轉換期の朝鮮文學)』으로 평론가 최재서가, 제3회는 전기소설 「다케야마 대위(武山大尉)」 및 창작집 『청량리 일대(淸涼里界隈)』로 소설가 정인택이 받았다. 부상으로 1천 원의 거액(현재 화폐 가치로 최소 1억 원 이상)이 주어지는 이 상은, 가난한 문인을 일제의 충실한 협력자로 유혹하는 강력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아마도 1945년에 해방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면 그 상을 탈 수 있었을 텐데 하며 안타까워한 부역 문인이 한둘쯤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세아의 부흥’을 위해 친일 글쓰기 시작

 

김용제는 충청북도 음성 출신이다. 본관은 경주, 호는 지촌(知村)이다. 1925년 청주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였는데 1927년 부친의 파산으로 온 가족이 서울로 이주하게 되자, 일본 유학을 결심하고 1월 1일 단신으로 도쿄로 건너갔다. 1928년부터 1929년까지 배달 등 막일을 하며 지내다가, 1929년 4월 도쿄의 주오(中央)대학 전문부 법과에 입학하였으나 곧바로 중퇴하였다.

 

1930년 6월 일본의 좌익 문예 동인지 『신흥시인(新興詩人)』에 시 「압록강(鴨綠江)」으로 등단해 동인으로 활동을 시작하였고, 9월에 일본의 프롤레타리아 시인회가 창립될 때 간사를 맡았다. 1931년 전일본 무산자예술동맹(NAPF)에 가입하였고, 10월에는 그 시기의 대표시 「사랑하는 대륙이여(愛する大陸よ)」를 『나프(NAPF)』에 발표하였다.

 

이어 11월 NAPF의 후신인 일본프롤레타리아문화연맹(KOPF)이 창립될 때 가입하였다. 1932년 ‘KOPF 대탄압’ 이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체포되어 4년여를 복역하고 1936년 3월 출소하였다. 그해 10월, 도쿄에서 조직된 진보적 대중예술 조직인 조선예술좌 사건에 문예부 고문이라는 이유로 검거되었다가, 11월 불기소 처분으로 석방되어 1937년 7월 조선으로 강제 송환되었다.

 

그의 전신(轉身)은 1938년 7월, ‘대동아공영권’ 수립을 위해 이시하라 간지(石原莞爾) 중장의 주도로 조직된 군국주의 단체인 동아연맹의 간사를 맡으면서부터다. 1939년 3월 14일 김동인 등이 제안하여 조선 총독부가 주도한 ‘북지황군 위문 문단 사절’의 후보로 선출되었으나, 최종 선발에서 탈락하였다.

 

같은 해 4월, 기미독립선언서에 서명한 민족 대표 33인 가운데 한 명인 박희도(朴熙道, 1889~1952)가 ‘내선일체’ 운동과 침략전쟁 협력을 위해 설립한 동양지광사에 들어갔다. 3·1운동 뒤 1년 6개월간, 1922년 필화사건으로 2년 넘게 복역하고 1929년 신간회 중앙집행위원까지 맡았던 박희도는, 1934년에 내선일체를 근간으로 한 조직 ‘시중회(時中會)’에 가담하면서 훼절의 길로 접어들었다.

 

박희도는 1939년 1월, ‘내선일체의 실천 강화’를 목표로 하는 일문 월간지 『동양지광』을 창간하였다. 잡지 창간이 “내선일체 구현에 대한 일본 정신 앙양의 일(一) 수양 도장을 제공한 것에 불과”하다고 할 정도로 그의 정신은 이미 망가져 있었다.

 

김용제가 친일 글쓰기를 시작한 것은 1939년 3월 『동양지광』에 「아세아의 시(亞細亞の詩)」를 발표하면서부터였다. 이 시에서 그는 ‘일본 국민’으로, ‘일본 정신’을 배우고 ‘아세아의 부흥을 위하여 싸우’겠다고 선언하였다.

 

나는 아세아의 부흥을 위하여 싸우고 싶다

동시에 새로운 아세아 정신을 조용히 창조하고 싶다

나는 일본 국민의 애국자로서 일을 하고 싶다

동시에 새로운 일본 정신을 깊이 배우고 싶다

나는 조선 민중의 참다운 행복을 위하여 일하고 싶다

동시에 그리운 자장가를 순진하게 노래하고 싶다

거기에 나는 감정의 모순을 조금도 느끼지는 않는다

거기에는 아름다운 아세아적인 조화가 있을 뿐이다

- 「아세아의 시(亞細亞の詩)」, 『동양지광』(1939년 3월호)

 

1939년 6월, 김용제는 내선일체를 위한 문화운동 단체인 국민문화 연구소 이사 겸 출판부장을 맡았고, 7월부터는 『동양지광』에 일본어로 「아세아시집」을 연재하기 시작하였다. 9월에 동양지광사 사업부장이 되었다.

 

10월엔 조선총독부 외곽 단체인 조선문인협회의 발기인이 되어 조선문인협회 발기대회에서 각계의 축사에 대한 답사를 낭독하였다. 12월, 부민관에서 열린 조선문인협회 주최 문예의 밤에서 자작시 「양자강(楊子江)」을 낭송하였다. 그는 이 시에서 양자강을 서구에 짓밟힌 중국의 상징으로 내세우면서 이른바 ‘대동아공영권’을 선동하였다.

 

지나(支那)의 어미인 양자강이여

동문동종(同文同種)의 우방은 아시아 건설을 외치고 있다

4억의 백성은 그 악수를 원하고 있는 것이다

모성애의 옛 모습으로 돌아가

지금이야말로 깨어나 다시 끓어올라라!

지금이야말로 동양의 건설을 외쳐라!

- 「양자강」, 『동양지광』(1939년 5월호)

 

총독상에 빛나는 일본어 시집 『아세아시집』

 

1942년 12월 18일, 김용제는 첫 번째 일본어 시집 『아세아시집(亞細亞詩集)』(대동출판사)을 펴냈다. 『동양지광』 등에 ‘아세아시집 제○편’이라는 일련번호를 붙여 발표된 이 작품은 1939년 1월부터 기획된 것이었다. 이후 4년 동안 약 60편이 만들어졌는데, 그 사이 내용이 전쟁 시에서 애국시로, 그리고 국민시로 바뀌어 갔다.

▲내선일체를 목표로 창간된 일문 월간지 『 동양지광 』 (1942년 12월호 )

총독부 관리 6명, 조선군 보도부장, 경성제대 교수 2명, 《경성일보》 학예부장, 논설위원 등 일본인들과 유진오, 유치진, 백철 등의 조선인으로 구성된 1943년 국어총독문예상 전형위원은 11편의 후보작 가운데 침략전쟁과 대동아공영권을 찬양한 김용제의 『아세아시집』을 최종작으로 선정하였다. 다음은 3월 21일 《매일신보》에 실린 이광수의 평가와 김용제의 수상 소감이다.

 

『아세아시집』은 총독상을 받을 만한 우수한 작품이다. 처음부터 끝까지 일관하여 열렬한 일본 정신의 기백이 있는 것이고, 또 표현이 원숙한 경지에 이른 작품이다.

- 가야마 미쓰로(香山光郎, 이광수)

 

처음부터 국어로 문학을 시작한 동경 시절 이래의 15년 동안과 이 시집으로써 나의 문학사상이 일본주의로 혁신 출발한 5년간의 과거를 회상하면 감개가 적지 않습니다. ……우리들은 지금 대전쟁을 하고 있는 일본의 국민입니다. 따라서 문학도 싸움이 안 되면 존재성이 없을 뿐 아니라 싸움을 지도하는 정신의 양식이 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절 실히 믿고 있습니다.

- 가네무라 류사이(金村龍濟, 김용제)

 

1943년 4월 3일, 국어총독문예상을 받은 김용제는 조선문인협회를 통하여 상금 중 300원을 조선군 애국부에 국방헌금으로 기탁하였다. 그는 또 작품으로 ‘총후국민문화운동’에 공헌하였다는 이유로 경성대화숙으로부터 모범 사상 전사의 표창도 받았다.

 

대화숙(大和塾 야마토주쿠)은 일제가 1941년 사상범의 보호관찰, 집단적 수용, 조선인의 황민화를 실현하기 위해 만든 전향자 단체였다. 일찍이 좌익 문예 활동으로 복역한 김용제가 대화숙에서 모범 사상 전사로 표창을 받았으니, 그야말로 성공적으로 전신(轉身)한 셈이다.

 

1943년 5월 27일 해군기념일을 맞아 김용제는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주최로 종로청년회관에서 열린 ‘해군을 찬(讚)하는 시 낭독회’에 참여하여 시 「바다 열리다(海ひらく)」를 낭독하였다. 화자인 어른이 동길이라는 청소년에게 해군이 될 것을 권유하는 형식으로 된 이 시에 서 바다는 곧 일제 침략의 경로였다.

 

그래, 동길 군

일본이 해신(海神)의 나라라는 것은

저 원구(元寇)를 퇴치한 가미카제(神風)로 잘 알고 있지

저 하와이전(戰)의 아홉 군신(軍神)에게 만세를 외쳤지

우리나라의 둘레가 깊은 물의 성벽이기에

옛날부터 어떤 적도 오지 못했던 것이다.

(……)

자네들이 태어난 지 얼마 안 된 갓난아기 때도

깨끗한 목욕물(産湯)을 받고 바람을 들이마셨는데

 

오늘의 새로운 탄생일에는

일본해의, 태평양의 목욕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 「바다 열리다(海ひらく)」, 『녹기』(1943년 6월호)

 

5월엔 일본의 건국 신화를 소재로 한 서사시로 일본과 일본 천황을 예찬한 두 번째 일본어 시집 『서사시 어동정(敍事詩御東征)』을 발간하였다. 이는 “진무(神武) 천황의 어행적(御行蹟)”을 “주로 『일본서기(日本書記)』에 의해서” 노래한, 서장부터 9장까지의 장시였다.

 

책의 후기에서 김용제는 “이 같은 존엄 웅대한, 또 소박한 정신미의 극치인 건국 사화를 감동의 신앙으로써 노래하고 찬미할 수 있음은 역시 일본 시인의 행복”이라고 감읍하였다. 그는 이미 천황의 충직한 신민이 되어 있었다.

 

우리 임금님 기원(紀元)을 비롯하사

이제로부터 2603년 전

아름다운 빛 뿌리시는 2월에

신민 된 우리 기도도 새롭거늘

새론 맘으로 기도하는 이 아침

하얀 눈으로 마음 정결히 하고

싸우는 땅은 아득한데

서서 보노라 아시아의 들녘에352

 

성스럽구나 일장(日章)의 깃발 아래

피가 불붙어 오르는 남북에서

가벼운 목숨 높으신 그 영예를

벗이여 알라 뜨건 눈물과 함께

- 『서사시 어동정』 「서장」 1~3연(문성당, 1943년)

 

8월에는 조선문인보국회 제1회 이사회 겸 김용제의 제2회 대동아 문학자대회* 출석을 기념한 장행회에 특별 참석하고, 조선문인보국회 대표의 한 사람으로서 대회가 열리는 도쿄로 향하였다. 떠나기 전에 그는 ‘조선의 황도 문학 수립’ 운운하는 결의를 밝혔다.

 

첫째는 문학에서 일체의 적성(敵性) 가치관을 박멸하고 일본 정신을 중핵으로 한 신동아 문학의 건설인 것이다. 둘째는 우리는 일본 대표이나 조선에서 일을 하기 때문에 조선의 황도 문학 수립을 위하여 공부했으면 한다.

- 《경성일보》(1943년 8월 12일 자)

 

*일본 제국주의가 대동아공영권 구상을 선전하기 위해 ‘대동아공영권의 문학 건설’이라는 기만적인 목표를 내세워 개최한 문학 행사. 1942년 11월부터 1944년 4월까지 3회에 걸쳐 일본과 중국 등지에서 열렸다.

 

1944년 4월, 마침내 일제는 식민지 조선에서 징병제를 시행하기 시작하였다. 김용제는 조선군사후원회의 위촉을 받은 조선문인보국회의 파견원으로 뽑혀 함경남북도의 징병지에서 활약하였다. 징병 검사 상황과 징병에 관한 미담이나 가화(佳話)를 수집하고 작품화하기 위해서였다. 6월에는 전 조선 13도의 반도 출신 군인의 가정을 위문하기 위하여 조선문인보국회 시부회 간사로서 경상북도에 파견되었다.

 

6월 10일, 김용제는 ‘총후 반도’의 정신적 각오와 ‘황도(皇都) 조선’의 건설 등을 노래한 세 번째 일본어 시집 『보도시첩(報道詩帖)』을 발간하였다. “조선에 있어서 징병제의 명예를 부담하는 백만 청소년 제군에게 이 서(書)를 드림”이라는 헌사를 바친 이 시집에는, 그가 “조선군 보도반원으로서 제1회 보도 연습에 참가하였을 때의 실제 체험과 감동에서 얻은” 시편들이 실렸다.

 

“죽어 좋을 일터로 사내답게 가거라”

 

시인 김용제는 ‘솜씨 좋은 자신의 칼’(언어)로 식민지 종주국의 이해를 완벽히 대변하고, 그들의 지배 논리를 선전, 선동하였다. 그는 언어의 형상화를 통해 내선일체와 징병 또는 학병을 통해 침략전쟁에 기여할 것을 주장하고, ‘총후’의 올바른 자세와 그에 부응하는 ‘황민 정신’을 역설하였다.

 

지금이야말로 아세아의 풍운은

시련에 불타오른다 비상(非常)의 때다

황군 백만 대륙에

조국의 성전을 밀고 나아간다

 

오오 반도는 총후의 관문

내선일체 깃발을 보라

(……)

우리 2천만 다 함께

황국신민의 맹서를 지니라

충의와 이상의 발걸음은

동양 평화의 길을 간다

오오 팔굉일우(八紘一宇) 천황의 위세로다

내선일체 깃발을 보라

- 「내선일체의 노래(內鮮一體の歌)」, 『동양지광』(1939년 4월호)

▲ 「 내선일체의 노래(內鮮一體の歌) 」, 『동양지광』(1939년 4월호)

 

우리가 사랑하는

아우는 백만

자네들은 잘도 남자에

잘도 이 시대에

훌륭하기 짝이 없는 군기(軍旗) 아래

사는 보람이 있으리

죽어서 불멸의 영예가 있도다

망치를 쥐는 돌과 쇠 손

괭이를 쥐는 흙과 풀 손

그물을 쥐는 바다와 생선 손

젊은 목숨을 바쳐서

오래도록 국방의 숲이 돼라

은명(恩命)의 총은 주어졌다

- 「기원(祈り)–징병의 그 감격 2(徵兵のその感激の二)」, 『동양지광』(1942년 7월호)

 

아직도 어린 티 나는 이들의

샛별 같은 갈매기 눈동자에는

수상기(水上機)의 날개를 펴고

전함이 백호(白虎)의 갈기 같은 물결을

하늘에 품길 저- 바다가

한(限)도 없이 넓게 푸르다

새로운 반도의 역사의 큰 날

모든 늙은 어머니조차

 

젖가슴 억안았던 팔을 풀고

낡은 울타리 훨훨 틔우고

나라인 마당에 ‘가거라’ 한다

이날에 오른 새로운 병사들은

충성의 뜻과 건설의 꿈을 품고

감격의 총을 메고 나선다

‘사내답게 가거라

죽어 좋을 일터로!’

아아 만세 우뢰에 답례하는 그들은

기쁜 눈물에 말이 많지 않았다

 

‘간다!’ ‘갑니다!’ 하고만

‘갔다 온다’곤 하지 않았다

-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년 8월 3일자)

▲ 김용제의 친일시 「님의 부르심을 받들고서」, 《매일신보》(1943년 8월 3일 자)

일제는 ‘어린 티 나는 이들’을 전쟁터로 내모는데, 동포 시인은 사지로 가는 젊은이의 눈동자에서 비행기와 전함을 읽어내고 ‘죽어서 불멸의 영예’를 노래하였다. ‘감격의 총’을 메고 나서는 청년들을 ‘죽어 좋을 일터로!’ ‘사내답게 가거라’라고 떠밀었다. 그것도 모자라 “‘간다!’ ‘갑니다!’ 하고만 / ‘갔다 온다’곤 하지 않았다”라며 짐짓 탄복까지 하면서.

 

일제 말기 친일 부역자들의 반민족 행위 가운데 가장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 글과 강연으로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동포 젊은이들의 등을 떠민 일이었다. 이른바 사회 지도층 인사라는 이들이 오히려 더했다. 청년의 죽음을 부추긴 이들의 ‘글과 말’은 추악한 ‘흉기’였다.

 

1945년 6월, 김용제는 조선문인보국회 회원 자격으로 조선인 가미카제 전사자인 기요하라(淸原)* 오장의 유족을 조문하고 전사자의 ‘특공정신’을 기렸다. 8월 1일에는 일제 말기 친일 부역 문인들이 거쳐가는 조선문인보국회 상무이사를 맡았다.

 

* 기요하라 데이지쓰(淸原鼎實), 본명은 한정실(1925~1945). 함경북도 경성 출신. 소년 비행병으로 입대하여, 1945년 5월 28일 오키나와 해상에서 전사하였다. 사후 2계급 특진(소위)하였다.

 

친일을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이라 강변

 

이미 성큼 다가온 일제의 종말을 김용제만 눈치채지 못했던가. 아니면 굳이 그걸 믿고 싶어 하지 않은 것인가. 김용제는 패전이 눈앞에 다가온 8월에도 《매일신보》에 「문단 고백」을 연재(8월 3~6일 자)하여 침체된 당시의 문단을 비난하면서 ‘무사의 절조’와 ‘충’을 들먹였다.

 

무사의 절조에는 칠생보국(七生報國)*하는 전통적 명예인 충(忠)이 있다. 문사에 있어서도 마땅히 칠생보국하는 충과 미(美)가 문학의 생태로서 표현되지 않으면 안 된다. 사(死)와 대결하면서 정(精)과 문답하는 신성한 마당에 있어서는 물질의 기근은 오히려 정신의 화약이 된. 관제적인 것에서 강박관념을 느끼는 비소(卑小)한 약체의 문학자는 스스로 생존할 권리도 의미도 없다.

 

*일곱 번을 다시 태어난다 해도 천황을 위해 적을 섬멸하여 국가에 보답하겠다는 뜻.

 

8월 10일 가네무라 류사이의 네 번째 일본어 시집 『아름다운 조선(美しき朝鮮)』(녹기연맹)이 나왔는데, 배포 도중에 해방이 찾아오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다. 김용제는 시집 전부를 폐기 처분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부역자에게 해방은 믿고 싶지 않은 악몽이었을까, 그래도 민족을 위해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여겼을까.

 

해방 후 임화와 김남천, 유진오가 조선문인보국회 사무실에 들렀다. 이들이 보국회의 재산 일체를 양도할 것을 요구하자, 김용제는 상무이사 자격으로 양도증서에 서명한 뒤 잠적하였다. 이는 최소한 그가 자신의 훼절이 ‘부역’이며 반민족 행위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1949년 여름,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서 최재서와 함께 조사를 받은 뒤 구류 7일 만에 기소유예로 석방되었다. 반민특위는 1949년 1월부터 활동을 시작하였으나 6월에 경찰의 습격을 받아 사실상 와해 상태에 놓였다. 게다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2차 개정되어 공소시효가 8월 31일로 당겨지면서 친일파 청산은 사실상 실패로 돌아갔다.

 

김용제는 1951년 한국전쟁 중에 미군 정보기관에 초빙되어 심리작전과 흑색선전의 책임자로 참전하였다고 하나 확인되지 않는다. 휴전 뒤에 월간 『새벽』의 편집장과 『평화신문』 주간 등을 역임하며 언론 출판계에서 활동하였다. 1954년에 흥사단 이사에 선임되어 1983년까지 재직하였다.

 

▲ 김립방랑기(김용제)

그는 1954년 『김립 방랑기』(개척사)를 비롯하여 여러 편의 글을 발표하였다. 1978년 8월에 『한국문학』에 산문 「고백적 친일문학론」을, 1993년 8월에는 일본의 시문학 동인지인 『자오선』에 소설 형식의 수기 「환상」을 발표하였다. 이 글을 통해 그는 자신의 친일이 ‘항일 지하운동을 위한 위장’이었다고 강변하였으나 본인의 주장일 뿐 객관적 증거는 제시되지 않았다.

 

1981년 제5공화국이 출범하자 그는 평화통일정책자문회의 자문위원으로 위촉되었다. 궁금한 것은 우리 문학사조차 외면한 시인을 신군부는 어떤 의도로, 무엇을 기대하며 찾아내었을까 하는 점이다. 언론·출판계에서 활동하고 1994년까지 생존하였는데도 인터넷에는 그의 사진이 한 장도 눈에 띄지 않는다. 따라서 『친일 인명사전』에도 그의 사진은 없다. 그가 그렇게 대중에게 잊힌 존재로 산 것은 그의 속죄였을까, 대중이 그를 버려서였을까.

 

1994년 6월 22일, 일제 강점기 국어총독문예상에 빛나는 황도 문학의 기수 가네무라 류사이는 85세를 일기로 사망하였다. 적지 않은 언론이 그의 사망 소식을 전하였지만, 화려하던 친일 부역 사실을 보도한 매체는 없었다.

 

김용제의 일제 강점기 활동은 ‘일제강점하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의 친일 반민족 행위로 규정되었다. 그의 친일 행적은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에 상세히 기록되었다. 그의 이름이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 인명사전』에 오른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2019. 5월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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