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포도의 7월에
7월이다.
1일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이 합법 조직이 된 지 8돌이 되는 날이다. 다분히 과장된 구호였지만, 전교조란 조직 명칭 앞에 ‘사천만의 꿈과 희망’이란 꾸밈말이 자연스럽게 느껴졌던 시절이 있었다. 혹독한 탄압의 시기였다.
1천6백여 명의 교사들이 학교에서 쫓겨났고 이 거리의 교사들이 정부청사 앞에서 원상회복을 요구하며 집회를 벌일 때마다 짧게는 하루에서 길게는 48시간 동안 경찰서 유치장 신세를 지거나 닭장차에 실려 난지도 따위의 외곽지에 짐짝처럼 버려지기도 했다.
여러 우여곡절이 있긴 했지만, 그때와 비기면 지금 전교조는 가히 ‘동네북’으로 전락해 버린 듯하다. 보수 세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들에게서 표를 구해야 하는 의사(疑似) 개혁 정치인까지 그 발길질에 열심히 가담한다. ‘두들기면 표가 나오는’ 지경이 된 것이다.
합법화의 과실이 취해 있었든, 교육 관련 사회적 의제를 만들고 끊임없는 실천으로 그것을 제도화하는 노력을 게을리했든, 조직의 바깥에다 그 책임을 물을 일은 어차피 아니라는 걸 지도부는 물론 교사들은 알고 있다.
보수 세력들의 반격은 만만찮다. 철 지난 국가보안법의 잣대를 들이밀면서 통일 교육에 힘쓰던 현직 교사 둘을 기소한 데 이어 7월 임시국회에서 말도 많던 사립학교법을 저들의 입맛에 맞게 개정한다고 한다.
아닌 백주의 도시 거리를 바퀴 달린 십자가를 끌고 가면서까지 그리스도의 희생을 퍼포먼스에 끌어들인 크고 센 교회의 목회자들과 ‘육영’보다 여전히 ‘사업’에 관심이 많은 사학 경영자들, 사학의 ‘공공성’보다 재단의 ‘재산권’이 보호할 헌법적 가치가 크다고 판결한 대법원의 고매한 법관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법이니 그래서 그들의 공화국의 성채는 더 튼튼해질까.
17일은 제헌절인데, 그래서 씁쓸함은 더하다. 누구인가가 문제일 뿐, 일찌감치 차기 대권을 따놓았다고 믿는 거대 야당과 이미 해체되고 있는 여당이 법 개정과 관련하여 각각 두드린 정치적 이익의 대차대조표는 모처럼 검은색인 모양이다.
아뿔싸, 지난여름 대통령이 제안한 연정은 성사되는 게 마땅했지 않은가. ‘재협상은 없다’라는 철석같은 약속을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먹어 버린 관료들이 수만 리 미국 땅에서 FTA 재협상 서명을 끝낼 터이니, 이 ‘선진화, 글로벌화의 지름길’에 박수를 보낼 세력들이 굳이 둘로 나뉘어 있을 이유가 없는 게 아닌가 말이다.
7일이 소서(小暑), 23일이 대서(大暑)고, 15일이 초복, 25일이 중복이니 우리 절기대로 하자면 7월은 옹근 여름이다. 7월의 기상 예보는 ‘장마전선 상에서 발달한 저기압의 영향으로 지역에 따라 많은 비가 오는 곳이 있겠으나, 강수량은 평년과 비슷’해 무더우리라는 데, 얼마나 제대로 예측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칠월’은 오히려 안동이 낳은 저항시인 육사의 시 ‘청포도’로 더 쉬 기억되는 달이다. 나는 그의 고향 근처에는 청포도를 널리 재배하고 있는가 생각했는데, 그가 태어난 도산면 원천리 주변 어디에서도 청포도를 구경하지 못했다. 청포도는 아마 시인의 상상력 안에서 독립과 광복의 꿈으로 영글었던 듯하다.
백천학해(百川學海), 모든 시내가 바다를 배우는 까닭은 바다가 낮은 곳에 있기 때문입니다.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가르치는 것도 같습니다.
쇠귀 선생 말씀의 요지는 겸허한 삶이다. 바다가 모든 시내와 그것이 운반해 온 산과 들의 물을 담아냄이 낮아서이듯, 자신을 낮추는 일은 세상의 온갖 모습과 그 정리를 담아내는 일과 다르지 않다. 배운다는 것이 낮추는 일이듯 ‘가르치는 것도 같다’라는 말씀은 더 크고 맑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2007. 6. 3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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