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안동 이야기

새로 생긴 ‘영가대교’ 이야기

by 낮달2018 2022. 7. 3.
728x90

안동 낙동강의 새 다리 ‘영가대교’

▲ 낙동강 둔치의 체육공원에서 바라본 영가대교 . 한적하고 고즈넉해 보인다 .

안동에 살면서 떨칠 수 없는 의문 중의 하나는 어떻게 이곳이 지역의 중심 도시로 성장할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다. 아무리 낙후 지역이라고 하지만 명색이 경북 북부지역의 거점 도시다. 그런데도 문외한의 눈으로 봐도 안동은 도시의 기본 입지 조건도 갖추지 못한 곳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거둘 수 없다.

 

안동은 인구야 고작 16만을 넘는 정도지만, 그 면적은 1,520㎢로 서울(602.52㎢)의 두 배를 훨씬 넘는다. 그러나 그건 도농 통합 이전의 안동군 지역, 즉 읍면 모두를 포함한 면적이다. 흔히 안동시로 불리는 시가지 지역은 학가산과 영남산 등의 산자락과 발밑을 적시며 흐르는 낙동강 사이에 꽉 끼어 있어 옹색하기가 이를 데 없다.

 

옹색함이야 그렇다 하더라도 시내 전역은 크고 작은 구릉의 연속이어서 시원한 평지를 찾기가 힘들다. 지방자치 시행 이후, 시내 전역의 인도를 자전거 도로로 이용할 수 있도록 해 놓았지만 정작 자전거를 타고 수월하게 다닐 수 있는 동네는 도시 동북쪽 일부가 고작이다.

 

도시 계획이라는 게 존재했는가 싶을 만큼 어지럽게 난 도로는 좁고, 구불구불하다. 대도시에서 만날 수 있는 시원하고 반듯한 십자로 사거리는 안동에 없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다. 왜곡된 기형적 오거리가 곳곳에 있고, 그게 출퇴근 시간의 도로 정체를 일으키기도 한다.

 

구시가지에서 강을 건너 만들어진 신시가지를 ‘강남(江南)’이라 부른다. 서울의 강남을 떠올릴 일은 없으니 역시 두어 개의 대규모 아파트 단지를 빼면 역시 그만그만한 산에 막혀 있는 지역일 뿐이다. 강남은 강 이쪽에 있던 법원과 검찰청 등이 옮겨가면서 자족적인 생활권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구시가지(말하자면 ‘강북’이겠는데)와 강남을 잇는 다리는 둘이었다. 하나는 강남이 개발되기 이전부터 있었던 안동대교고, 또 하나는 강 건너 영호루(映湖樓)를 잇는 영호대교다. 지난 6월 30일 밤에 영가(永嘉, 영가는 안동의 옛 이름이다)대교가 개통식을 갖고 강남·북을 잇는 세 번째 다리가 되었다.

운흥동 이벤트 공원에서 정상동 법원 앞을 연결하는 영가대교는 380억 원의 예산을 들여 건설한 길이 650m, 폭 25m의 왕복 4차로 다리다. 다리 위쪽에는 날아오르는 날개와 해 오름의 희망을 상징하는 아치 조형물이 설치되어 있다. 이 다리의 특징은 LED 야간경관 조명을 설치했다는 점이다.

잠깐 나가서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아치의 조명이 이상하다. 그새 고장이 난 걸까, 가운데 부분이 끊어져 있는 것처럼 보이는 아치가 몇 있다. 다리 아래 강변의 둔치는 체육공원으로 꾸며져 있다. 이는 이 소도시의 시민들이 누리는 만만찮은 축복이다. 강줄기를 따라 이어진 운동 겸 산책로에는 조깅을 하거나 이른바 파워 워킹의 자세로 걷고 있는 사람들이 간간이 눈에 띌 뿐, 한적하기만 하다.

 

신라 때 고창군(古昌郡)이었던 안동이 오늘의 이름을 갖게 된 것은 고려 태조 13년(신라 경순왕 4년, 서기 930년)이다. 이곳 병산(지금의 와룡면)에서 벌어진 왕건과 견훤의 싸움에서 이 고을 성주 김선평과 권행, 장길 등(이들을 삼태사라 한다)이 왕건을 도와 크게 공을 세웠다. 이에 태조는 고창군을 안동부로 승격시켰는데 안동은 ‘대동의 안전을 보장하는 곳’이란 뜻의 ‘안어대동(安於大東)’에서 온 말이다.

 

그 후 안동은 영가군(永嘉郡), 길주(吉州)(고려 성종), 복주(福州)(충렬왕)를 거쳐 공민왕이 홍건적의 난을 피해서 안동으로 몽진한 사건을 계기로 다시 안동이란 이름을 되찾아 오늘에 이른다. 안동의 민속놀이인 ‘놋다리밟기’는 바로 공민왕 몽진 당시 안동의 여인네들이 노국공주가 내를 건너도록 한 데서 유래한 것이다.

 

안동을 가리키는 이름은 넘친다. ‘양반 고을’이고, ‘독립운동의 성지’이면서 이른바 ‘혁신 유림’의 고장이기도 하다. 성리학의 대학자 퇴계 이황이 태어난 이 고장을 안동시에서는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안동’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면서 이를 특허로 등록한 모양이다. 올해는 특허 등록 2돌이라며 여러 가지 기념행사가 베풀어지고 있다.

▲ 안동시청 정문 . 솟을대문에 '한국 정신문화의 수도' 라 새겼다 .

그런데 안동에서 산 지 10년이 넘어도 어느 것 하나 분명하게 잡히는 게 없다. 그나마 안동을 제대로 알려고 책도 여러 권 사서 읽었고, 안동의 항일운동과 관련한 글도 여러 편 썼다. 그러나 여전히 안동은 ‘요령부득’이다. 이건가 싶으면 저거고, 저건가 싶으면 역시 잘못 짚은 것이다.

▲ 경상북도와 대구, 그리고 안동과 관련된 내 서가의 책들.

애당초 영가대교 얘기를 쓰려고 시작한 글이 엉뚱한 샛길로 들어버렸다. 그게 사람 사는 세상, 모든 땅이 가진 곡절인지 모를 일이다. 하기야 이 땅의 어느 곳인들 한눈에 그 속살을 드러낼 리 있으랴. 서툰 몇 편의 글로 안동을 이야기하겠다는 게 욕심을 넘어 오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밖에 까닭은 거기 있는 것이다.

 

 

2008. 7. 3. 낮달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