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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가야산 부근, 돌탑에서 야생화식물원까지

by 낮달2018 2022. 6. 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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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 가야산 기행

*PC에서는 이미지를 클릭하면 큰 규격(1000×667픽셀) 이미지로 볼 수 있음.

 

▲ 성주 가야산의 만물상. 38년 동안 입산이 통제되다가 2010년에 개방되었다. 소금강이라고 불리는 절경이다. ⓒ 성주군

지난 16일 오전, 늘 그렇듯 황 선생이 집 앞으로 차를 끌고 왔다. 우리는 ‘바람을 쐬러’ 성주의 끝, 가야산(1433m)을 경계로 경남 합천과 붙어 있는 수륜면을 향해 출발했다. 올 2월에 명퇴한 황은 내가 1994년에 경북 예천으로 복직했을 때 만난 후배다. 그는 오래 교육 운동과 시민운동에 헌신해 온 활동가다.

 

황은 퇴직하면서 내게 한 달에 한 번쯤, 어디 바람이라도 쐬러 가자고 제안했다. 가고 싶은 데가 있으면 자신이 운전해서 다녀오자는 것이었다. 글쎄, 하고 웃고 말았는데, 지난 5월 18일에 첫걸음을 했다. 영덕 강구에 가서 거기 사는 후배 강 선생을 불러 회를 곁들여 소주를 한잔했다. 거기서 경비의 대부분도 그가 부담했다.

 

그새 한 달이 흘렀는가, 일전에 아무 날이 어떠냐는 문자가 와서 좋다고 했더니 16일 오전에 집 앞으로 왔다. 이번에는 내가 성주 가야산 쪽으로 가 보자고 제의했다. 가야산이 있는 수륜면에 보물로 지정된 법수사지 삼층석탑이 있고, 가야산 야생화식물원과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이 문을 열고 있는데, 거기는 아직 가 보지 못한 곳이어서다.

 

법수사지 삼층석탑

 

굳이 중부내륙고속도로로 올리지 않고, 일반도로로 가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었다. 주변 사람들의 근황을 나누고, ‘노화’에 대해 이야기하기도 했다. 어쩌다 말끝에 그가 산에 가 보면 우리나라가 ‘선진국’이라는 생각이 든다고 말해 우리는 웃으며 지방자치제에 관한 이야기도 잠깐 나누기도 했다.

 

▲ 수륜면 백운리 법수사지. 한때 해인사에 버금가는 큰 사찰이었다는 이 절은 삼층석탑 하나만 남았다.

법수사지(法水寺址)는 경북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5-1번지 도롯가에 있었다. 꽤 넓은 터에 석탑만 우뚝하다. 석탑 주위에 석등 하대석, 불좌 대석 등의 유구가 흩어져 있고, 출토된 기왓조각들을 한옆에 원통형의 구조물처럼 쌓아놓았다. 실측 조사에서 확인된 건물지마다 새로 주춧돌을 앉혀놓았다.

 

안내판에 따르면 802년(애장왕 3)에 창건하여 금당사(金塘寺)라 하였으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 왕자 범공(梵空)이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렀다. 고려 중기에 절을 중창하고 법수사로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가 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성주의 읍지(邑誌)인 <경산지(京山志)>에는 “세속에 전하기를, 아홉 개의 금당과 여덟 개의 종각과 무려 천 칸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석불, 석탑, 석주(石柱), 석체(石砌, 섬돌) 등이 산허리 사방에 널려 있고, 절과 암자의 유지가 거의 백여 개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보면 당시만 해도 법수사가 해인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 결과 6개의건물지가 확인되었다. 출토된 기왓조각을 원통형으로 쌓아놓았다.

절터에는 모두 6개의 건물터가 확인되어 각각 표지를 붙였다. 석탑은 절의 남쪽을 향하여 서 있다. 탑의 높이는 5.8m, 2중 기단과 3층 탑신으로 구성되어 있고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와 탱주(撑柱 : 안 기둥)]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모서리에는 모두 풍경구멍을 내어놓았는데 이는 풍탁(風鐸), 또는 풍경(風磬) 등의 장식을 매달거나 부착하기 위함이다.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노반(露盤)] 위로 엎은 그릇 모양의 장식[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이 탑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에 비해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 기단이 높고, 안상이 음각된 점 등 9세기 후반기의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어서 사찰의 창건(802) 때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된다.

▲ 절터에 대한 발굴 조사가 이루어질 때의 성주 법수사지 삼층석탑 원경(촬영년도 2015년) ⓒ 문화재청
▲ 창건(802) 때를 기준으로 하면 1200년 넘게 이 절터를 지켜온 삼층석탑. 안정된 형태로 적잖은 기품을 지녔다. 201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탑은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규모에 매우 차분한 모습으로 넘치지도 모자라지도 않은 기품 같은 걸 지녔다. 탑은 창건 때를 기준으로 하면 무려 1200년 넘게 그 자리에서 절집의 부침과 나라의 흥망 따위를 지켜보았다. 폐사된 때부터로 쳐도 탑은 4백 년 넘게 홀로 이 폐사지를 지켜왔다. 2010년에 보물로 지정됨으로써 탑은 그 오랜 세월을 보상받았을까.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

▲ 성주군이 건립한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 신화의 배경인 가야산과 가야산 정견모주 신화를 소개하고 있는데 콘텐츠가 너무 빈약했다.

법수사지에서 성주가야산로로 조금 더 가면,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과 가야산 야생화식물원이다. 엄청나게 넓은 주차장에는 평일인데도 차들이 제법 대어져 있었다. 황은 가야산에 산행하러 온 사람들의 차일 게라고 했다. 시설 뒤쪽에 가야산 등산로가 있는 모양이었다.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은 가야국 창건 신화의 모태인 정견모주 이야기와 가야산의 생태를 테마로 한 2층 규모의 전시 테마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실외로 나서면 가야산의 자연경관을 즐길 수 있는 산책로, 숲속 쉼터, 전망대 등이 이어져 있었다.

▲ 가야산 테마관. 신화의 배경이 되고 있는 가야산을 소개하고 있는데, 몇 컷의 그림은 역부족이었다.
▲ 가야산 신화테마관. 가야산신인 정견모주가 천신과 두 아들을 낳는다는 신화를 소개하는데 배경지식이 없는 이에겐 신화가 낯설었다.

지하 1층이 가야산 테마관인데, 신화의 배경이 되는 가야산을 소개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가야산의 불꽃이라는 ‘석화성’과 가야산이 ‘야생화의 천국’이라는 코너, 고지도에 나타난 가야산을 소개하는 코너 등이 다였다. 공간도 좁은 데다가 가야산에 대한 소개도 평면적이었다. 얘걔걔 소리가 절로 나오는 상황이었지만, 우리는 따로 이를 평가하지 않았다.

 

지상 1층의 가야산 신화테마관도 비슷하다. 고령 지역에 전승되는 ‘정견모주설(正見母主說)’이라는 신화를 몇 컷의 그림과 장면으로 설명하고 있는데, 이 신화에 대한 배경지식이 없는 이에겐 좀 당혹스러운 방식이다. 대가야의 건국 신화로 통하는 이 이야기는 가야산 산신 정견모주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다음은 내가 돌아와 검색해 확인한 신화다.

 

“가야 산신 정견모주가 천신 이비가에게 감응되어 대가야 왕 뇌질주일과 금관국 왕 뇌질청예 두 사람을 낳았다. 뇌질주일은 이진아시왕의 다른 이름이고, 청예는 수로왕의 다른 이름이다.”

-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권29 고령현에 인용된 최치원(崔致遠, 857~ ?)의 「석이정전(釋利貞傳)」

 

이 신화는 쉽게 풀이하면 다음과 같다. 가야 지역에서 가장 성산(聖山)인 가야산의 산신인 ‘정견모주’라는 여신과 천신(天神) 이비가(夷毘訶) 사이에 두 아들이 태어났다. 첫째 아들은 머리가 해와 같이 빛난다고 하여 뇌질주일(腦窒朱日)이라 하고, 둘째 아들은 얼굴이 하늘색과 같이 푸르다고 하여 뇌질청예(腦窒靑裔)라 하였다. 후에 뇌질주일은 대가야의 이진아시왕(伊珍阿豉王)이 되고, 뇌질청예는 김해로 가서 금관가야의 수로왕이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전 지식 없이, 신화테마관에서는 그림 몇 컷으로 정견모주와 그 아들이 천신의 자손이라는 것을 강조하고 있었다.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마을 뒷산인 가야산 기슭에 있는 거대한 바위가, 한때 정월대보름 때 산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곳, 즉 정견모주를 기렸던 제단이라고 소개함으로써 신화의 지역성을 입증하려고 했다. 그러나 신화는 외지인들에겐 낯선 서사인데, 그걸 너무 간략하게 서술하고 있어서 사람들은 얼떨떨해지기 쉬울 듯했다. 

 

가야산 야생화식물원

▲ 가야산 역사신화테마관 바깥은 산책로.
▲ 테마관에서 야생화식물원으로 가는 테크 길.
▲ 전망대에서 바라본 가야산의 모습.

그나마 두 테마관에서의 실망은 바깥으로 나와 산책로로 숲속의 야생화식물원의 야외 전시원과 온실, 전시관을 돌면서 얼마간 보상(?)받을 수 있다. 전시관에는 야생화와 나무 이야기, 열두 달 식물 이야기와 가야산의 주요 야생화와 사계가 전시되어 있었다.  ‘야생화’라는 주제를 제대로 파고 있다는 점에서 점수를 주어도 좋은 공간 같았다.

 

야외 전시원은 야생화학습원, 관목원, 국화원, 숙근초원, 가야산 자생식물원 5가지 테마로 구성되어 가야산의 풍광과 함께 야생화를 돌아볼 수 있다. 온실은 난대성 기후에서 자생하는 문주란, 생달나무, 새우난초 등 117종 8천여 본의 나무와 야생화들로 꾸몄다.

▲ 가야산 야생화식물원의 정문. 식물원은 성주군에서 조성한 국내 최초의 군립식물원이란다.
▲ 야생화식물원의 야외전시원.
▲온실은 난대성 기후에서 자생하는 문주란, 생달나무, 새우난초 등 117종 8천여 본의 나무와 야생화들로 꾸며져 있었다.
▲ 온실
▲ 야생화식물원 전시관의 전시물. 꽃의 진화와 야생화의 생존방법을 설명하고 있다.

날씨가 꽤 더웠다. 공부하려고 온 데가 아니니, 설렁설렁 지나가도 시간이 꽤 걸렸다. 가야산 야생화식물원은 성주군에서 조성한 국내 최초의 군립식물원이라고 했다. 황과 나는 잠깐 자치단체가 대형 사업에 예산을 배부받는 과정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적지 않은 예산을 들여 지은 의미 있는 시설이 찾는 이 없어 유지 예산만 축내는 일이 없으면 좋겠다는 생각했지만 글쎄,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듯했다. 

 

18세기 폐사된 심원사, 2003년 중창 복원

 

가야산 신화역사공원의 뒤쪽에 심원사(深源寺)가 있다. 심원사는 창건연대가 8세기경으로 추정되는 사찰로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이 그의 시에서 ‘고사(古寺)’라 칭한 것으로 보아 오랜 역사 동안 번창한 사찰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조선 중종 때의 승려 지원(智遠)이 중수하였고 임진왜란으로 소실된 후 중창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지만,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로 기록되어 있으므로 18세기에는 폐사가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심원사는 지난 2003년 성주군의 ‘국립공원 가야산 지구 문화관광 자원 복원 계획’에 따라 다시 중창되었다. 복원 전에 시행한 발굴조사에서 남북 약 80m, 동서 약 100m 정도의 대지에 4단의 계단식 축대 위에 금당 3개를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산지 사찰 터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 심원사 삼층석탑은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있던 탑으로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89년 새로이 복원했다. ⓒ 문화재청
▲ 대웅전(오른쪽) 앞에 복원된 삼층석탑. 경상북도 문화재자료다.

또, 불사 중에 석조불상 대좌, 배례석, 불상 광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배례석, 석탑 기단 갑석 등이 발견되어 이들 유물은 일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5호 성주 심원사 석조유물로 지정되었다. 심원사에는 보물로 지정된 ‘길흉축월횡간목판(吉凶逐月橫看 木板)’이 보관하고 있다. 이 목판본은 고려 고종 6년(1219) 6월 영주 부석사에서 판각된 것으로 길일과 흉일을 월별로 나누어 기록한 일종의 명리학 서적이다.

 

대웅전 앞에 세운 심원사 삼층석탑은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있던 탑으로 원래 무너져 있던 것을 1989년 새로이 복원했다. 2층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린 모습인데, 아래·위층 기단과 탑신의 몸돌에는 기둥 모양을 새겼다. 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밑면에는 4단의 받침을 두었다. 탑은 독특하게도 기단 아래의 땅속에 사리장치를 마련해 둔 것으로 확인되었다.

 

▲ 심원사에서 보관하고 있는 보물, 길흉축월횡간목판(吉凶逐月橫看 木板). 고려 고종 6년(1219) 6월 영주 부석사에서 판각된 것이다.

모든 전각이 새로 지은 건물이니, 굳이 돌아볼 일도 없이 우리는 대웅전 앞을 서성이다가 하산했다. 지난 38년 동안이나 입산에 통제되었던 성주 가야산 만물상은 2010년에야 개방되었다. 글쎄, 거기까지 오르지는 못하니 먼빛으로도 그걸 한 번 보고 갔으면 했지만, 우리는 심원사를 끝으로 귀로에 올랐다.

 
                                                                                                        2022. 6. 20.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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