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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풍경

그 산사의 단풍, 이미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네

by 낮달2018 2019. 10.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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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미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기행

▲ 도리사의 단풍 기억 속에 도리사의 단풍은 늘 핏빛으로 선연했다 .

대저 기억이란 그리 믿을 게 못 된다. 그것은, 더러 ‘본 것’과 ‘보고 싶은 것’의 절묘한 합성이거나, 보고 싶은 것에 대한 심리적 지향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구미 태조산 도리사(桃李寺)의 단풍이 내게 그렇다. 내 기억 속에서 그 절집 부근의 단풍은 늘 핏빛으로 선연하다.

 

그러나 어쩌다 한번 찾아보는 도리사의 단풍은 예전 같지 않았다. 물론 계절이 조금 이르거나 늦을 수도 있다. 들를 때마다 도리사의 단풍은 조금 옅어서 미진하거나 약간 넘쳐서 칙칙하기만 했다. 그 아쉬움은 해마다 구미 쪽을 지날 때마다 내 발길을 도리사로 이끌곤 하는 것이다.

 

도리사의 단풍, 마음속에 핏빛으로 선연하다

 

절집으로 들어가는 길치고 아름답지 않은 데는 없다. 더구나 손대지 않은 천연의 숲길이라면 그런 길의 울림은 남다르기 마련이다. 세간(世間)과 출세간(出世間)의 경계인 산문(山門)으로 가는 길이니 비록 불자가 아니라도 길손의 마음은 허허로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리사로 가는 길은 온전한 아스팔트다. 잘 포장된 이 찻길은 거의 절집 턱밑까지 이른다. 그런데도 알맞은 굽이로 휘돌아가는 길, 은근한 단풍으로 짙어져 가고 있는 벚나무 가로수는 물론이거니와 산자락에 들어서면 이어지는 숲이 민얼굴로 연출하는 그윽한 풍경은 아스팔트 따위는 잊어버리게 해 주는 것이다.

▲ 도리사로 가는 길에도 단풍이 짙어져 가고 있었다 .

올해는 때를 제대로 탄 것일까. 지난 10월의 끝날, 구미를 다녀오는 길에 나는 우리 아이들을 데리고 다시 도리사를 찾았다. 구미 상주 간 국도를 버리고 오른편으로 들어서면 만나게 되는 거대한 콘크리트 산문을 지나자마자 펼쳐지는 풍경 앞에서 아이들은 나지막하게 탄성을 지르기 시작했다. 아이들에게 도리사는 초행이다.

 

‘해동 최초 가람 성지 태조산 도리사’

 

아이들에게는 배경 지식이 전혀 없다. 애당초 집을 떠날 때 도리사행은 계획에 없었기 때문이다. 산문에 쓰인 글귀를 읽던 아들 녀석이 묻는다.

 

“최초 가람이라니요?”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세운 절집이란 뜻 아니냐.”
“처음요?”
“신라에 불교를 전했다는 아도 화상이라고 배우지 않았냐?”
“아, 그 아도…….”
“태조산은요?”
“저 산이 태조산이라는 게지.”

▲ 도리사로 단풍은 야단스럽지 않고 수더분하다 .

태조산(太祖山)은 구미시 해평면과 도개면, 군위군 소보면에 걸쳐 있는 해발 692m의 아담한 산이다. 보통 냉산(冷山)이라 부르는데 고려 태조가 견훤을 정벌하기 위해 축성한 숭신산성이 있어서 ‘태조산’으로 불린다. 이 산 초입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것으로 전해지는 도리사가 깃들여 있다.

 

교과서 안에 화석처럼 존재하다 튀어나온 역사적 사실 앞에서 아이들은 좀 묘한 표정을 짓는다. 왜 여긴데, 하는 표정이 역력하다. 일선군(현재 구미시)은 신라와 고구려의 접경지로 신라 서북방의 최대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고구려의 남진을 막는 동시에 신라의 북방 진출의 거점이 되는 지역이었기 때문이다. 불법을 전하고자 국경을 넘은 아도가 일선군에 머문 것은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것이다.

 

아도에(阿道)에 대해서는 인도인이라거나 중국 오나라 사람이라는 등 설이 많다. 그러나 일연의 <삼국유사>에 따르면 아도는 묵호자(墨胡子)와 같은 사람이다. 그는 위나라 굴마(堀摩)와 고구려 여인 고도녕(高道寧)의 아들이라고 한다. 일연은 아도가 묵호자로도 알려진 것에 대해 ‘위험한 여행을 하면서 이름을 숨기고 말하지 않았던 까닭’이라고 주장한다.

 

도리사, 복사꽃 눈부신 그 자리

 

<삼국사기>에 따르면 아도가 일선군에서 포교를 시작한 때는 눌지왕 대(417~450년)다. 불교가 공인된 법흥왕 15년(528)보다 한 세기 이전이다. 그가 장자 모례(毛禮)의 집에 머물렀다는 사실은 두 사서(<삼국사기>·<삼국유사>)의 기록이 일치한다. 이 지역에 ‘신라 불법의 초전(初傳) 법륜지’라는 수식어가 붙는 까닭이다.

 

아도는 모례의 집에 굴을 파고 살며 낮에는 가축을 치고, 밤에는 불법의 진리를 강론하며 3년 동안 살았다. 일찌감치 불교를 받아들였던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융성했으나 고유의 신앙과 외래 문물에 대해 배타적이었던 신라에서는 불교에 대한 수용과정이 쉽지 않았을 터였다. 이 역사적 사실에 역사와 무관한 전설의 아우라가 드리워지는 시점이다.

 

도리사가 열리기까지 만만찮은 곡절이 있었다. 장자 모례의 집에 머물던 아도는 홀연히 집을 떠난다. 모례가 가는 길을 물으니 “칡 순이 내려오면 그걸 따라오라”고 한다. 그해 겨울.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인데 모례의 집 문턱으로 칡 순이 기어 들어왔다.

 

그 줄기를 따라가니 아도가 있었고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첫 전래지인 도리사 터였다. 아도는 모례의 시주로 도리사를 세웠다. 그 창건 연대는 알 수 없다. 결국, 도리사가 ‘해동 최초 가람’이라 자랑하지만, 그것은 공인된 사실과는 일정한 거리가 있는 셈이다.

 

▲ 아도화상 진영. ⓒ 직지성보박물관

아도가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진 태조산 밑에 때아닌 복사꽃이 만개하여 눈이 부셨다. 이에 절 이름을 ‘도리사(桃李寺)’라 붙이고 마을 이름도 ‘도를 열었다’고 하여 ‘도개(道開)’라 하였다. 이웃한 구미시 도개면이 그곳이다(현재 도리사 소재지는 해평면 송곡리다).

 

산 너머 도개면 도개2리에는 아도가 머물렀다는 모례의 집으로 추정되는 ‘모례 장자 터’가 있다. 또 ‘모례 우물[모례정]’로 불리는 유적도 남아 있다. 이 마을을 아도의 첫 전래지역이라 여기는 근거다. 우물은 길이 3m의 직사각형의 돌을 큰 단지 모양으로 쌓아 만들었으며, 밑바닥은 두꺼운 나무판자를 깔았다. 우물이 만들어진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다.

 

도리사와 더불어 아도와 인연을 맺은 또 다른 절집은 인근 황악산에 있다. 도리사를 창건하면서 멀리 김천 황악산의 명당을 손가락으로 가리키고 이듬해 절을 지으니 이 가람이 곧 직지사(直指寺)다. 세워진 순서와는 달리 지금은 직지사가 본사고 도리사는 그 말사다.

 

절집은 가파른 산길을 승용차로 좋이 5분여를 달려야 이른다. 올해는 때를 제대로 맞추었는가 하고 나는 자신에게 물어본다. 길가의 숲은 들뜨지 않고 차분한 황갈색이다. 산 중턱의 주차장에 닿을 때쯤 시나브로 불타고 있는 단풍을 만났다. 언젠가 내가 숨이 막힌다고 느꼈던 그 단풍일까, 아닐까.

 

지금의 도리사가 있는 곳은 창건 때 장소가 아니다. 원 도리사는 불타 없어졌고, 현재의 도리사는 그 부속 암자였던 금당암(金堂庵)을 중심으로 중창한 것이다. 주차장에 차를 대고도 가파른 굽잇길을 하나 더 올라야 만나게 되는 도리사의 전각들은 다랑논처럼 층계를 지은 가파른 비탈에 띄엄띄엄 서 있다.

▲ 태조 선원. 이 검박한 건물은 납자들의 정진 수행처다. 한때 성철 큰 스님도 여기서 정진하였다.
▲ 도리사 극락전. 도리사에선 가장 오래된 전각으로 내부에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다.
▲ 도리사 화엄 석탑 .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마치 모전 석탑처럼 작은 석재로 쌓은 특이한 형태다 . 보물 제 470 호 .

설선당과 수선료 따위의 새로 지은 대형의 전각을 지나는데, 허리가 거의 직각으로 굽은 보살 한 분이 수돗가로 나온다. 우리는 노인이 지나갈 때까지 기다린 뒤에 길을 재촉한다. 온갖 삶의 신산을 넘어 노인 앞에 남은 생애에 부처님은 어떤 방식으로 현현하실까.

 

계단을 따라 수선료 옆 언덕을 오르면 오른쪽에 태조 선원이 무심하게 서 있다. 정면 7칸, 측면 8칸의 꽤 큰 이 전각은 그리 오래된 건물은 아니지만, 언덕 아래 새로 지은 멋대가리라곤 없는 대형전각이 주는 실망을 상쇄할 만한 구석이 있다. 단청이 벗겨진 낡은 처마에 어린 검박한 느낌은 납자의 정진수행과 어우러진다. 한때 성철 큰 스님도 여기서 정진하였다던가.

 

선원 오른편으로 날아갈 듯한, 조금은 경박한 자세로 팔작지붕의 추녀를 바투 쳐들고 있는 전각이 극락전이다. 내부에 목조 아미타여래좌상을 모시고 있는 이 전각은 19세기 초에 건축된 것으로 보여 도리사에선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잿빛 승복을 입은 젊은 보살이 정성스레 전각 앞 시주함을 닦고 있었다.

 

극락전 뜰 앞에 있는 도리사 화엄 석탑(보물 470호)은 고려시대의 작품으로 우리나라 석탑 가운데 같은 유형을 찾아볼 수 없는 특이한 형태이다. 마치 모전 석탑처럼 작은 석재로 쌓은 탑신이 오래 눈길을 끈다. 담 아래 비탈에는 아도 화상이 앉아 참선하였다는 좌선대가 있다.

 

▲ 금동육각사리함. 국보 208호. ⓒ직지성보박물관

좌선대는 도리사 경내에서 아도의 흔적을 엿볼 수 있는 유적·유물들 가운데 하나다. 좌선대 뒤에는 아도화상 사적비가 서 있다. 높이가 3m에 이르는 이 비는 1655년(효종 6)에 세워졌다. 1921년 조성한 아도화상 진영은 삼성각에 봉안하다 김천 직지성보박물관으로 옮겼다.

 

해동 불교의 발상지라는 이 절집에서 1976년 세존 진신 사리탑을 복원하던 중 금동육각사리함(국보 208호)이 출토되었다. 그 속에서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나왔는데 이 사리는 현재 직지사 성보 박물관에 위탁 소장되어 있다. 절집 뒷마당 언덕에 적멸보궁을 새로 지은 연유다. 그러나 이 전각은 절집 안의 고요에 안기지 못하고 생뚱맞아 보인다.

 

적멸보궁을 지나면 내리막길이다. 자욱한 숲 너머로 선산들이 눈 아래 펼쳐진다. 다랑논처럼 층계 진 비탈에 전각이 들어앉아 있다 보니 절 뒤편 언덕에서도 절의 전모가 한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그것도 곳곳에 심상하게 들어선 나무에 가려 반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 오래된 절집이 아닌데도 이 절집이 들떠 보이지 않고 차분한 느낌을 주는 이유다.

 

성보 문화재를 잔뜩 갖춘 대찰도 아닌, 조그만 말사인데도 도리사엔 불자들의 모습이 끊이지 않는다. 여기저기서 부지런한 보살들의 발걸음이 잦은 까닭도 비슷하다. 사리함에서 나온 부처님의 진신사리도 불자들을 불러 모았으리라.

 

부처님 진신사리를 모신데다가 해동 최초 가람이다. 비록 일신과 일가의 안녕을 비는 데 그치는 ‘기복 신앙’이라 한들 도리사에 모인 불자들에게 누가 감히 손가락질할 것인가. 도회의 웅장한 고딕 건물 아래서 행해지는 세련된 서구식 신앙도 기실은 미리 얻은 힘과 권세를 지키고자 하는 욕망의 다른 표현일진대.

▲ 적멸보궁 앞에서 내려다본 선산 들이 아련하고 단풍이 곱다.
▲ 불타는 듯한 단풍나무 그늘 저편으로 길은 휘돌아져 사라져 간다 .

이 절집에 처음으로 들렀을 때다. 극락전 앞에서 우연히 만난 젊은 운수(雲水) 한 분과 나눈 대화가 아련하게 떠오른다.

 

“스님, 절이 참 좋습니다.”
“예, 산에 들어서기만 해도 마음이 편해지는 도량이 있는데 여기가 그런 곳이지요.”
“불자들이 많습니다. 기도하면 영검이 큰 모양이지요?”
“글쎄요…….”
“영검은 이판(理判)에게서 나오겠지요? 물론.”
“당연하지요. 이판 하나가 사판(事判) 아홉을 먹여 살린다는데요…….”

 

납자(衲子)들의 세계에선 이판과 사판 사이에 분명한 경계가 있지만, 대중들의, 머리 깎은 이들에게 바치는 경배는 다르지 않다. 부처님 전에 올리는 공양과 발원이 이판의 영검으로 돌아오면 불어나는 대중의 발길이 번다한 불사로 이어지면서 그 영검의 규모도 나날이 커 가는 것일지도 모른다.

 

‘좋다, 좋다’를 연발하는 아이들과 하산길에 든다. 위에서 굽어보는 산세도 순하고 어질다. 빽빽하게 들어찬 솔숲과 짙어져 가고 있는 단풍의 바다를 내려다보면서 나는 생각한다. 오늘 만난 단풍은 맨 처음 내가 만났던 단풍과 얼마만큼 같고 얼마만큼 다를까.

 

차에 올라 가파른 내리막길을 달려 산자락을 벗어날 때에 나는 비로소 깨닫는다. 이후로도 태조산 도리사 기슭에서 맨 처음 만난 그 ‘핏빛 단풍’은 만날 수 없으리라는 것을. 왜냐하면 산사의 단풍은 이미 마음속에 오래 전부터 불타고 있었으므로.

 

2009. 11. 17. 낮달

 

 

 

그 산사의 단풍, 이미 마음속에 불타고 있었네

구미 태조산 도리사(桃李寺)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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