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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복원한 폐탑 두 기, 천 년 세월을 되묻다

by 낮달2018 2022. 7.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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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불탑] ③ 보월동 삼층석탑(수륜면 보월리)와 심원사 삼층석탑(수륜면 백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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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월동 삼층석탑(수륜면 보월리)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 보월동 삼층석탑은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폐사지에 있다 일제 때 파괴되었다가 1979년 복원되었다. ⓒ 성주군

보월동 삼층석탑은 수륜면 보월리 탑안(절골) 마을에 있다. 이름이 전해지지 않는 폐사지에 있던 이 탑은 일제강점기에 파괴되었다가 1979년 12월 복원되었다. 복원 당시 틈이 벌어지고 모서리가 깨진 석탑의 기단 부분만이 제자리에 있었으며, 그 밖의 부재는 주변 농지에 묻히거나 사방에 흩어져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파괴된 8세기 석탑 1979년 복원

 

흩어져 있던 부재를 모아 2중의 기단을 마련하고, 그 위로 3층의 탑신을 올려 복원했다. 탑의 높이는 5.2m, 지대석(地臺石)은 한 변의 길이가 4.4m다. 하층기단과 상층기단에는 각각 양 우주(隅柱:모서리 기둥)와 2주(株)의 탱주(撑柱:받침 기둥)를 새겼다.

 

탑신석(몸돌)과 옥개석(지붕돌)은 각각 하나의 석재로 구성되었다. 탑신석에는 양 우주가 새겨졌는데, 1층 탑신이 2층에 비해 높다. 1층과 3층 옥개석의 처마 선이 파손되어 원형을 잃고 있지만, 2층 옥개석 처마가 완형(完形)을 유지하고 있어 본래의 모습을 파악할 수 있다.

▲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후반에 세워진 이 탑은 경주에서 완성된 신라 석탑의 양식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준다.ⓒ 성주군

 

옥개석의 아랫면에는 층마다 각각 5단의 옥개받침이 있고, 지붕돌 처마의 낙수면 경사가 완만하고 탑신에 비해 넓게 조성되어 안정감을 준다. 처마는 수평을 이루다 네 귀퉁이에서 희미하게 위로 들려 있어 날렵한 느낌을 준다.

 

상륜(相輪)은 없어졌으며, 전체적으로 정제된 규격과 꾸밈이 단조로운 등 양식과 조각 기법 등으로 보아 통일신라 성대인 8세기 후반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한다. 경주에서 완성된 신라 석탑의 양식이 지방으로 확산하는 과정을 보여주는 석탑으로 평가된다.

 

8세기 후반이라면 지금으로부터 1200년도 전이다. 비록 돌로 지었지만, 그 오랜 세월을 건너오면서 돌도 깎이고 헐고 닳았다. 그 마멸의 흔적은 탑이 시간과의 싸움에서 얻은 상처다. 그리고 그 상처가 침묵으로 증언하는 것은 역사다. 비록 한낱 돌덩이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지만, 품은 넉넉하고 깊은 시간으로 말미암아 탑은 추앙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심원사 삼층석탑(수륜면 백운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 심원사는 18세기에 폐사되었다가 2003년에 성주군에서 복원하였다. 산기슭에 있던 삼층석탑은 대웅전 앞마당으로 옮겨졌다.

심원사(深源寺)는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동사무소 뒤편으로 500m쯤 오르면 옛 절터에 새로 지은 절이다. 절의 이름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여지도서(輿地圖書)>, <조선사찰전서> 등에서는 ‘深原寺’라 하였고, 성주의 읍지 <경산지>에서는 ‘尋原寺’라 하였다.

 

심원사는 법수사와 같이 8세기께 창건된 것으로 추정되는 천년고찰이다. 도은(陶隱) 이숭인(1347~1392))이 자신의 시에서 ‘고사(古寺)’라 부른 것으로 보아 고려시대 훨씬 이전부터 그 자리를 지켜온 사찰로 보인다.

 

오래된 심원사가 가야산에 있는데 (尋源古寺在倻山)

소나무 잣나무 숲속에서 빗장도 걸려 있지 않네. (松栢陰中不掩關)

능엄경을 갖고 가서 깊은 뜻을 묻고 싶지만 (擬杷楞嚴叩精義)

이 몸이 언제 한가할 수 있을지. (徜能乞得此身閑)

- ‘기심원장로(寄深源長老)’

 

조선 중종 때 승려 지원이 중수했다는 기록이 있고, 임진왜란 때 의병들의 실화로 말미암아 절이 불탄 후 다시 중건되었다. 그러나 정조 23년(1799)에 편찬된 <범우고(梵宇攷)>에는 폐사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18세기경 폐사된 것으로 추정된다.

▲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있다가 무너진 심원사 삼층석탑은 1989년에 복원하였다. ⓒ 문화재청
▲ 심원사는 임란 때 의병들의 실화로 절이 불탄 후 다시 중건되었다가 18세기에 폐사되고, 삼층석탑만 가야산 기슭에 남아 있었다.ⓒ 성주군

지난 2003년 성주군의 ‘국립공원 가야산 지구 문화관광 자원 복원 계획’에 의해 중창되었다. 복원하기 전의 발굴조사에서 남북 약 80m, 동서 약 100m 정도의 대지에 4단의 계단식 축대 위에 금당 3개를 갖춘 전형적인 통일신라시대의 산지 절터임을 확인했다고 한다.

 

무너진 탑 1989년에 복원, 2003년 심원사 중창되며 대웅전 앞으로 이건 

 

또, 중창 불사 중 석조불상 대좌, 배례석, 불상 광배,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탑 기단 갑석 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이들 유물은 일괄하여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5호 성주 심원사 석조유물로 지정되었다.

 

심원사 삼층석탑은 가야산 남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가 무너진 탑을 1989년에 복원하였다. 2003년 심원사 중창이 이루어지면서 절터의 최상단 남서편에 있던 삼층석탑을 대웅전 앞으로 옮겼다.

▲ 무너진 탑은 복원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부재가 많이 쓰여 탑은 원형과 멀어졌다.

탑은 외형상으로 통일신라 양식을 따르고 있다. 2층 기단 3층의 탑신을 올린 탑으로 전체 높이가 4.5m, 지대석의 폭이 3.50m다. 하층기단에 비해 상층기단이 훨씬 높다. 기단부의 면마다 우주(모서리 기둥)와 탱주(받침 기둥) 2개씩을 새겼다. 탑신에도 면마다 모서리 기둥을 새겼다.

 

각 층의 탑신과 옥개석은 모두 각각의 돌이다. 옥개석(지붕돌)은 네 귀퉁이가 살짝 치켜 올라갔고, 밑면에는 4단의 옥개받침을 두었다. 1층 몸돌보다 2층과 3층의 몸돌의 체감률이 높다. 게다가 2, 3층의 비례도 맞지 않는다.

 

상륜부에는 노반을 올렸다. 1층의 몸돌은 파손된 것을 복원한 것이고, 기단 갑석도 새로 만든 석재를 넣었다. 1층 지붕돌과 2·3층 지붕돌은 달라 보인다. 무너진 탑을 복원하는 과정에서 제 부재로는 어려워 군데군데 새 부재를 만들어 쓴 것일까.

▲ 주변에서 수습해 대웅전 뜰 아래 모아 놓은 석조유물들.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25호.

자세히 바라보면 탑신과 옥개석 부분은 적지 않게 어설프다. 무너졌다가 회생하면서 그는 부득이 남루해졌던가. 그래도  탑은 전체적으로 안정감이 있는 것은 2중의 기단이 튼튼한 덕택이다.  폐사지 곳곳에서 수습하여 대웅전 뜰 아래에 모아놓은 석조 유물들은 초라하고 덧없다.  탑이 증언하는 1200년의 역사 잎에서 인간의 상상력이란 민망하기만 하다. 

 

 

2022년 7월 16일 낮달

 

[성주의 불탑] ① 동방사지 칠층석탑(성주읍 예산리)

[성주의 불탑] ② 법수사지 삼층석탑(수륜면 백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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