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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선산(구미) 이야기

1천2백 년 세월 견뎌낸 돌탑과 당간지주

by 낮달2018 2022. 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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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주의 불탑] ② 법수사지 삼층석탑(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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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물로 지정된 법수사지 삼층석탑. 뒤핀으로 가야산국립공원이 보인다. ⓒ 성주군청
▲석탑 주변에는 석등대석(石燈臺石), 불상대석(佛像臺石), 장대석(長臺石) 등의 유구(遺構)가 흩어져 있다.

법수사지(法水寺址)는 성주군 수륜면 백운리 1214번지, 가야산국립공원 백운분소로 가는 길가에 있다. 경북과 경남의 도계, 즉 경북 성주군 수륜면에서 해인사가 있는 경남 합천군 가야면으로 넘어가는 고개인 솔티재 정상에 법수사지가 있다.

 

경북과 경남 도계에 자리잡은 법수사지

 

성주의 읍지(邑誌)인 <경산지(京山志)>에는 “세속에 전하기를, 아홉 개의 금당과 여덟 개의 종각과 무려 천 칸의 집이 있었다고 하였으며, 석불, 석탑, 석주(石柱), 석체(石砌, 섬돌) 등이 산허리 사방에 널려 있고, 절과 암자의 유지가 거의 백여 개에 이른다”라고 하였다.

 

안내판에 따르면 802년(애장왕 3)에 창건하여 금당사(金塘寺)라 하였으며, 신라가 망하자 경순왕의 작은 왕자 범공(梵空)이 중이 되어 이 절에 머물렀다. 고려 중기에 절을 중창하고 법수사로 개칭하였으며, 임진왜란 이후에 폐사가 된 뒤 복원하지 못하였다. 지금은 석탑과 금당(金堂) 터의 거대한 석축, 당간지주만 남았다. 출토된 기왓조각들을 한옆에 원통형의 구조물처럼 쌓아놓았다. 실측 조사에서 확인된 건물지마다 새로 주춧돌을 앉혀놓았다.

▲ 탑은 지붕돌의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어 한결 더 경쾌하고 날렵해 보인다.

사역(寺域)은 남북 150m, 동서 150m 정도이고 크게 세 단으로 나뉘어 있다. 금당지로 추정되는 축대 아래에는 백운리 마을이 자리 잡았으며 마을 앞에는 당간지주가 고목의 뿌리에 싸여 남았다. 석탑 주변에는 석등대석(石燈臺石)·불상대석(佛像臺石)·장대석(長臺石) 등의 유구(遺構)가 흩어져 있어 당시만 해도 법수사가 해인사에 버금가는 대규모 사찰이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나 기록은 기록일 뿐이다. 대가람이었다고는 하나 사역이 눈에 보이는 산비탈에 지나지 않으니, 그 규모를 상상하기 어렵다.

 

석탑의 높이는 5.8m, 2중의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는데, 상륜부(相輪部)는 없어졌다. 탑은 규모가 작아지고 하층 기단이 높고, 안상(眼象)이 음각된 점 등의 9세기 후반기 특징을 보인다. 그러나 옥개석의 층급받침이 5단인 점 등은 전형적인 신라 석탑의 모습이어서 사찰 창건 시기인 9세기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한다.

 

아래층 기단의 네 면에는 3구씩의 안상(眼象 : 사람의 눈처럼 새긴 모양)을 조각하였고, 위층 기단은 각 면의 모서리와 가운데에 기둥 모양의 조각[우주(隅柱 : 모서리 기둥)와 탱주(撑柱 : 안 기둥)]을 두었다. 탑신은 몸돌 모서리마다 기둥 모양을 새겼다. 옥개석(屋蓋石:지붕돌)은 밑면의 받침이 5단이며, 네 귀퉁이가 위로 들려 있다. 모서리에는 모두 풍경구멍을 내어놓았는데 이는 풍탁(風鐸), 또는 풍경(風磬) 등의 장식을 매달거나 부착하기 위함이다.

 

절터를 지켜온 돌탑, 조형미와 학술가치로 ‘보물’ 지정

 

꼭대기에는 작고 네모진 받침[노반(露盤)] 위로 엎은 그릇 모양의 장식[복발(覆鉢)]만이 남아 있다. 비록 상륜부가 없으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다. 탑은 1975년 12월 30일 경상북도 유형문화재 제86호로 지정되었으나 2010년 7월 5일 보물로 승격 지정되었다. 지정 이유는 법수사지 삼층석탑이 통일신라 후기에 조성된 탑으로 추정되고, 주변의 빼어난 경관과 함께 법수사지의 위치를 지키고 있으며, 우수한 조형미를 가지고 있어 역사적, 예술적, 학술 가치가 크다는 것이었다.

 

<경산지(京山誌)>에는 도은암(道恩菴), 진현암(晉賢菴), 백운암(白雲菴), 일요암(日曜菴) 등의 암자가 있었다고 하나 이름만 전해질 뿐 그 구체적 장소는 알 수 없다. <해인사지(海印寺誌)>에 따르면 법수사지에 봉안되었던 목조 비로자나불상은 백운리 용기사(龍起寺)로 옮겨졌다가 절이 폐사되면서 1897(고종 1)년 당시 해인사 주지였던 범운선사가 해인사 대적광전(大寂光殿)에 주존으로 봉안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현재 대적광전에 봉안된 목조 비로자나불 좌상과 복장유물은 2012년 보물로 지정된 다른 불상이다.

 

삼층석탑은 보기보다 훨씬 날렵한 모습으로 솔티재 아랫마을 내려다보고 있다. 특별한 장식이 없는 단순한 구조의 돌탑은 무겁게 가라앉아 안정적이다. 이 돌탑이 견뎌온 1천2백 년의 세월이 응축된 모습일까. 그리 높은 탑이 아닌데도 사역의 중심이 되어 좌중을 제압하고 있는 듯한 기품을 내뿜는다.

▲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절터 발굴조사 결과 6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어 건물지를 구획하고 표지를 붙여놓았다.

홀로 우뚝 절터를 지켜온 돌탑의 기품

 

2015년부터 2016년까지 진행된 절터 발굴조사 결과 6개의 건물지가 확인되어 건물지를 구획하고 표지를 붙여 놓았다. 시간이 있다면 이 절터에 하염없이 앉아서 소슬한 바람 속에 거기 허물어진 건물을 한 채씩 새로 지어 올릴 만하다. 그러나 따가운 햇볕 속에서 오래 머물기는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발굴조사로 확인한 건물지는 1번에서 6번까지 번호를 붙여 두었을 뿐, 그곳이 어떤 건물이었는지는 추정조차 기록하지 않았다. 그러나 석탑 뒤편의 꽤 너른 장방형의 건물지는 대체로 금당일 가능성이 크다. 여기엔 발굴된 부재가 아닌 새로 만든 주춧돌을 박아 놓았다.

 

그러나 앞서도 말했듯, 드러난 건물지에 원래 있던 건물을 모두 세운다고 해도, ‘9금당, 8종각’은 무리다. 도로 위 가야산 쪽으로나, 탑 아래 백운리 마을 쪽으로 사역이 더 확대되지 않는 이상 말이다. 물론 사찰의 영역이 오늘날처럼 평면 위에 전개되는 것은 아니다. 산비탈이라 해도 여기저기 전각이 세워질 수 있으니 지금의 절터 아래위로 드넓게 사역이 전개되었을 수도 있긴 하다.

▲ 마을의 당산나무 앞에 서 있는 법수사지 당간지주. 법수사지 석축으로부터 100m쯤 아래 마을에 있다. ⓒ 성주군청
▲ 겨울철의 법수사지 당간지주. 답사 때 빠뜨려서 부득이 자료 사진을 가져왔다. ⓒ 문화재청

일행이 있어 서둘러 절터를 떠나면서 나는 탑 아랫마을 쪽에 있는 당간지주를 빠뜨렸다. 마을의 당산나무 아래 세워진 당간지주는 절에서 법회 같은 행사나 의식이 있을 때 깃대가 잘 설 수 있도록 지탱해주는 돌기둥이다. 깃발을 ‘당(幢)’이라 하고 깃대를 ‘당간(幢竿)’, 당간을 지탱해주는 돌기둥이 ‘당간지주’다.

 

법수사지 당간지주는 석탑 아래 석축에서 100m쯤 떨어진 곳에 있다. 당간지주는 사찰 입구에 세우니 이로써 법수사의 규모를 짐작할 수는 있겠다. 나그네 눈에는 범상한 돌기둥에 지나지 않으나, 법수사지 당간지주는 전체적으로 우아하고 간결·단아한 지주다.  법수사지 당간지주는 당간지주 계보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된다고 해서 경상북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2022. 7. 11. 낮달

 

[성주의 불탑] ① 동방사지 칠층석탑(성주읍 예산리)

[성주의 불탑] ③ 보월동 삼층석탑(수륜면 보월리)와 심원사 삼층석탑(수륜면 백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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