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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시간의 복기’와 ‘글쓰기’로 마감되는 여행의 발견

by 낮달2018 2021. 2.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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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시민기자의 ‘지각 여행·답사기’ 쓰기

▲ 2019년 지리산 자락을 여행하면서 승용차 대시보드에 탐방지도를 만들어 붙이고 갔는데 생각만큼 도움이 되지는 않았다.

여행의 ‘시작과 끝’은 어디에서 어디까지일까. 형식으로 보면 그것은 집을 떠나는 순간에 시작하여 다시 출발지로 돌아옴으로써 끝나는 것이긴 하다. 그러나 어느 날, 여행지 한곳을 마음에 담아두고 가끔 거기로 달려가거나 돌아와 아쉬움으로 그 여정을 되돌아보는 ‘마음의 행로’는 여행의 어디에 해당할까.

 

낯선 곳으로 집을 떠나고, 돌아와 사진첩에 여정을 갈무리하며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는 ‘여행의 공식’은 십몇 년 전에 <오마이뉴스>에 답사기 몇 편을 싣게 되면서 바뀌기 시작했다. 탐승(探勝)과 휴식을 위한 여행이든, 유적이나 역사 관련 답사든 내게 그것은 돌아온 것만으로는 끝나지 않는다. 내 여행은 적지 않은 시간과 씨름한 끝에 몇 편의 글로 정리되어야만 비로소 마감되기 때문이다.

 

내 여행은 시간을 복기하는 글쓰기로 마감된다

 

그런 뜻에서 2016년 4월에 다녀온 유럽 여행과 지난해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路程) 답사는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이런저런 이유로 여행기 쓰기를 미적대다가 몇 년을 흘려보내 버린 탓이다. 내 유럽 여행은 이탈리아의 베네치아와 스위스 취리히에 멈춰져 있고, 임정 노정을 따라간 길은 아직 중국 땅 마지막 임정의 도시 충칭(重慶)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여행을 마감하는 글쓰기는 때론 성가신 일일 수도 있긴 하다. 그러나 사진을 정리하면서 재현되는 시간의 복기(復棋)는 여행을 새롭게 바라보게 되는 순간이다. 사진은 때로 촬영자의 의도와는 다른 분위기와 느낌을 재생산해 낸다. 그것을 뷰파인더에 담을 때의 느낌과 재생산된 인상이 어우러지면서 환기되는 정서는 여행의 기술(記述)에서 마치 숨은 보석과도 같다. 나는 그 전 과정을 ‘시간의 복기’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진은 어디까지나 보조재일 뿐이다. 떠나기 전에 여행지에 관한 정보를 찾아보고 갈무리하는 건 노련한 여행자에겐 필수일 것이다. 그러나 여행이 계획대로 이루어지는 법이 어디 있는가. 둘러보아야 할 데가 한두 군데가 아닌 이상, 여행 전 공부는 대체로 용만 쓰다가 제풀에 지쳐 버리기 쉽다.

 

돌아와서야 미루어둔 공부를 시작할 수밖에 없는 이유인데, 그 과정이 만만치 않다. 인터넷에 정보가 넘치는 시대라 하지만, 가공하지 않은 정보를 단순히 복제하는 것으로 여행과 답사가 기술될 수는 없는 까닭이다. 여행 후 글쓰기를 미루는 까닭은 이런 공부의 부담이나, 저마다 의미 있는 사실(史實)들의 맥락을 꿰어 세우는 일이 힘겹기 때문이다.

▲ 내 첫 지각답사기는 강원도 원주의 폐사지 기행이었다. 부론면의 거돈사지 삼층석탑(보물 제750호)

나는 때를 놓치고 뒤늦게 쓰는 글을 ‘지각답사기’라는 이름으로 부른다. 내 지각답사기는 2008년과 2009년의 답사 여행을 2010년에 기록하면서 시작되었다. 2008년 경남 산청에서 돌아본 남명 조식의 유적과 2009년 강원도 원주의 흥법사·법천사·거돈사 등 세 폐사지 기행이었다. 그때 블로그에 쓴 지각답사기의 변이다.

 

(……) 답사하고자 한 유적지가 언제나 내 뜻대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미리 파악한 정보가 유적의 변화를 담고 있지 않을 때도 있고, 수백 장의 사진을 찍지만, 촬영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다. 무엇보다 돌아와서야 빠뜨린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은 오래 마음에 앙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각답사기’를 쓰게 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주말을 이용해 다녀온 여행, 돌아오면 일상이 한가하게 차근차근 답사기를 쓸 수 있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주가 흐르고 나면 필경 그 답사기는 미완의 상태로 컴퓨터에 묵은 파일로 잠자게 되는 것이다.

결국 그것 때문에 철 지난 답사기를 쓰게 하기는 하지만, 시간은 괜찮은 ‘스승’이다. 다녀와서 금방은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사진과 거기 담긴 느낌들을, 한 해쯤 후 한결 그윽하게 하는 것도 역시 시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강파른 마음의 모서리를 다스려주는 것일까. 훨씬 넉넉한 마음으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복기하는 순간은 행복하다.

 

2014년 1월, 우리 가족은 3박 4일간 일본 홋카이도를 다녀왔다. 여행기를 쓰다가 이런저런 일에 치여 끝을 맺지 못한 글은 이듬해 2월에야 <오마이뉴스>에 실렸다. 기사 끝 ‘덧붙이는 글’에서 나는 ‘기억의 복기’가 “될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 맛보았던 북해도의 추위와 풍경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결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쩌면 우리의 경험과 기억도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라고 썼다. (관련 기사 : 삿포로에서 만난 최고의 끼니는 편의점 도시락)

 

2016년 4월에는 퇴직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유럽 여행을 다녀왔었다. <오마이뉴스>에 첫 여행기가 실린 건 5월이었고 7월에는 다섯 번째 여행기가 올랐다. 여섯 번째 여행기는 ‘바티칸’을 쓸 차례였는데, 박물관 내부 사진을 고르다가 나는 길을 잃었다. 어디가 어딘지 헛갈리기 시작한 나는 인터넷을 샅샅이 뒤지고도 답을 찾지 못하고 결국 나가떨어졌다. 그런 상태에서 글을 계속 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관련 기사 : 로마, ‘드라마틱’과 ‘로맨틱’ 그 사이 어디쯤)

▲ 2014년 일본 홋카이도 비에이 여행에서 만난 설원과 숲. 언젠가 다시 가고 싶은 여행지 가운데 하나다.
▲ 끝내지 못한 여행, 2016년 4월 이탈리아 베네치아.
▲ 끝내지 못한 유럽여행의 막바지 스위스 취리히(2016년 4월)

나머지 유럽 여행기는 2017년에 바티칸 이야기와 2020년의 스위스 루체른 기행을 쓰면서 이어졌다. 묵어도 한참 묵은 여행기를 기사 대신 개인 블로그에 올리는 것으로 나는 그 여행을 ‘일부 마감’했다. 그러나 여정의 막바지인 베네치아취리히 여행기는 ‘아직’이니, 이 여행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아직도 끝내지 못한 여행, 유럽(2016)과 임정 답사여행(2020)

 

내 지각 여행기의 끝판왕은 2018년 여름에 다녀온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이다. 항공권만 사면 모시겠다는 아이들의 권유에 따라나선 러시아 여행은 몇 차례의 나라 밖 여행 중 최고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아이들을 따라다니면 그처럼 편안하다는 걸 깨달은 여행은 미적대다 마무리하지 못핬다.

 

지난해 여름에 이태 만에 ‘지각 여행기’를 <오마이뉴스>에 송고한 것은 그렇게나마 러시아 여행을 끝내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오마이뉴스> 편집부에선 계절이 바뀌기 전인 3개월 안의 여행(국외는 1년 이내)이라야 기사로 채택한다는 규정상 기사를 싣기 어렵다고 알려 왔다. 백번 옳은 말이었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이 기사를 회수했다. 소비에트 혁명 전후의 러시아 근대사를 살펴본 여행기 다섯 편을 블로그에 싣는 거로 그 여행을 마감한 것은 지난해 8월 말께였다. [관련 기사 : 예르미타시, 러시아 제국의 ‘영광’과 혁명의 ‘격랑’ 사이]

 

그리고 지난해 1월, 나는 2015년에 못다 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 답사’를 다녀왔다. 동행한 젊은 역사학도가 발 빠르게 기사를 연재하기 시작했으므로 나는 느긋하게 그의 기사를 읽으며 내 기억 속의 답사가 숙성되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 2월, 나는 황푸군관학교광저우봉기, 그리고 한국광복진선청년공작대 이야기까지 세 편의 기사를 썼다.

 

이 철 지난 기사는 모두 <오마이뉴스> 주화면 맨 아래에 실렸다. 80년도 전의 역사를 소환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이미 퇴락해 버린 유적을 더듬으며 역사의 맥락을 복원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조금씩 다른 자료를 이것저것 견주어 보면서 독립운동사를 재구성하는 기분은, 그러나 쏠쏠하다. 몇 갈래로 이어지는 개별 사실이 하나로 귀결되는 과정을 확인하는 ‘공부의 즐거움’ 때문이다.

 

비슷비슷한 기사가 넘칠 뿐 아니라 오래된 역사 이야기는 독자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지만, 이삼일쯤 씨름해 쓴 기사의 조회 수가 고작 1천 안팎에 머무는 건 안타깝다. 공연히 귀중한 지면을 낭비하는 게 아닌가 싶은 자괴감에도 철 지난 답사기를 이어가는 것은, 일화 중심의 단편적 사실보다 그걸 아우르는 형식의 글이 누군가에겐 도움이 되리라 믿는 까닭이다. 무엇보다도 답사가 마침내 종착점에 이른다는 사실에 나는 크게 위안받는다.

 

임시정부 노정 답사기는 치장(綦江)을 거쳐 임시정부를 마무리하는 충칭 시기를 다루는 서너 편으로 마무리될 듯하다. 그걸 끝내면 미뤄둔 2016년 유럽 여행의 나머지 여정, 베네치아와 취리히를 복기함으로써 오래 끝내지 못한 여행을 마무리할까 싶다. 그것은 게으른데다가 날이 갈수록 굼떠지는 몸을 추스르며 떠나는, 내 뒤늦은 ‘여행의 발견’이다.

 

 

2021. 2. 19. 낮달

 

 

 

내가 '지각 여행기'를 쓰는 이유

2018년 러시아 여행기는 채택되지 않았더라도... 글쓰기로 비로소 끝나는 나의 여행

www.ohmy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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