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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상트페테르부르크] 그 낯선 도시에서의 5일간

by 낮달2018 2020. 8. 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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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⑤  트롤리 버스와 안내원,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관람, 그리고 미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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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식탁. 우리는 차와 맥주를 마시고, 입맛에 맞는 메뉴를 찾는데 부심했다.

여행은 일련의 과정이다. 여행이 단순히 마음에 둔 유적이나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으로 한정되지 않는 까닭이다. 그것은 길을 나서면서부터 돌아올 때까지 여행자가 겪거나 보고 들은 것은 물론이거니와 사소한 부딪힘, 감정의 파문, 인상과 느낌까지를 포괄한다.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떠나면서 설레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우리 내외는 물론이고,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나는 그 설렘이 구체적이지 않았다. 특별한 기대나 마음의 결에 맺힌 곳이 하나도 없었다는 뜻이다. 나이 듦 탓이었을까. 아마 내겐 새로 만나는 어떤 풍경이라도 담담하게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여행의 과정에서 나는 최초의 사회주의 혁명 국가였던 소련이 독립 국가 러시아 연맹으로 전신하면서 바뀐 현실이 무척 궁금했다. 체제가 바뀌는 것은 인간의 일상을 어떻게 돌려놓는지, 그리고 그것은 어떤 방식으로 드러나는지를 확인하고 싶어 했다.

 

그러나 단지 닷새간의 여행으로 그것을 이해하는 것은 가능한 일이 아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 머무는 동안, 단편적으로 내가 겪은 견문과 소회에 그칠 수밖에 없는 이 글은 전적으로 내 개인적 느낌과 인상, 즉 주관적 이해에 의존한 것이라는 점을 미리 밝혀둔다.

 

냉방과 버스 그리고 안내원

▲ 상트페트르부르크의 트롤리 버스. 전기로 움직이는데 궤도가 따로 없다. 버스 요금은 안내원이 차내를 돌아다니며 받았다.

이태 전의 유럽 패키지여행에서도 느낀 일이지만, 유럽은 우리가 상상하는 것보다 훨씬 낮은 수준의 아날로그 사회였다. 국내에서는 일상인 디지털화에 비기면 유럽의 그것은 초보적인 수준이다. 지중해의 작은 나라 몰타에서 영어 연수를 받았던 딸애는 한국의 디지털화를 이야기하면 거기 사람들은 사실이냐며 반문하곤 했다고. 그게 2011년도 일이다. 스마트폰으로 버스 운행 정보를 받는다는 이야기일 뿐이었다는데…….

 

한여름에 들른 유럽에서 한국인들이 가장 아쉬워하는 것은 국내와 달리 업소나 대중교통 따위에 냉방이 일반화되어 있지 않다는 점이다. 평균 기온이 25도 정도여서 우리는 덥다고 느끼는데도 현지인들은 태연하게 그 더위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파리의 택시에도 기사는 창문을 열었을 뿐, 에어컨을 틀지 않았다. 파리는 물론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음식점에서 우리는 한 번도 쾌적하게 식사하지 못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는 버스도 마찬가지였다. 비교적 짧은 거리였는데도 더위가 만만찮았고, 아내가 특히 못 견뎌 했다. 내가 사는 구미만 해도 시내버스에 냉방이 그야말로 '빵빵하게' 들어오는데 말이다. 그러나 승객들은 일상처럼 더위를 받아들이며 거기 적응하고 있었다. 아내가 버스 타는 걸 꺼리자, 이후 우버 택시를 이용하게 되어 우리가 버스를 이용한 것은 두 번뿐이었다. 

 

버스에는 놀랍게도 안내원이 있었다. 익숙한 이름인 ‘안내양’이라 말하지 못하는 것은 안내원이 젊은 여성도 있었지만, 노년의 여성도 있었기 때문이다. 고도 비만이 틀림없는 거구의 안내원은 족히 60대는 되어 보였는데, 그는 복잡한 차내를 돌면서 요금을 받고 손에 쥔 동그랗게 만 승차권을 찢어서 돌려주는 것이었다.

 

7, 80년대 한국에서나 볼 법한, 시간 지체의 풍경 앞에서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몇 안 되는 나라 중 하나인 러시아에 이런 전근대적(?) 모습을 보이는 게 기술이나 시스템의 부족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었다.

▲ 상트페테르부르크 거리. 화려한 색상의 투어버스가 보인다.

중국을 여행해 보면, 어떤 기관이나 건물 주변에는 분명 거기 직원인데, 마땅히 할 일이 없는 듯한 인력들이 수시로 눈에 띄곤 했다. 그게 사회주의 국가 중국이 인민에게 일정하게 일자리를 제공하는 방식일까. 누구한테 물어보지는 못했지만, 러시아의 그것도 사회주의의 유습이 아닌가 하고 제멋대로 생각하고 있다.

 

소련 해체 후 러시아… 사회주의의 일자리 방식?

 

예르미타시 박물관에도 방방이 의자에 앉아서 안내 겸 전시물을 지키고 있는 노년의 여성들을 볼 수 있었는데 그들도 시내버스의 안내원과 같은 역할은 아니었을까. 그러나 아무도 사회주의의 붕괴 이후, 소련에서 러시아로 바뀐 이 나라 인민의 삶을 몇 마디 말로 규정할 수 없다.

 

소련의 해체로 시장 경제와 경쟁이 도입된 뒤, 인민들이 겪은 생활 수준의 변화는 공황에 가까웠다. 2014년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러시아 시민의 57%가 소련의 붕괴를 후회했고, 후회하지 않은 비율은 30%였다는 것은 그 일면이다. 빈곤과 경제적 불평등 문제도 심각했다.

 

그런 한편으론 러시아가 “브릭스(BRICS) 국가 가운데 가장 두텁고 강한 구매력의 중산층을 보유하고 있으며 최근 빠른 성장 속도를 보여 2015년까지 전체 가구의 82%가 중산층이 될 것”이라는 전망과 평가도 존재한다. 시장 경제의 가속화를 따르지 못하는 민주주의의 지체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러한 양면성은 우리가 묵었던 낡은 아파트와 그 옆의 명품 판매 가게라는 대조적 풍경과 이어진다. 개축한 4층을 빼고 나머지 층들도 마치 슬럼처럼 비어 있었는데, 대로변에는 내로라하는 명품 가게가 즐비했다.

▲ 넵스키 대로의 명품 가게들. 이들 건물 안쪽에는 퇴락한 아파트들이 비어 있었다.

마린스키 극장의 발레 공연

 

우리가 마린스키 극장으로 발레를 보러 간 건 셋째 날 저녁이었다. 마린스키 극장은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역사적인 오페라, 발레극장으로 러시아에서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과 비교되는 세계 최정상급 오페라 발레극장이다.

 

원래 이름이 ‘황실 마린스키 극장’(1860~1920)이었던 이 극장은 러시아 혁명 이후 ‘국립 오페라와 발레 아카데미’(1920~1935)로 불리다가 1934년 암살된 혁명가 세르게이 키로프의 이름을 따서 ‘키로프 오페라와 발레 아카데미 극장’(약칭 키로프 극장, 1935~1992)이라 불리었다.

▲ 마린스키 극장의 외관은 그 명성에 비하면 매우 소박했다. 극장 소속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이다.

헌법에서  언론과 출판의 자유를 명시한 소련에서 언론과 표현의 자유는 사실상 검열로  제약되었고 출판은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러나 발레와 클래식 음악(쇼스타코비치 등)에서 높은 수준을 유지해 왔으며 정부 차원에서 유명한 발레단과 오케스트라를 후원했다.

 

므라빈스키가 지휘하는 레닌그라드 필하모닉 오케스트라는 명연주를 남겼고, 모스크바의 볼쇼이 극장에 소속 볼쇼이 발레단과 마린스키 극장 소속 마린스키 발레단은 세계 최고의 발레단으로 인정받는다. 고르바초프 시대 이후에는 대중문화도 크게 발전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은 소련의 붕괴와 함께 원래 도시와 극장 이름을 되찾았고, 러시아 발레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비록 공산주의 이념을 선전하는 수단에 불과했지만, 소련의 수준 높은 공연 문화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공산주의 체제 덕분이기도 했다. 아무리 운영을 잘하는 극장이라도 관람료를 인상할 수 없었으며, 이는 노동자들이 공연 문화생활을 누리는 바탕이 되었다.

▲ 우리가 관람한 발레는 스트라빈스키 (1882~1971) 의 관현악곡 '페트루슈카'(1911)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극장 광장에 있는 마린스키 극장은 1860년에 건축된 건물로 그 명성에 어울리지 않게 소박한 외관을 하고 있었다. 호화롭지도, 거대하지도 않은 수수한 모습의 극장에 입장하는 데는 3천 루블, 우리 돈으로 5만 원짜리 표( 2층 오른쪽 3번째 박스)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것은 실제로 중하위급의 티켓에 불과했다.

 

안으로 들어갔을 때야 비로소 외관과는 다른 호화로운 내부장식을 한 극장의 본 모습이 드러났다. 5층으로 이루어진 극장의 좌석 수는 1,774개, 청색과 백은색(白銀色)의 빛을 바탕으로 한 내부장식은 발레의 역사성과 유럽의 공연 문화를 압축한 듯했다.

 

아이들을 따라 지정된 자리에 앉아서 우리는 촌닭처럼 극장 내부를 둘러보기 바빴다. 층마다 빽빽한 이 자리를 누가 다 채우나 싶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그 자리는 거짓말처럼 가득 찼다. 발레 공연이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꽤 졸았던 것 같다. 아내도 마찬가지라고 했으니 아이들만 공연을 지켜보았던 셈이다.

 

돌아와서야 우리가 본 공연이 스트라빈스키(1882~1971)의 관현악곡 ‘페트루슈카’(1911)였다는 걸 알았다. 마법사가 짚으로 만든 연약한 광대 인형 페트루슈카에게도 희로애락과 사랑의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슬픈 이야기였는데, 피곤해서 졸다 보니 공연이 끝나 있었다.

 

미련, 상트페트르부르크

▲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국제공항에 도착하여 이용한 우버 택시는 국산 현대차였다.

닷새는 잠깐이다. 페트르고프 궁전을 다녀와 푹 쉰 다음 날 아침 일찍 우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풀코보 국제공항으로 나가 9시 10분발 비행기를 탔다. 여행의 미련이란 돌아와서야 깨닫게 되는 법이다. 나는 여행기를 쓰면서 우리가 푸시킨 시도 건너뛰었고, 레닌그라드 방어 영웅기념관도 들르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꼼꼼히 복기하면 얼마나 많은 미련이 이어지게 될까. 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지하철도 타 보지 못했다. 미리 좀 더 정교한 여행계획을 짰으면 어땠을까 하는 미련은 상투적이긴 하지만,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여행자는 그런 미련을 갈무리하면서 여행을 끝낸다. 아니다, 그런 미련과 아쉬움 때문에 그 여행의 기억은 오래 가슴에 살아 있는 건지도 모른다.

 

 

2020. 8. 25. 낮달

 

[상트페테르부르크 역사 기행]

① 예르미타시, ‘피의 일요일’과 ‘2월·10월 혁명’

② 카잔 성당과 피의 구원 성당,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③ 예카테리나 궁전과 여제의 시대

④ 표트르 대제와 페테르고프 궁전

이삭, 파리에서의 낮과 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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