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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문명의 철길 위에 펼쳐지는 ‘슬로우’ 바이크

by 낮달2018 2020. 9.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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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강원도 정선 레일바이크 탑승기

▲ ‘영원한 평행선’으로 기억되는 기찻길.  레일바이크를 타면 이 철길을 마주 보면서 달리게 된다.

철길을 걸어 보았는가. 흔히들 ‘영원한 평행선’이라는 진부한 비유로 기억되는 기찻길을. 19세기의 마지막 해에 태어나 굉음을 지르며 들판을 달려오는 기차를 사람들은 ‘쇠말[철마(鐵馬)]’이라고 불렀다. 여전히 봉건 시대의 질곡을 채 빠져나오지 못한 시기에 그것은 마치 이후 물 밀듯 들어온 낯선 문명의 전초병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기관차는 증기에서 디젤로, 그리고 전기로 가파르게 발전해 왔지만 변하지 않은 것은 ‘기차가 철로를 따라 달리고 역에서만 선다’라는 점이다. 그래서일까. 기차는 ‘떠남’의 의미를 매우 분명하게 드러내 주는 운송 수단이다. 평행으로 이어져 소실점 저편으로 사라져 가는 철길은 ‘부재’의 의미를 새삼 환기해 주는 것이다.

 

기차여행이 버스나 승용차 여행 등과 다른 점은 그 여정이 ‘나’의 통제 밖에서 이루어진다는 데에 있다. 쉬지 않고 가는 무정차라 하더라도 버스는 불의의 상황이면 어디서든 그 운행을 멈출 수 있다. 그러나 승객들과 같은 공간에 있는 버스 운전사와 달리 기차의 기관사는 승객들의 시야에 없다.

 

철길을 달리되, 그 궤도 주행을 승객들이 통제할 수 있다면 어떨까. 그것은 기왕의 철도여행과는 다른 새로운 여행의 즐거움을 제공하지 않겠는가. 강원도 정선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 달리는 ‘레일바이크(railbike)’는 그런 소박한 상상력에 대한 응답의 일부다.

 

레일바이크는 페달을 밟아 철로 위를 달리는 네 바퀴 자전거로 철도(rail)과 자전거의 약칭(bike)을 합친 말이다. 레일바이크는 미국 서부의 골드러시 시절에 부설된 철로가 그 기능을 잃자 버려진 철로에서 사람들이 바이크를 즐기기 시작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정선 레일바이크도 용도 폐기된 정선선의 일부 구간(아우라지~구절리)의 철로를 이용한 관광 상품이다. 폐선된 철로, 또는 열차를 운행하지 않는 선로에 레일바이크 시설을 설치 운영하는 곳으로 정선 레일바이크 외에도 문경선과 가은선 지역의 폐선을 이용하는 문경 레일바이크가 있다.

▲ 구절리역에 대기 중인 레일바이크(2인용).  레일바이크는  7.2km 를 달려 아우라지역에 닿는다 .

관광 상품이라고는 하지만 사실 자전거 모양의 레일바이크는 의자와 바퀴, 그리고 페달이 전부다. 2인용은 제대로 안장을 갖춘 빨간 차체가 날렵하기라도 하지만 4인용은 뒷좌석에만 페달이 설치되어 있는 누런색의 좀 엉성한 모양새다.

 

▲ 구절리역의 레일바이크 (4인용)

그뿐인가. 앞서 ‘승객의 통제’ 운운했지만, 레일바이크는 전적으로 페달을 밟는 승객의 근력에 의해 움직이고 나아가니 그 ‘통제’는 지극히 원시적이다. ‘속도’로 대표되는 근대 문명의 상징이랄 수 있는 철도 위에서 오직 인간의 근력에 의지해 움직이는 ‘슬로우’ 바이크는 마치 하나의 역설 같아 보인다.

 

강원도 여행을 떠난다고 했을 때 내게 동료는 레일바이크를 타는 정선행을 ‘강추’했다. 그러마고 대답하긴 했지만 나는 정작 ‘아우라지’를 떠올렸을 뿐, 그 제안을 그리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새삼스레 그런 주책을 떨 일이 무어냐는 심산이었을 것이다.

 

출발 전날 밤에 정선레일바이크 누리집에 들어갔으나 예약에 실패했다. ‘인터넷 예약은 3일 전’에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누리집을 둘러보고서야 이 철길 자전거의 인기가 대단해서 주말 같은 때엔 예약도 하늘의 별 따기라는 걸 알았다. 승차권은 현장 판매도 한다 해서 그걸 믿어보기로 했다.

 

영월을 거쳐 정선 아우라지에 도착해 점심을 먹으면서도 나는 레일바이크를 탈 수 있을지를 반신반의했다. 도대체 애면글면할 이유가 없었다. 타도 그만, 안 타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아이들의 반응도 마찬가지로 미지근했다.

 

“1인당 요금이 8천 원이라고요? 심한데요….”

“얘야, 놀이기구를 타는 요금을 생각해 봐라.”

“그거야 직원들이 직접 기구를 조종해 주기나 하지요. 이건 우리가 직접 바이크를 움직여야 하는데요?”

“구간이 7Km가 넘고 레일바이크를 빌려주잖니?”

“하여간에 무리해서 탈 건 없다는 거지요.”

“그래, 표 없으면 도리 없지, 뭐….”

 

구절리역을 향해 떠나면서도 여전히 우리 마음은 반반이었다. 표를 사지 못하면 바로 평창으로 넘어가겠다고 마음을 굳혔는데, 다행히 표를 살 수 있었다. 평일이었는데도 구절리역에는 적잖은 사람들이 레일바이크를 기다리고 있었다.

▲ 여치 한 쌍 포개어 엎디어 있는 모습을 형상화한 구절리역의 카페  ‘여치의 꿈’.
▲ 아우라지역까지 간 승객들이 타고 돌아오는 ‘정선 풍경 열차’
▲  정선 레일바이크는  7.2km 를 달려  40 분 후쯤에 아우라지역에 닿는다 .

구절리역의 플랫폼은 여느 역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다. 여러 갈래의 철길 위에는 열차 대신 노란색의 레일바이크가 줄지어 서 있었고, 한쪽에는 거대한 강철 다리와 더듬이를 가진 여치 한 쌍이 몸을 포개고 엎드려 있었다.

 

무궁화호 객차를 이용해서 만든 카페 ‘여치의 꿈’이다. 암놈(아래층)은 레스토랑, 수놈(위층)은 커피를 파는 카페다. 우리는 거기서 찬 원두커피를 마셨다.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로가 아닐까 했지만 뜻밖에 커피 맛은 훌륭했다.

 

출발 시각이 가까워지자 아우라지역에서 ‘정선 풍경 열차’가 돌아왔다. 앞서 출발한 승객을 태운 두 량의 객차를 단 기관차 꽁무니에 빈 레일바이크가 매달려 있다. 승객들은 레일바이크를 타고 아우라지역까지 갔다가 이 풍경 열차로 돌아오는 것이다.

 

우리가 탄 4인용 레일바이크는 앞에서 서너 번째로 구절리역을 떠났다. 아이들이 뒷좌석에 타고 페달을 밟았다. 덕분에 우리 내외는 앞 좌석에서 여유롭게 주변 풍경을 감상하는 호사를 누렸다. 너희들이 이렇게 처음 효도를 하는구나, 하고 나는 우스개를 했다.

 

구절리역에서 아우라지역까지는 7.2km, 보통 레일바이크는 15~20km의 속도로 운행할 수 있다고 한다. 일부 구간을 빼면 대체로 약 2%의 내리막길이어서 그리 큰 힘이 들지는 않았다. 레일바이크는 아우라지강으로 이어지는 송천을 따라 각각 세 개의 터널과 다리를 지나고 건너 종착역에 닿는다.

▲ 정선 레일바이크는 아우라지강으로 합류하는 송천을 따라 달린다 .
▲ 정선 레일바이크는 세 개의 터널을 지난다. 초가을의 터널 속 서늘한 한기가 기분 좋게 감긴다 .

앞차와의 거리는 30m, 출발한 지 불과 몇 분 만에 우리는 이 철길 자전거가 예사롭지 않은 감동을 준비하고 있다는 걸 눈치챘다. 초가을의 햇살이 하얗게 부서지는 강변을 따라 일직선으로, 또는 좌우로 굽는 길을 따라 바이크는 시원하게 내달았다.

 

산그늘을 지날 때는 선득하다 싶을 만큼 청량한 느낌이 온몸을 감쌌고, 어두운 터널을 지날 땐 서늘한 한기가 드러난 살갗에 부드럽게 감겼다. 우리 내외는 물론이거니와 열심히 페달을 밟고 있는 아이들 입에서도 연이어 감탄사가 끊이지 않았다.

 

“이거, 정말 괜찮은데요. 8천 원…, 받는 게 무리는 아닌데요.”

“그럼, 어디서 8천 원으로 이런 기분을 사겠냐?”

 

무엇보다 레일바이크의 강점은 맨몸으로 자연을 만날 수 있게 해 준다는 점이다. 기차를 타면 승객들은 연변의 풍경만을 볼 수 있을 뿐, 눈앞으로 다가오는 철길을 마주 볼 수 없다. 그러나 레일바이크 위에서 우리는 어떤 장애물도 없이 다가오는 평행의 철로를 정면으로 마주하고 그 속도감을 몸으로 느낄 수 있었다.

 

맨몸으로 느끼는 속도감은 신선하다. 불어오는 바람, 연변의 아름다운 산과 숲, 논밭과 마을 등이 연출하는 따뜻하고 정겨운 풍경은 덤이다. 거기다 페달을 밟는 적당한 노동까지 곁들이니 가을 강변을 달리는 관광으로 ‘이보다 더 좋을 순 없다.’

 

승객들이 페달을 밟아 움직이니 전적으로 이 바이크는 우리의 통제 아래 있는 거였다. 그러나 필요에 따라 아무 데나 바이크를 세우거나 쉴 수 없다는 점은 기차와 다르지 않았다. 수십 대의 바이크가 차례로 출발해 정해진 시간 안에 종점에 닿는 시스템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앞자리에 탄 나는 열심히 주변 풍경을 렌즈에 담았지만 정작 우리 자신을 찍을 수는 없었다. 위태한 대로 나는 몸을 돌려 간신히 아이들 사진 몇 장을 찍을 수 있을 뿐이었다. 기차가 다니던 철길을 페달을 밟는 자전거로 주행할 수 있다는 특별한 감흥이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고도 남았다.

▲ 정선 레일바이크는 연변의 아름다운 산과 숲 ,  논밭과 마을을 거친다 .
▲ 꽤 긴 터널을 지날 때 승객들은 잠깐 타임머신을 타고 떠나는 느낌을 받을지도 모른다.

금방인 듯했는데 우리는 약 40분 후에 아우라지역에 닿았다. 저 멀리 아가미를 벌린 거대한 물고기 모양의 구조물이 승객들을 반겼다. 천연기념물 제259호로 지정된 잉어과 민물고기인 어름치를 형상화한 열차 카페 ‘어름치의 유혹’이다.

 

아우라지역 대합실에서 우리는 잠깐 쉬었다. 아우라지 강가로 나가 아우라지 처녀 상을 만나는 일은 다음 기회로 미루기로 했다. 정선 아리랑의 고장, 송천과 골지천이 어우러진다는 아우라지 강, 그 강을 사이에 두고 만나지 못했다는 남녀의 사랑 이야기는 뒷날 만나기로 했다.

 

풍경 열차는 구절리역으로 돌아가는 귀환 열차다. 객차 앞뒤 쪽은 연변 풍경을 감상할 수 있도록 창을 터놓았다. 사람들은 마치 60년대로 돌아간 듯 고분고분 무언가 추억을 떠올리는 표정으로 창밖 풍경을 내다보고 있었다.

 

정선 레일바이크는 2010년 봄에 TV 프로그램 ‘1박 2일’에 방송된 이래 폭발적인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고 한다. 2005년 하반기 운행을 시작한 뒤로 지난해까지 관광객이 백만 명 넘게 찾았고 100억이 넘는 수익을 올렸으니 레일바이크는 코레일과 정선 지역에 효자 노릇을 톡톡히 하는 셈이다.

▲ 아우라지역에는 천연기념물 ‘어름치’를 형상화한 카페가 승객을 기다리고 있다.

가을이 깊어지고 주변의 숲과 강이 단풍으로 물들면 정선의 레일바이크는 또 다른 감동을 자아낼 터이다. 좀 춥기야 하겠지만 눈 내린 겨울날의 레일바이크도 각별한 정취를 더해 줄 것이다. 거기다 레일바이크를 즐기고 돌아가며 사람들이 ‘느림’의 미덕을 깨닫고 갈 수 있다면 최상의 여행이 될 수 있으리라.

 

구절리와 아우라지의 행정구역은 정선군 여량면이다. 여량은 ‘남을 여(餘)’, ‘식량 량(糧)’ 자를 쓰니 오곡이 풍성해 식량이 남아돌 만큼 여유롭고 인심 좋은 곳이라는 뜻이다. 사람들이 20리가량의 철길을 달리고 나서 푸근하고 넉넉한 마음으로 돌아갈 수 있다면 그건 전적으로 여량의 땅과 하늘이 주는 축복이라고 해도 좋을 터이다.

 

덧붙이는 글 | 정선 레일바이크는 하절기(3∼10월)는 하루 5회, 동절기(11∼2월)에는 하루 4회 운행한다.

 

2011. 9. 19. 낮달

 

 

 

조심, 터널 지날 때 딴세상으로 갈지도 몰라

[여행] 강원도 정선 레일바이크 탑승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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