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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임정 답사]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by 낮달2018 2021. 2.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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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광저우  ② 광저우 기의(起義)와 한중 로맨스, 조선의용대의 결성

▲ 능원 안의 기념탑. 총 든 손을 형상화한 탑신 아래 광저우기의 모습이 부조로 표현되었고 '광주기의열사 영수불허(불멸)'이라 적혔다.

둘째 날의 여정은 광주기의열사능원과 1921년 임정의 국무총리이자 외무총장이었던 신규식이 정식 외교 사절로 쑨원을 만난 동교장(東較場), 루쉰기념관 등의 순서로 진행되었다. 모두 한중 항일연대의 단초가 된 황푸군관학교로 이어지는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규식이 쑨원을 만나 임정의 정식 승인과 한국 학생들의 중국 군관학교 입교 등 독립운동 지원을 요청한 동교장은 이미 2만7천 규모의 광저우시 체육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사람들이 기억하든, 기억하지 못하든 역사는 그것 자체로 완결된 사실의 기록이다. 그러나 건물 외관만 둘러보고 돌아서는 여정은 씁쓸하다.

 

1927년 12월 11일 새벽에 시작된 광저우 기의(起義)는 3년 전 성사된 제1차 국공합작이 결렬되는 과정에서 일어났다. 소비에트 건립을 목표로 시작된 봉기는 중국공산당의 장타이레이(張太雷)와 예젠잉(葉劍英) 등이 현장을 지휘했고, 황푸군관학교의 교관과 구대장을 지낸 한인 공산주의자 최용건(1900~1976, 북한 부주석)이 참여 한인들을 이끌었다.

 

광저우기의, “이 전쟁은 동시에 우리의 조국을 방어하는 것”

 

혁명을 완성하고자 중국의 군벌들을 축출하려 했던 쑨원(孫文, 1966~1925)이 코민테른과 손을 잡은 것은 1924년이었다. 광저우에서 국공합작 논의가 이루어지면서 군 지휘관을 양성하고자 시 외곽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웠다. 국공합작의 성사로 많은 공산당원이 국민당에 가입할 수 있게 되면서 광저우는 바야흐로 혁명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쑨원 사후에도 국공합작은 이어졌는데, 1926년 황푸군교 교장 장제스는 북벌에 나서 본격적인 전쟁에 들어갔다. 1927년 4월, 상하이를 점령한 장제스는 전쟁을 멈추고 국민당 내 공산당원과 노동운동가 등 좌파 인사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국민당을 깨끗이 한다’는 ‘반혁명 청당(淸黨) 운동’(상하이 쿠데타)이었다.

 

한편, 소련의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의 실패와 함께 대중(對中) 정책을 비판해 온 트로츠키의 도전에 직면해 있었다. 이에 스탈린은 중국공산당에 중국 각지에서 무장봉기를 이어가 중국 내 한 개 성(省)이라도 점령하여 소비에트(해방구)를 선포하라고 지시했다.

 

8월 1일 저우언라이(周恩來) 등이 주도한 난창(南昌) 봉기는 국공 내전 중 공산당 군대가 국민당에 처음 맞서 싸운 전투였지만, 도시 점령 5일 만에 국민당군에 패퇴했다. 이에 중국공산당 중앙위원회는 8월 7일 한커우(漢口)에서 회의를 열어 농민의 무장봉기, 토지개혁을 결의하였고 농촌의 추수철에 맞추어 대대적인 봉기를 계획하였다.

 

그러나 9월에 시도된 후난(湖南), 광둥(廣東), 장시(江西), 그리고 후베이(湖北) 지역에서의 추수 봉기는 모두 실패했다. 하지만, 코민테른은 이에 그치지 않고 더 큰 봉기를 준비하게 되는데, 이 봉기가 광저우 기의였다. 새벽 2시에 시작된 봉기는 동이 트기 전에 시내 대부분을 점령했고, 상황이 끝난 12일 오후에 장타이레이는 광저우 공산 정부 설립을 공식 선언했다.

 

그러나 ‘광둥코뮌’으로 불린 이 소비에트는 13일, 장파쿠이((張發奎)의 국민당군이 광저우를 재점령하면서 삼일천하로 끝났다. 최용건은 김산과 오성륜, 양달부, 김성숙 등과 함께 황푸군교를 비롯한 중국 군관학교에 재학 중이던 한국인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를 지휘했다. 김산의 <아리랑>에 따르면 광둥에 있던 200명가량의 한인은 모두 봉기에 참여했다.

 

봉기 전야인 10일 밤, 자신의 여관방에서 한인 20여 명과 만나 봉기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면서 김산(장지락)은 봉기에 대한 설렘과 함께 이 전쟁이 ‘조국을 위한 싸움’이라는 사실을 확인했다. 그것은 봉기에 참여했던 한인들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이유이기도 했다.

 

“앞으로 몇 시간 안에 우리 중의 누군가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오로지 어떻게 하면 적을 때려 부술 수 있겠는가 하는 것만 이야기했다. (……) 조국을 생각할 때면 우리의 가슴은 미래로 치달았다. 이 전쟁은 동시에 우리의 조국을 방어하는 것이라고 느꼈기 때문이다.”  
      - 님 웨일즈·김산, <아리랑> 중 ‘광둥코뮌’

 

그러나 김산은 코뮌 중에 이미 혁명의 실패를 예감하고 있었다. 봉기는 성공했지만, 혁명의 실천 과제도, 조직의 규율도 없는 난맥상에다 적의 반격에 대한 대비도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예감대로 사흘 만에 코뮌은 좌절되었고, 김산은 광저우를 탈출했다.

 

코뮌의 좌절, 한인의 희생을 기린 ‘중조인민혈의정’

 

군벌 세력은 기의에 참여한 노동자, 농민, 군인 등을 대규모로 학살했다. 이들 5천여 명을 안장한 곳이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이다. 1955년에 광저우 시내 한복판에 웅장하게 조성한 이 능원에 1964년 중국 정부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을 세워 기의에 동참한 한인들과의 연대를 기렸다.

 

“중국과 조선 양국 인민의 전투로 맺어진 우의여 오래오래 푸르러라!(中朝兩國人民的戰鬪友誼萬古長靑)”

 

우리가 6·25전쟁 때 유엔군으로 참전한 우방 16개국을 ‘혈맹(血盟)’이라는 이름으로 부르듯, 최초의 소비에트 정부를 세운 광저우 기의에 동참해 함께 ‘피 흘린’ 조선인들과의 관계를 사회주의 중국은 ‘혈의(血宜)’라 표현한 것이다. 우리가 들렀을 때, 문구를 금빛으로 새긴 돌비 앞에 희고 노란 국화 꽃다발과 편지 봉투 한 장이 놓여 있었다.

▲ 광저우기의열사능원의 합장묘. 기의에서 희생된 5천여 명을 합창한 무덤이다.
▲ 광저우기의열사능원에 1964년 중국 정부는 중조인민혈의정(中朝人民血宜亭)을 세워 기의에 동참한 한인들과의 연대를 기렸다.
▲ 중조인민혈의정 돌비. 중한의 우의가 영원하라는 내용이 금빛으로 새겨져 있다.

봉기가 실패한 뒤, 이듬해 1월, 중국공산당 광저우시위원회 상무위원 저우웬용(周文雍)은 화교 상인으로 변장하고 포산(佛山) 출신의 공산당원 첸티에쥔(陳鐵軍)과 부부로 위장하여 당 기관과 조직 재건사업에 뛰어들었다. 반역자의 밀고로 체포된 두 사람은 사랑에 빠져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형장에서 ‘혁명자의 결혼식’을 올리고 처형되었다.

 

혁명의 격랑 속에서 익어간 한중 로맨스

 

뒷사람들은 이 두 연인을 기려 능원에 ‘혈제헌원(血祭軒轅)’이라는 편액을 단 정자를 짓고, 이들의 모습을 형상화한 동상도 세웠다. 전쟁과 혁명 가운데서도 남녀의 사랑, 로맨스는 그치지 않았던가, 그들의 모습에 겹치는 것은 <아리랑>에서 김산이 보고하는 운암 김성숙(김충창)과 두쥔후이(杜君慧)의 ‘국경을 넘은’ 사랑이다.

▲ 광저우기의에 피어난 국경을 넘은 사랑. 운암 김성숙과 광둥 처녀 두쥔후이.
▲ 공저인 <아리랑>. 원 안에 덧붙인 사진이 님 웨일즈.

김산은 스스로 김성숙을 ‘우리의 정치이론가’라 불렀는데, 운암의 ‘격심한 연애’의 상대는 “중산대학에 다니는 아름다운 광둥 아가씨로 대단히 현대적이었으며 부르주아”라고 소개했다. 한때 승려였던 운암은 자기 연애에 대한 자격지심으로 불편해했지만, 김산은 “그의 ‘멍청한 짓거리’를 지지하였으며” “이 연인들을 도와주었다.”

 

김산은 운암을 비판하는 이들에게 “혁명가도 남자이고 인간이다. 어찌 되었든 이 연애는 진행될 것이다”라며 반박해 주었고, 해결책으로 여자의 도쿄 유학을 권했다. 그의 충고대로 여자는 유학을 떠났지만, 석 달 만에 되돌아왔다. 매일 편지를 쓴 그녀에게 운암이 3주 동안이나 답장을 보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광저우 기의가 끝난 직후, 김성숙은 두쥔후이의 집을 찾아 광저우 봉기의 경과를 상세한 기록한 한국어 공책을 주면서 안전한 곳에 보관해달라고 부탁했다. 두쥔후이의 모친은 그에게 중국식 윗도리를 지어 주면서 돈 10원을 함께 넣어줬다. 다음 날 아침, 두쥔후이는 김성숙을 돕기 위해 위험을 무릅쓰고 그와 함께 길을 떠났다.

 

상하이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두쥔후이는 김성숙과 함께 좌익작가연맹에 가입해 활동했고, 1929년 둘은 결혼했다. 아들 셋을 낳은 두쥔후이는 남편의 독립운동을 도와 1943년에는 임정 외무부 외사과와 정보과에서 활동했다. 그는 한국 독립운동가들과 교류하며 한중 우호를 다지는 등 한국 독립운동을 지원했다.

▲ 운암과 두쥔후이 가족. 부부가 중앙에 섰고 맨 오른쪽은 의열단의 박건웅(1990 독립장)

가족의 생이별, 애족장 추서로 위로가 되었을까

 

전쟁이 끝났지만, 두쥔후이는 한국으로 가는 교통편을 마련하지 못해 남편을 홀로 떠나보내야 했다. 1950년대에 세 아들이 배편으로 운암을 찾아왔지만, 그를 불온시하던 자유당 정권은 그들을 중국으로 추방했다. 두쥔후이는 1956년 중국공산당 제8차 전국대표대회에 참석했고 1981년에 세상을 떠났다. 생이별 후 부부는 죽을 때까지 다시 만나지 못했다.

 

운암은 환국 후 여운형과 함께 근로인민당을 창당하고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에 참여해 좌우합작운동을 벌였다. 6·25 전쟁 때는 한강 다리가 끊어져 피난하지 못한 운암은 부역자로 몰려 투옥되었고, 혁신 세력 통합운동을 벌이다가 이승만·박정희 정권 때 각각 옥고를 치르는 등 고단하게 살았다. 1969년에 세상을 떠난 그의 장례는 사회장으로 치러졌고, 1982년이 독립장이 추서되었다. 2016년, 두쥔후이의 공적을 기려 정부에서 애족장을 추서했다.

 

중일전쟁(1937)이 일어나자, 한국 독립운동 진영은 중국 안 항일전선의 변화를 독립과 해방에 최선의 기회로 여기고 독립운동 세력 내부의 단결과 통일에 힘쓰기 시작했다. 임정은 ‘독립전쟁’의 시기가 임박했다며 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정당과 미주 국민회 등 9개 단체를 모아 한국광복운동단체연합회(광복진선)를 결성했다.

 

민족혁명당 등 좌파 계열도 세력의 규합에 나서 김원봉 중심 체제를 갖추고 우한에서 좌익세력의 전선 조직으로 조선민족전선연맹(조선전선연맹)을 창립하였다. 그리고 1938년, “전국적 총 폭동을 조직하고 군사행동의 실행을 준비”하여 조국으로 진군하는 조선의용대를 결성하였다.

 

중국 국민당 군사위원회 정치부는 ‘국제 의용군 조직계획방안’에 따라 김원봉을 지원하여 조선의용대를 창설하는 역할을 추진했다. 김원봉이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조선의용대 창설은 급물살을 탔다. 조선의용대는 국민당 정부의 통제를 받아야 했지만, 김원봉은 상대적이지만 일정한 자주성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러나 화북지역에서의 무장투쟁을 요구하며 타이항산 팔로군 지역으로 이동해 간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뒤에 조선의용군으로 개편)는 자주권을 지키지 못했다. 팔로군 총사령관 주더(朱德)는 국제조직을 앞세워 한인 군사 조직인 조선의용군의 지휘권을 장악했기 때문이다.

 

국민당 정부는 한국광복군(1940)도 중국 군사위원회의 지휘통제 아래 두었는데 임정은 문제 제기를 계속하여 1945년 4월 지휘권을 회복할 수 있었다. 타국에 와서 군대를 운영하면서 그 나라의 간섭을 배제할 수 없다는 사실 앞에서 임정 요인들은 망국의 비애를 곱씹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 1939년 조선의용대는 본부를 광시성 구이린(桂林)으로 이동하였고, 이곳에서 1주년을 기념하였다.(1939.10.10.) ⓒ 국사편찬위원회

조선의용대 결성했으나 일본군을 피해 떠난 ‘강물에 위 뜬 망명정부’

 

1938년 9월 말 일본군은 우한의 진입로인 한커우(漢口)로 들어왔다. 우한을 포기하고 떠날 수밖에 없었던 장제스 국민당 정부는 개전 1년여 만에 베이징, 상하이, 난징, 광저우, 우한, 창사 등 대도시와 동부 해안지역을 모조리 내주고 해안선을 봉쇄당한 채 중국 내륙 깊숙이 자리한 충칭(重慶)으로 수도를 옮기고 장기항전에 들어갔다.

 

이미 9월에 광저우에는 연락처만 두고 임정과 가족들이 시 서쪽의 포산(佛山)으로 옮겨간 것은 광저우에 일본군의 폭격이 잦았기 때문이었다. 임정 요인들이 충칭으로 철수하자, 가족들도 일단 싼수이(三水)로 가서 거기서 주강(珠江)을 거슬러 오르기로 했다.

 

광둥성 정부로부터 객차 한 칸을 배정받은 임정 가족들은 시내로 들어오는 일본군을 피해 간신히 포산을 떠날 수 있었다. 싼수이에 닿은 가족들은 목선 한 척을 세내어 이를 타고 가다 더 큰 배로 바꾸어서 예인선의 도움까지 받아야 했다. 임정의 살림을 맡은 정정화(1982 애족장)가 “강물 위에 뜬 망명정부”(장강일기)라 표현할 만큼 곤욕을 치른 끝에 광시성 류저우(柳州)에 닿았다.

 

싼수이를 떠난 지 40일 만인 1938년 11월 30일이었다. 돌이켜보면, 1932년 5월 상하이를 탈출한 뒤, 항저우와 전장, 창사와 광저우를 거쳐 오면서 어느덧 6년 6개월이 흘러 있었다. 그러나 류저우도 이미 안전지대가 아니었다. 날마다 일본군의 공습이 이어졌고, 가족들은 천연 동굴로 대피하는 게 일과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나라 잃고 타국땅에서 일념으로 해방을 그리며 살아가는 일은 그렇게 고단하고 힘겨운 것이었다.

 

 

2021. 2. 10. 낮달

 

1차 답사(2015.1.23.~1.27.)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①] 후미진 중국 골목에 한국인이 줄을 서는 이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②] 두 아들에게 남긴 윤봉길의 편지…북받침을 어찌하랴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③] 37살의 나이 차… 백범과 중국 여인의 ‘특별한 동거’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④] 4시간 만에 일본군 궤멸시킨, 일본육사 출신 독립군 대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⑤] 중국에서 본 한국인 묘, 비석에 새긴 이름 읽는 순간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⑥] ‘난징의 능욕’,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2차 답사(2020.1.9.~1.14.)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⑦] 황푸군관학교, 한인 청년을 조련한 ‘혁명의 요람’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⑨] 광복군 전신 청년공작대, 34명 청년들이 이뤄낸 반향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⑩] 임정, 초모 공작으로 광복군 창설작업에 본격 나서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⑪] 충칭의 5년, 화시탄 물결 따라 사랑과 죽음도 흘러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⑫] ‘홀로서기’ 끝 광복군, 일본의 항복으로 길을 잃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⑬] 허리 숙여 절하는 광복군, 잊을 수 없는 장면

 

 

 

혁명 열기 속 국경 넘은 사랑도 익어갔다

[임시정부 노정을 따라 ⑧] 광저우(廣州) ② 광저우 기의(起義)와 한중 로맨스, 조선의용대의 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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