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홋카이도 기행 ①] 삿포로 가족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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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설 대목 밑 가족 여행지로 삿포로를 선택한 이유를 정확히 말하기는 어렵다. 딸은 대만을 또 다른 선택지로 제시했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삿포로를 짚었다. 꼭 삿포로가 아니어도 좋았다. 거기가 홋카이도(北海道)라면 아무래도 좋았으리라. 나는 아마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의 중편소설 <설국(雪國)>을 떠올렸을 것이다.
가와바타의 <설국>을 찾아서
“지방의 경계에 있는 긴 터널을 빠져나가자, 설국이었다. 밤의 밑바닥이 하얘진 듯했다. 신호소(信號所)에 기차가 멎었다.”
일본 근대문학의 명문장으로 꼽히는 <설국>의 첫머리다. 1968년 작가가 이 소설로 노벨문학상을 받았을 때 나는 초등학교 졸업반이었다.
형님이 사다 놓은 소설 <설국>을 읽은 건 그해 겨울방학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애걔걔. 열세 살짜리 시골 소년에게 이 감각적 서정 소설은 심심하고 난삽한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한겨울이래도 제대로 된 눈이 귀한 남부지방에서 자란 내겐 ‘설국’이라는 표현이 주는 울림은 남달랐던 것 같다. ‘밤의 밑바닥’마저 하얗게 만들어 버리는 눈, 시골 역에 멈춘 기차 따위로 떠오른 소년 시절의 기억은 수십 년 시간을 넘어 의식 깊은 데에 아스라하게 남아 있었던 것인지 모른다.
가와바타의 <설국>이 홋카이도일 것이라는 건 전적으로 일방적 판단이었다. ‘눈의 고장’이라고 불릴 만한 지역이라면 북해도가 맞춤하지 않겠느냐고 나는 생각했다. 소설 <설국>에 대한 기억과 무관하게 그런 작품을 낳은 공간을 찾아보는 것도 괜찮은 일이라고 우정 여겼던 것이다.
항공권과 호텔을 예약하고 출발 날짜를 기다리면서도 나는 이 고장에 관한 어떤 공부도 하지 않았다. 일본말은 한마디도 못 하면서 순전히 영어로 가족의 가이드 역할을 할 딸이 열심히 여행 계획을 세웠을 뿐이었다. 아이는 호텔에서 들를 관광지의 동선을 연구했고, 끼니를 해결할 식당과 메뉴를 찾는 데 골몰했다.
삿포로에서 재현된 이산의 비극
삿포로(札幌)는 우리나라에도 꽤 널리 알려진 도시다. 삿포로에 대한 내 최초의 기억은 1970년대 초, 거기서 이루어질 뻔했던 남북 이산가족 상봉과 관련된 비극의 민족사다. 1971년 2월 삿포로에서 열린 프레 동계올림픽에서 남북으로 갈라져 있던 오누이가 애절하게 만났기 때문이다.
오누이는, 그러나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국제통화로만 만났다. 북한의 스피드 스케이팅 대표 선수 한필화는 <아사히신문>의 주선으로 1·4 후퇴 때 단신 월남한 오라버니 필성과 목소리로 20년 만의 안부를 나눌 수 있었다.
“여보세요, 나 한필성입니다.”
“오빠 오빠, 나야 나. 필화야.”
텔레비전이 제대로 보급되기 이전이다. 라디오에서 되풀이해서 들려주던 오누이의 애절한 대화와 일간지마다 도배된 오누이의 흑백사진도 아득하게 떠오른다. 졸업반 진급을 앞둔 중학생에겐 그 상봉이 환기해 주었던 분단의 민족사를 제대로 이해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북한선수단 사진 속에서 한필화를 발견한 고향 친구의 귀띔에 사진을 본 한필성은 단박에 누이를 알아봤다. 신문에 보도된 애끊는 30분간의 통화 내용과 수화기를 들고 울음을 터뜨리는 오누이의 모습에 온 겨레가 같이 울었다. 수십 년 만에 만나는 가족 이야기만큼 극적이면서 눈물샘을 자극하는 게 또 있을까.
유례없는 분단의 질곡을 살아가고 있건만 1983년 <한국방송(KBS)>이 이산가족 찾기 생방송을 시작할 때까지 ‘나라’는 아무 일도 하지 않았다. 어질고 착한 백성들은 분단으로 헤어진 혈육을 찾는 일이 국가의 책임이란 걸 생각지도 못했고 날마다 되풀이되는 만남의 순간을 지켜보면서 눈물 바람을 해대는 게 고작이었다.
현해탄을 사이에 두고 오누이는 송수화기를 들고 흐느꼈지만, 만남은 그것으로 끝이었다. 한필성이 황급히 도쿄로 달려갔지만, 상봉 형식을 놓고 남북의 의견이 엇갈리는 바람에 오누이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었다. 이 땅에 완강하게 들어선 이데올로기의 벽은 천륜조차 넘을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오누이는 만나지 못했던가, 나는 머리를 갸웃했다.
동계올림픽이 열린 도시고, 거기서 한필성·필화 남매의 애틋한 만남이 이루어질 뻔했다는 정도를 빼면 나는 물론이고 가족 누구도 홋카이도와 삿포로를 알지 못했다. 눈보라가 날리는 삿포로 외곽 신(新) 치토세 공항에 내렸을 때, 날씨가 장난이 아니라는 걸 깨달았다.
좌측통행, 오른쪽 운전대
공항 인근의 렌터카 회사에서 예약한 차를 빌렸다. 정작 예약은 해 놓고도 타게 될 차가 무엇인지도 나는 몰랐다. 넷이 타기에는 다소 작지 않나 싶은 차는 토요타의 아쿠아 하이브리드였다. ‘하이브리드’ 내용을 물었지만, 여직원은 아주 간단한 내 ‘콩글리시’에도 답을 하지 못했다.
난생처음으로 오른쪽에 있는 운전석에 올랐는데, 기분이 좀 묘했다. 온 세상이 하얗게 눈 천지였고, 길은 곳곳에 내린 눈으로 미끄러웠다. 오른쪽 운전석에 앉아 좌측 차로를 달리는 기분을 뭐라 설명할 수 있을까. 가속기와 브레이크를 번갈아 밟고 있었지만, 내가 낯선 나라의 도로를 달리고 있다는 실감이 좀처럼 오지 않았다.
운전석 위치가 반대이니 당연히 깜빡이 위치도 반대다. 나는 걸핏하면 습관대로 왼쪽 레버를 건드려 멀쩡하게 와이퍼를 움직이기 일쑤였고 그럴 때마다 오른쪽 레버를 다시 당겨야 했다. 일본 신호등 체계를 살펴보고 왔는데도 왕왕 신호가 헛갈려 뒤차에서 빵빵거렸다. 다행스러운 건 일본의 운전자들은 우리처럼 거칠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들은 참을성 있게 서투른 운전자를 기다려줄 줄 알았던 것이다.
뒤늦게 확인하니 차는 저속에선 전기로, 고속에선 휘발유로 움직이는 ‘잡종(hybrid)’이었다. 종일 운행하고 호텔로 돌아올 때면 바닥까지 내려온 계기판의 배터리 표지는 이튿날 아침 시동을 걸면 다시 온전하게 채워져 있곤 했다. 3박 4일간 700∼800km를 운행했는데도 차를 돌려주면서 가득 채운 기름값은 고작 4천 엔이었다. 돌아와서야 이 차의 공식 연비가 40km/ℓ라는 걸 알았다.
호텔에 도착하여 여장을 풀었더니 비로소 일본에 왔다는 생각을 했다. 성냥갑만 한 크기의 객실 꾸밈새가 꼼짝없이 일회용품 같았다. 침대도 두 사람이 눕기엔 다소 좁은 듯했고, 히타치 상표가 붙은 욕실은 우리나라 유원지에 설치된 간이 화장실처럼 아예 통으로 만들어졌다.
눈의 도시 삿포로
삿포로(札幌)는 홋카이도 도청 소재지로 일본의 도시 가운데 다섯 번째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삿포로라는 지명은 아이누어의 ‘삿 포로’(‘건조하고 넓은 땅’), ‘사리 포로 벳’(‘큰 습지가 있는 곳’) 등에서 유래했다. 메이지 시대 초에 홋카이도 개척의 거점이었던 삿포로는 미국식 계획도시로 건설되었다 한다.
삿포로는 일본의 대표적인 대설 지역이지만, 바다에서 불어오는 편서풍에 직접 노출되지 않아 근처 오타루(小樽)시, 이와미자와(岩見沢)시보다는 적설량이 적다. 삿포로는 1972년 동계올림픽 개최 이후 세계적 관광 도시로 성장, 지금은 한해 찾는 관광객이 150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사흘 동안 머물면서 만난 삿포로시는 국내 여느 도시의 모습과 별로 다르지 않았다. 고층건물과 네온사인, 붐비는 거리와 자동차 물결……. 도시 경관은 어디 없이 비슷한 것이다. 더구나 멀지 않은 이웃 나라 일본의 도시다.
사흘, 그것도 둘째 날은 오타루, 셋째 날은 비에이(美瑛)를 다녀와 밤에만 머문 삿포로의 인상을 섣부르게 말하긴 어렵다. 그러나 스치고 지나가면서도 툭, 한마디를 던질 수 있는 건 여행자의 특권이다. 삿포로는 아주 크지도 번화하지도 않았지만, 오랫동안 그곳을 지켜온 중년 토박이 같은 도시라는 느낌이었다.
거리는 반듯한 데다 깨끗했고, 사람들은 서두르지 않고 차분하게 거리를 지나다녔다. 우회전 신호에 헷갈리고 내비게이션을 따라 갈 지(之) 자 운행을 해도 경적을 울리는 이들이 거의 없었다. 무엇보다도 거리에 주차된 차가 전혀 없었던 게 오래 기억에 남았다. 그러나 삿포로에 두드러진 것은 역시 ‘눈’이었다.
온 도시가 하얗다. 눈은 이 도시에선 일상이었다. 도로 중앙분리대나 길가 화단에 깔린 눈은 마치 시루떡처럼 켜켜이 쌓여 있었다. 스노타이어(snow tire)를 기본으로 장착하고 있는 자동차는 눈과 얼음이 뒤섞인 길을 천연덕스럽게 통행하고 있었다. 사람도 차도 완벽하게 눈에 적응하고 있는 곳이었다.
둘째 날, 심야에 호텔 8층 높이의 창에서 삿포로시의 제설작업을 구경할 수 있었다. 먼저 제설차가 앞서 제설하면 뒤따르는 덤프트럭으로 눈이 옮겨졌다. 눈이 차면 이내 다른 트럭이 임무 교대를 하는 식이었다. 소리가 들리지 않아 마치 무성영화 화면처럼 보였던 예의 제설작업 광경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눈이 참으로 푸지게 내린다. 오타루를 오가는 도로, 항구의 부두와 운하에, 도시 곳곳에 쌓이고 내리는 눈, 비에이 지역 전체를 은세계로 만들고 있는 눈, 눈, 눈……. 그것은 홋카이도가 짐작대로 ‘눈의 나라’(설국(雪國))라는 것은 분명히 확인시켜 주는 것이었다.
‘삿포로 라멘’으로 유명한 ‘라멘 요코초’(라멘 거리)에서 먹은 ‘일본 라면’에 대한 기억은 좀 끔찍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무심하게 그걸 먹는 걸 보고 세대는 미각에서도 갈리는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메뉴 가운데 낯익어 무난할 듯한 미소 라멘인가를 시켰는데, 아내와 나는 이내 얌전히 젓가락을 내려놓아야 했기 때문이다.
이튿날, 비에이를 다녀와서 먹었던 저녁도 비슷했다. 한국인 여행객에게 꽤 소문난 식당인 징기스칸 다루마의 ‘양고기구이’를 아이들은 맛나게 먹었지만, 역시 우리 내외는 별 감흥을 얻지 못했다. 잔뜩 배가 고파서 먹었기에 기본량을 해치우긴 했지만.
그나마 우리가 가장 무난하게 먹은 것은 삿포로 편의점에서 사서 비에이 역 부근 주차장 차 안에서 먹었던 도시락이었다. 몇 가지 부침개와 김을 싸거나 참깨를 뿌린 밥이었는데, 아내와 나는 그걸 먹으며 비로소 일상의 미각을 회복할 수 있었다.
빌린 차가 있었으므로 우리는 홋카이도를 헤맬 필요가 전혀 없었다. 대신 거기서 버스도 지하철도, 기차도 타 보지 못했다. 기차를 타고 홋카이도의 눈 덮인 설원을 달리면 어느 시골 역에서 <설국>의 요오코 같은 여인을 만날 수 있었을까.
마지막 날, 인천공항에 돌아와 나는 스마트폰으로 ‘한필화’를 검색했다. 남매의 만남이 19년 후인 1990년 제2회 동계 아시아경기대회가 열린 삿포로에서 이루어졌다는 걸 확인했다. 북한 빙상협회의 임원으로 삿포로에 온 한필화는 헤어진 지 40년 만에 지토세 공항에서 오라버니 한필성을 뜨겁게 포옹할 수 있었다.
남북 분단이 일제 식민지배로부터 배태된 것이고 그로 말미암은 가족공동체의 해체는 그 비극의 가장 고통스러운 부분이다. 분단의 아픔을 상징하는 이들 오누이의 이별과 만남이 정작 그 식민 종주국에서 이루어진 이 역사적 아이러니는 어떻게 봐야 할까.
여행에서 돌아와서야 나는 가와바타의 ‘유키쿠니(雪國)’가 에치고 유자와(越後湯澤)라는 온천장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뿔싸, 에치고 유자와는 홋카이도가 아니라 혼슈의 니가타(新潟) 현 최남단에 있는 역사 깊은 온천지다. 그러나 가와바타의 ‘눈의 나라’를 홋카이도로 상정한다고 해서 안 될 일이 무어가 있겠는가.
<설국>을 다시 읽다
1968년 노벨상 수상작 <설국>을 읽던 열네 살 시골 소년은 예순의 초로가 되어 학교 도서관에서 <설국>을 다시 읽었다. ‘심심하고 난삽한 이야기’가 아니라 홋카이도의 눈을 떠올리면서 읽은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설국>은 독특한 미적 세계로 다가왔다.
“달은 마치 푸른 얼음 속 칼날처럼 투명하게 빛났다. 거울 속에는 차가운 꽃잎 같은 함박눈이 한층 크게 나타나, 옷깃을 들치고 목덜미를 닦는 고마코 주위에서 하얀 선으로 감돌았다.”
겨울 홋카이도 여행을 꿈꾸는 여행자가 있다면 삿포로에서 하코다테행 특급열차로 유노카와 온천장으로 갈 수 있다고 한다. 그것으로 <설국> 주인공 시마무라가 갔던 일정을 되짚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혹 아는가, 거기서 <설국>의 ‘푸른 얼음 속 칼날’처럼 투명한 달, 고마코 어깨 위에 내리던 ‘꽃잎 같은 함박눈’을 만나게 될지.
2015. 1. 12. 낮달
덧붙이는 글 |
홋카이도를 여행한 것은 지난해 2월이다. 여행기를 쓰다가 이런저런 일에 치여 끝을 맺지 못했다. 꼭 일 년 만에 묵은 사진을 꺼내놓고 기억을 복기하는 기분은 쏠쏠하다. 될까, 하고 생각했는데 그때 맛보았던 북해도의 추위와 풍경을 바라보면서 느꼈던 감정의 결까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어쩌면 우리의 경험과 기억도 숙성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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