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유럽 ⑦] 스위스의 루체른, 리기산
4년 전 퇴직을 기념하여 패키지로 유럽 여행(2016.4.16.~4.21.)을 다녀와서 5월부터 7월까지 <오마이뉴스>에 그 여행기 다섯 편을 썼다. 그런데 여섯 번째 기사를 쓰려고 사진을 뒤적이며 여행의 기억을 복기하다가 나는 내 기억이 뒤죽박죽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진은 시간 순서로 기록되는데도 그 기억의 앞뒤가 헛갈리면서다.
그게 로마였는지 피렌체였는지가 헛갈리는가 하면 바티칸시 박물관 등 내부를 찍은 사진은 자신도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바티칸 박물관 안으로 막 들어서는 여정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인터넷의 로마 여행기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답을 찾지 못한 나는 그예 손을 들었다.
6편을 쓰게 된 것은 반년이 지난 이듬해 1월이었다. 시스티나 성당 안에선 플래시가 그림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걸 뒤늦게 확인하면서 헝클어진 기억을 가다듬은 것이다. 이미 여행기를 이어가기에는 시간이 너무 지나서 나는 6편을 블로그에다 썼다. [관련 글 : 초보 여행자, 바티칸에서 길을 잃다]
그리고 다시 3년이 지났는데도 나는 나머지 두어 편의 여행기로 ‘난생처음 만난 유럽’을 갈무리하기로 했다. 글쎄, 이 글을 읽을 이가 얼마나 될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 여행기는 그것과 무관하게 자신의 여행을 마무리 짓는 일이기 때문이다.
두 번 만난 스위스
우리 일정에서 스위스는 두 차례나 거치게 되어 있었다. 파리 관광을 마친 뒤, 파리 동역(東驛)에서 테제베를 타고 루체른(Lucerne)으로 들어가 리기산을 오른 여정과 마지막 날, 돌아오는 비행기를 타려고 취리히에 들른 것이 그것이다.
초등학교 때 배운 알프스는 ‘시계의 나라’였다. 여러 해 담임이었던 남자 선생님은 스위스가 시계의 나라가 된 것은 겨우내 내린 눈으로 통행이 쉽지 않아서라고 했다. 외부와 단절된 사람들이 선택한 일이 수제 시계의 제작이었다는 것이다. 그는 집과 집 사이에 줄을 쳐놓았다가 눈이 쌓이면 그 줄을 빙빙 돌려 만들어진 터널로 오갔다는 믿을 수 없는 이야기도 해 주었다.
어쨌든 스위스는 우리가 중고교에 다닐 때만 해도 선망하는 나라의 앞순위에 있었다. ‘알프스’나 ‘요들송’ 같은 단편적인 이미지에 불과하지만, 스위스가 우리에게 결정적으로 각인된 것은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1965) 덕분이 아니었나 싶다. 실제 영화의 배경은 오스트리아였지만, 거기 나오는 알프스는 당연히 스위스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패키지로 유럽 여러 나라를 돌면서 유명 관광지마다 점만 찍고 돌아서는 여정이어서 그랬을까. 스위스로, 알프스로 간다고 하니 가는가 보다 했을 뿐, 우리는 스위스로 들어간다는 데 별다른 기대를 하지 않았다. 눈 덮인 알프스나 스위스의 그림 같은 마을 풍경은 그 시절 달력에서 지겹도록 만났지 않은가 말이다.
‘산들의 여왕’ 리기산 등정
자유 여행자라면 루체른에서 페리를 타고 비츠나우(Vitznau)로 가서 리기산 산악열차를 탔겠지만, 우리 패키지 일행은 버스로 이동하여 비츠나우에서 산악열차를 탔다. 스위스인들이 ‘산들의 여왕’이라고 부른다는 리기산(1,797m)으로 오르는 톱니 궤도식 열차로 정상인 리기쿨룸(Rigi Klum)에 도착하는 데에는 30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열차는 빗속에 출발했는데, 산 아래 루체른 호수와 산록의 안개 따위를 즐기는 것도 잠깐, 비는 눈으로 변했고 달리는 열차 안에서는 촬영도 쉽지 않았다. 멍청하게 앉아서 리기쿨룸에 도착했는데, 바깥에 눈이 하얗게 쌓여 있었고, 바람이 매웠다.
4월 중순, 봄옷에 얇은 패딩을 걸친 일행은 덜덜 떨면서 전망대로 오르기는커녕 인증 사진 몇 장을 찍고 나서 다음 기차를 타고 하산하는 쪽을 택했다. 아무도 불평하지 않았고, 따뜻한 객차에 오르자 살겠다는 표정이었다. 내 사진 목록에 리기산 정상 사진이 없는 이유다.
하산해서는 루체른 시내를 신구 시가지로 나누는 로이스강의 카펠교(Chapel Bridge)에서 잠깐 숨을 돌렸다. 두 시가지를 잇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 다리 카펠교는 1332년에 건설되었는데 1993년의 화재로 원형이 손실된 뒤 복원되었다. 본래 도시 요새의 일부인 이 다리는 팔각형 모양의 워터타워(급수탑)와 함께 루체른의 랜드마크로 불린다.
그러나 ‘점찍기’에 바빠서 우리는 도시의 수호성자인 생 레오데가르(St. Leodegar)와 생 모리스(St. Maurice)의 일대기 등 루체른의 역사적 장면들을 담은 112개의 삼각형 판화 그림이 설치된 카펠교의 대들보도 보지 못했다. 가이드야 언급했을 테지만, 이는 내가 그걸 흘려들었을 공산이 크다.
‘빈사의 사자상’, 그리고 스위스 용병의 역사
서둘러 찾은 곳은 예수회 교회 북쪽의 조그마한 공원 안 바위에 새겨진 ‘빈사의 사자상’이었다. 덴마크의 조각가 베르텔 토르발센(Bertel Thorvaldsen)이 설계하고 루카스 아호른(Lukas Ahorn)이 조각한 이 사자상은 프랑스 대혁명(1792) 당시 튀일리 정원(Jardins des Tuileries)을 지키다 전멸한 스위스 용병 라이슬로이퍼(Reisläufer)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것이다.
면적은 한반도의 20%에 불과하고, 국토의 4분의 3이 산악지역인 데다가 독일, 오스트리아, 프랑스 등 유럽의 강국에 둘러싸여 생존을 위협받아야 했던 스위스는 농업에 의존하는 낙후된 나라였다. 젊은이들은 유럽의 용병으로 나아가 고단한 삶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중세 후기부터 근세까지 전쟁에서 증명된 스위스 용병들의 전투력은 이들을 세계 최고의 용병으로 자리매김한 기반이 되었다.
‘전쟁에 나가는 사람’이라는 뜻의 라이슬로이퍼는 6m에 이르는 장창(pike)과 마늘창(halberd)을 이용한 강력한 집단 공격력 덕분에 중세 후기에 그 전력을 인정받았다. 한시적으로 급하게 편성된 농노(農奴) 전력보다는 장기간 전장에서 단련된 병사들을 원했던 유럽의 지휘관들이 스위스 용병을 선호한 것은 당연하였다.
기다란 장창을 들고 거대한 종대로 머리를 밀치는 공격 전술을 펼치고 포로를 사로잡는 걸 원치 않는 스위스 용병의 거침없는 행진은 적에게는 공포와 경외 자체였다. 이탈리아의 사상가 마키아벨리(Machiavelli)는 이들의 전투 방식을 자신의 저서 <군주론>에서 다룰 정도였다.
스위스 용병들을 가장 많이 고용한 곳은 프랑스로 이들은 프랑스 보병 전력의 상당 부분을 담당하였다. 17세기 이후로 스위스 용병들은 점차 그들의 상징이나 다름없는 장창을 버리고 화승총으로 무장하였다. 프랑스 대혁명 당시 튀일리궁전으로 쳐들어온 혁명군에 맞서던 이들 스위스 용병 786명은 전멸했다.
루이 16세는 튀일리에서 도주하면서 이들에게 철수해도 좋다고 지시했지만, 이들은 죽음으로 자신의 책임과 의무를 다했다. 죽은 병사의 품에서 발견된 유서에서 궁전을 사수한 것은 자신들이 신의를 저버리고 도망친다면 이후 후손들이 신의를 잃어 용병으로서 일할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라는 기록이 발견되었다고 한다.
‘빈사의 사자상’은 바위 면에 얼굴을 묻고 창이 박혀 고통스럽게 마지막 숨을 내쉬는 사자의 모습을 새긴, 길이 10m, 높이 6m의 대형 조각이다. 죽어간 스위스 용병들의 상징인 사자는 부르봉 왕조의 백합 문양이 새겨진 방패를 지키고 있는데 이는 왕실에 대한 그들의 충성을 찬양하는 것이다. 사자상 위의 라틴어 명문 “HELVETIORUM FIDEI AC VIRTUTI”는 ‘헬베티아(스위스)의 충성심과 용감함’이라는 뜻이다.
미국 작가인 마크 트웨인은 이 조각상을 ‘세계에서 가장 감동적인 작품’이라고 극찬하였다.
사자는 자신의 갈기를 깎아지른 절벽 아래의 은신처에 드리웠다. 그는 절벽의 살아있는 돌에서 깎아낸 사자이기 때문이다. 사자의 크기는 웅장했고, 그 자세는 고귀했다. 그 어깨에는 부러진 창이 꽂혀 있는 채, 사자는 고개를 숙이고서 그 앞발로 프랑스의 백합을 지키고 있었다.
- 마크 트웨인, 유럽 방랑기(A Tramp Abroad), 1880
스위스는 자국민의 외국군 복무를 금하고 있지만, 유일하게 예외로 인정하는 곳이 교황청이다. 따로 군대를 두지 않은 바티칸은 스위스 근위병들이 유일한 무장병력이다. 스위스 근위대의 역사는 1505년 교황 율리우스 2세가 교황청 경비를 맡을 군인 200명의 지원을 스위스 티치노주에 요청하면서 시작됐다.
죽음으로 고용주를 지킨다는 신뢰를 제1원칙으로 삼았던 스위스 용병은 당시 외국의 영주들에게 매우 인기가 높았다. 1527년 ‘로마 약탈’ 때 신성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의 군대에 맞서 싸웠던 바티칸의 근위대 가운데 다른 나라의 용병들은 도망쳤지만, 스위스 용병들은 교황 클레멘스 7세를 끝까지 지키다 모두 전사했다.
산악 국가로 목축 외에 변변한 산업이 없고 강대국 틈바구니에서 전쟁에 시달려야 했던 스위스에서는 용병이 주요 수입원이었다. 그래서더는 몰릴 수 없는 처지의 약소국가 젊은이들은 죽음으로써 신의를 지켜 후예들에게 그 영예를 대물림하려 한 것이었다.
영세중립국 스위스의 생존 전략
스위스의 정식 국가 명칭은 라틴어로 ‘헬베티아 연방(Confoederatio Helvetica)’. 공용어가 4개(독일어·프랑스어·이탈리아어·로만슈어) 되기 때문에 라틴어 명칭을 공식 국가명으로 채택했는데, 헬베티아는 스위스 민족의 조상인 고대 켈트족의 한 갈래다.
스위스는 온 유럽이 전쟁의 소용돌이에 휘말린 제1차, 제2차 세계 대전과 동서 냉전 중에도 외교적인 중립을 지켜온 영세중립국이다. 그 지위를 유지하고자 스위스는 유럽연합(EU)에도, 북대서양조약기구(NATO)에도 가입하지 않았다. 스위스가 국제연합(UN)에 가입한 것도 2002년이 되어서였다. 그것은 조그만 나라 스위스가 선택한 생존전략이었다.
그러나 스위스는 ‘2018 사회발전지수(Social Progress Index)에 따른 국가별 순위 3위에 오른 나라다. 또 세계은행이 직전 3년간 평균 환율을 적용한 아틀라스 방식으로 환산한 2018년 총국민소득(GNI) 1위도 스위스(8만3천580달러)다.
안정적으로 잘사는 나라지만, 사회적 약자의 빈곤율이 높고 소득 기준 빈곤 격차가 큰 스위스는 2013년, 시민 발의로 ’기본소득제도‘를 제안했다. 헌법에 ‘정부는 기본소득을 제공해야 한다’, ‘기본소득은 인간을 존엄하게 하고 공적 삶에 참여할 수 있게 할 것이다’, ‘기본소득의 액수와 재원 조달 방안은 법률로 정한다’는 3개 조항을 넣을 것인지를 묻는 이 국민 투표는 2016년 압도적 반대로 부결되었다.
그러나 빈곤 문제를 해결하고자 기본소득제도를 국민 투표에 부치는 스위스라면 빈곤율이나 빈곤 격차쯤은 너끈히 넘어설 수 있을 것이다. 그것은 나라가, 생존을 위해 청년들이 남의 나라에 고용된 병사로 살아야 했던 아프고 고단했던 시절을 잊지 않고 있다는 방증이다.
저녁 무렵에 우리는 버스에 올랐다. 국경을 넘어 3시간 넘게 달린 버스는 이탈리아의 북부의 최대 도시 밀라노에 닿았다. 나는 무언가 이상하다고 여겼지만, 일행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에 들러야 하는 일정을 앞당겨 번갯불에 콩 구워 먹듯 치러냈다는 걸 내가 깨달은 것은 다음 날 오전이었다.
2020. 2. 7.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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