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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유럽여행-바티칸]초보 여행자, 바티칸에서 길을 잃다

by 낮달2018 2019. 5.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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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난 유럽 ⑥]초보 여행자, 바티칸에서 길을 잃다

*사진은 누르면 크게 볼 수 있음.

▲ 바티칸 미술관의 라오콘 군상 . 그리스 신화를 대표하는 서사시 <일리아드>에 등장하는 장면을 묘사한 작품 .

여행기를 이어 쓰면서

퇴직을 즈음하여 아내와 같이 유럽을 여행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15일부터 22일까지 이어진 8박 9일의 여행을 마치고 돌아와 한숨 돌린 뒤 바로 여행기를 쓰기 시작했다. 인터넷을 뒤져 미리 여행지 공부를 하긴 했는데 정작 돌아와 사진을 뒤적이며 복기한 여행의 기억은 뒤죽박죽이었다.

당연히 찍힌 사진은 시간 순서에 따른 것이었는데도 그 기억의 앞뒤가 헛갈렸다. 그게 로마였는지 피렌체였는지가 헛갈리는가 하면 찍은 사진의 유적이 무엇이었는지 모호한 경우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만약 기억조차 헛갈리는 사진만으로 여행을 그대로 복기하라고 했다면 나는 나자빠졌을 것이었다.

그러나 때는 인터넷 시대 아닌가. 나는 내 아리송한 기억을 깁기 위하여 인터넷을 뒤졌고, 유적지를 꼼꼼하게 기록한 선배 여행자들이 쓴 글과 사진을 통해 여행을 복기할 수 있었다. 예순이 넘어서야 다른 대륙으로 나들이를 떠난 우리 같은 신출내기 여행자에 비기면 일찌감치 세계를 주유(周遊)한 ‘팔자 좋은’ 선배들 덕을 톡톡히 본 것이다.

인솔자를 따라 여행지를 옮겨 다니는 패키지 관광객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자유 여행자들과 달리 우리는 정해진 시간표대로 수박 겉핥듯 여기저기를 돌아야 했으므로 개인적 취향 따위는 잊어버려야 했다.

나는 현지 가이드의 해설은 건성으로 들으면서 가는 곳마다 찍어야 할 사진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해설은 다른 자료를 통해 기울 수 있지만 놓친 사진은 다시 구할 수 없다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이 내 기억의 혼란을 부추긴 점도 있었을 것이다.

여행기를 시작하면서 나는 개인적 기억과 인상만으로 내 여정을 기록하는 게 어렵다는 걸 깨달았다. 우리는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했고, 오직 주어진 여정을 따라 인솔자 뒤를 따라다닐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가 주도하지 못하는 여정을 기록하면서 ‘나만의 견문’이 아니라 현지의 역사를 새롭게 반추하고 그것을 시시콜콜 주워섬기는 형식의 여행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런 이유였다. 도서관에서 여러 자료를 참고하여 중세에서 근대에 이르는 유럽사를 두서없이 서술한 것도 마찬가지다.

<오마이뉴스>에 첫 여행기가 실린 건 5월 21일이었고 7월 7일에는 다섯 번째 여행기가 올랐다. 여섯 번째 여행기는 ‘바티칸’을 쓸 차례였다. 나는 바티칸의 긴 회랑을 돌면서 만났던 세계적인 문화유산들과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에 쏟은 미켈란젤로의 초인적 예술혼 따위에 깊은 감명을 받았었다.

그러나 사진 자료를 고르면서 나는 본격적으로 헛갈리기 시작했다. 바티칸시 박물관 등 내부를 찍은 사진은 자신도 종잡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인터넷의 여행기를 샅샅이 뒤졌지만, 그 답을 찾지 못했다. 결국, 나는 제풀에 나가떨어졌다.

지난 7월에 바티칸 박물관 안으로 막 들어서는 여정에서 나는 길을 잃은 것이었다. 그런 상태에서 계속 쓰는 것은 자신을 속이는 일이었다. 두어 달 동안 글을 쓰면서 밀려왔던 회의도 짙어지면서 나는 이 여행기를 접기로 했다. 강원도 여행기를 쓸 때의 소회는 여기서도 느꼈었다.

오늘 다시 잃은 길 앞에서 다시 여행기를 잇는다. 물론 길을 다시 찾은 것은 아니고 헛갈리면 헛갈린 대로 지난해의 여행을 마무리해야 하겠다는 생각에서다. 까짓것, 길을 좀 잃었으면 어떤가. 내 여행기가 뭇 사람들의 길잡이가 될 일은 없으니 서둘러 다시 길을 떠나는 것도 괜찮다 싶어서다.

▲ 바티칸의 거대한 성벽 옆 인도에는 바티칸 입장을 기다리는 관광객들이 길게 줄을 서 있었다 .

다섯째 날, 로마여행은 바티칸(Vatican)에서 시작되었다. 서둘러 아침을 먹고 부리나케 움직여 바티칸 미술관 입구에 도착했을 때 이미 바티칸의 거대한 성벽 옆 인도에는 길게 줄이 늘어져 있었다. 몇 해 전에 이곳을 다녀간 딸애는 세 시간쯤 기다려야 했다고 했지만, 다행히 우리는 한 시간 안에 미술관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우리말로 호객하는 노점상들

 

줄을 선 사람들 가운데 낯익은 얼굴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글쎄, 중국인 관광객 수에는 미치지 못하겠지만 곳곳에서 만나는 이들은 모두 한국인들이었다. 관광지마다 노점상들이 우리말로 호객을 할 이유는 충분했다. 우리말을 능숙하게 구사하는 흑인 노점상과 일행이 수작을 나누고 있었다.

 

“두 개 1유로!”
“세 개는 안 될까?”
“안 돼. 나도 먹고살아야지.”
“한국말 잘하네!”
“나, 한국에 몇 년 살았어.”

 

들르는 관광지 곳곳에서 우리는 흑인 노점상들은 만날 수 있었다. 이들 2~30대의 젊은이들은 조악한 기념품이나 셀카봉 따위의 액세서리 몇 개를 들고 관광객들 사이를 누비고 있었다. 이들은 대부분 아프리카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이거나 2015년 이후 지중해 또는 남동유럽을 통해 유럽 연합 내로 망명한 난민들이라 했다.

 

유러피언 드림을 꿈꾸며 아프리카와 중동 등에서 온 불법 이민자들은 지중해를 건너와 스페인과 이탈리아, 그리스 등으로 무작정 숨어든 뒤 유럽 전역으로 흩어지고 있다. 이들은 경찰의 단속을 피해 물건을 팔고 있었지만, 수입은 변변치 않아 보였다. 불법 이민자로 살아가는 게 만만치 않지만, 가난과 내전으로 찌든 고향 아프리카로 돌아갈 수도 없는 이들이었다.

 

신권 국가 ‘바티칸 시국(市國)’

 

미술관 정문을 지나 우리는 바티칸 시국(Vatican City)에 첫발을 디뎠다. 성 베드로 광장 앞 도로 위에 있는 흰색 선으로 이탈리아와 국경으로 삼고 있는 바티칸 시국은 세계 최소의 주권국가다. 바티칸 시국은 로마의 주교, 즉 교황이 통치하는 신권 국가로 가톨릭교회의 상징이자 중심지이다.

▲바티칸 미술관의 피냐의 정원 . 지구를 상징하는 구형의 현대 조각상이 돌고 있다 .

바티칸 시국은 국가 전체가 순교지 혹은 유적지이며 르네상스 시대의 유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들의 걸작품으로 이루어진 뛰어난 예술 작품을 보유하고 있는 국가다. 바티칸 미술관(Musei Vaticani)은 세계 최대급 규모의 미술관 가운데 하나다. 로마 가톨릭교회에 의해 세워진 거대한 전시관에는 수 세기에 걸친 예술품들이 진열되어 있다.

 

2015년에만 600만 명이 방문하였다는 바티칸 미술관은 청동 솔방울 조각상이 있어 ‘솔방울 정원’으로 불리는 피냐의 정원을 거쳐 입장한다. 정원 한가운데에는 지구를 상징하는 구형의 현대 조각상이 돌고 있는데 이는 병들어가고 있는 지구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 바티칸 미술관의 현란한 천장화들 . 해설을 들었는데도 초보 여행자는 그 내용을 거의 기억하지 못했다 .

16세기에 교황 율리오 2세에 의해 설립된 바티칸 미술관은 런던의 대영박물관과 파리의 루브르박물관과 함께 세계 3대 박물관으로 손꼽힌다. 루브르나 대영박물관 소장품이 주로 약탈해 온 다른 나라의 문화재지만 바티칸 미술관의 소장 문화재는 역대 교황이 수집한 귀중하고 값비싼 개인 소장품이 중심이다.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와 미켈란젤로

 

율리오 2세는 1506년 성 베드로 대성전의 신축 등 야심적인 대규모 건축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성당(Capella Sistina)의 천장화를 그리게 했다. 그의 재임 시기는 전성기 르네상스와 일치하는데 그는 브라만테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와는 절친한 사이면서 그들의 후원자였다.(*지난해 여행기는 여기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교황의 의뢰는 적지 않은 부담이었지만 미켈란젤로(Michelangelo, 1475~1564)는 4년 2개월(1508~1512)에 걸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천장화를 그렸다. 아파트 7층 정도 높이의 천장에 그림을 그리기 위해 그는 비계를 설치하고 천장 밑에 또 하나의 천장을 만들어 작업공간을 확보했다.

 

미켈란젤로는 하루 평균 20시간이나 그림을 그려 마침내 1512년, <천지창조>, <하느님과 인류의 친교>, <하느님의 은총을 잃은 인류의 타락> 등 아홉 점의 그림이 이어진 방대한 천장화를 완성했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혹독한 작업은 그의 심신을 망가뜨렸다.

 

그는 몸 한쪽이 돌아가고 뒤틀려 침대를 놓고 누운 자세로 그림을 그려야 했다. 어깨가 망가져 통증을 호소했고 신경쇠약에 시달렸다. 그것은 그가 피부병에 걸리고 척추가 망가지며 눈이 돌아가는 역경을 감내함으로써 이루어졌다. 이처럼 시스티나의 천장화는 위대한 화가의 초인적인 예술혼이 빚어낸 결정체였다.

▲ 미켈란젤로가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천장화. <천지창조> 등 아홉 점의 방대한 규모다 . ⓒ 위키백과

바티칸에서 내어준 이어폰을 낀 채 우리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따르며 시스티나 성당을 돌아 나왔다. 그러나 그날의 여정을 복기하면서 나는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렸다. 나는 바티칸에서 찍은 사진을 이 잡듯이 뒤졌지만, 시스티나로 추정되는 한 장의 사진도 발견하지 못했다.

 

나는 시스티나 성당의 사진 때문에 여정의 인과를 혼동했다. 성당의 사진이 없으니 그곳을 돌아보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 추론은 사실성을 더해갔고 나는 쓰던 글을 덮어버렸다.

 

반년을 훌쩍 넘기고 새로 자료를 들여다보다가 무릎을 쳤다. 시스티나 성당 안에선 플래시가 그림에 나쁜 영향을 주기 때문에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한 것이다. 이런, 나는 그걸 까맣게 잊고 있었다. 여행기 쓰기를 멈춘 시간은 사진이 없으니 나는 거기 가지 않았다는 걸 제멋대로 추인한 시간이었던 셈이다.

 

“우리 바티칸에서 미켈란젤로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봤지?”
“응. 그런데 왜 그러우?”
“글쎄, 사진을 못 찍게 해서 사진이 없는 걸 모르고 거길 안 갔다고 생각한 거야. 나 참!”
“어이구, 정신머리 하고는……. 당신도 인제 다 됐우.”

 

아내에게 이실직고하자, 아내는 어이없다는 듯 나를 물끄러미 쳐다보더니 쓴웃음을 지었다. 진작 알고 있었듯 추억의 시시콜콜한 장면들까지 되살려내곤 하는 내 유별난 기억력도 세월 앞에선 맥을 추지 못했던 것이었다.

▲시스티나 성당을 빠져나와 아치형의 문을 돌아나가면 오른쪽에 붙은 성 베드로 대성당이 나타난다 .
▲입구를 떠받치고 있는 지름 3m에 이르는 여덟 개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으로 이루어진 성 베드로 대성당 .

바티칸 미술관과 시스티나 성당에서 만났던 미술품과 천장화를 포기하자 나머지 여정은 복기한 사진과 함께 조금씩 되살아났다. 시스티나 성당의 출구로 나오자, 거대한 성 베드로 성당의 측면이 앞을 가로막았다. 두 성당 사이의 아치형 통로로 지나자 오른편에 베드로 성당이 나타났다.

 

성 베드로 대성당(Basilica Scanti Petri)은 초대 교황이라 할 수 있는 성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 대성당은 역대 교황들이 사후에 안치되는 곳이기도 하다. 대성당 내부의 거대한 닫집 형태의 제대(祭臺)들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역대 교황들의 무덤 위에 설치된 것이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피에타'

 

이곳에는 가톨릭을 공인한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4세기에 건설한 대성당이 있었는데, 중세 세속 왕들과의 대립 속에서 교황의 아비뇽 유수(1309~1377) 동안에 황폐해졌다. 대성당은 르네상스와 종교개혁이 이루어지던 1506년에 건설을 시작하여 1625년에 완공하였다.

 

대성당이 자리 잡기 이전에 바티칸 언덕(Mons Vaticanus)은 고대 로마인들이 숭배하던 신성한 장소였다. 로마 황제 칼리굴라(A.D 37~41)는 여기에 거대한 원형경기장(Circus Gaii et Neronis)을 만들기 시작하여 경기장은 네로 시대에 완성되었다.

 

서기 64년 로마에서 일어난 대화재 이후 바티칸 언덕은 많은 그리스도인의 순교지가 되었으며, 성 베드로도 이 순교자 중 한 사람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베드로는 원형경기장에서 거꾸로 십자가형에 처했다고 한다.

▲ 대성당은 500여 개의 기둥과 400여 개의 조각상,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으로 구성되어 있다 .
▲ 성 베드로 대성당은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성당으로 역대 교황들이 사후에 안치되는 곳이기도 하다 .
▲ 미켈란젤로의 피에타상. 십자가에 매달려 죽어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의 시신을 묘사한 작품이다 .
▲대성당 내부의 거대한 닫집 형태의 제대들은 베드로를 비롯하여 역대 교황들의 무덤 위에 설치되어 있다 .

대성당은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거대한 돔의 성당, 그 앞의 오벨리스크와 원형의 열주(列柱)들이 이어진 회랑(回廊),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성 베드로 광장 중앙에 장식된 오벨리스크는 본래 칼리굴라가 원형경기장을 꾸미기 위해 서기 37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가져온 것이었다.

 

로마의 여느 유적지와 마찬가지로 대성당 앞은 순례자와 관광객으로 미어지고 있었다. 성당 입구를 떠받치고 있는 지름 3m에 이르는 여덟 개의 거대한 대리석 기둥 앞에서 광장과 회랑을 둘러보면서 나는 대성당의 엄청난 규모에 압도당했다.

 

대성당 내부도 아시아의 조그만 나라에서 온 여행자를 압도했다. 무엇보다도 서구식 건물 특유의 높은 천장이 환기해 주는 낯선 느낌은 이 성당이 경건과 성스러움을 더해주는 것이었다. 최대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성당 내부는 500여 개에 이르는 기둥과 400여 개의 조각상, 44개의 제대와 10개의 돔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300여 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들이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것이었다.

 

성당 입구의 오른쪽에 미켈란젤로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새긴 작품 ‘피에타(Pieta)상’이 있었다. 십자가에 매달려 죽은 뒤 어머니인 성모 마리아의 무릎에 놓인 예수 그리스도의 시신을 묘사한 그의 피에타는 고전적인 아름다움을 강조한 르네상스 시대의 이상과 자연주의의 균형을 이룬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대성당 외관에는 중앙 난간을 비롯하여 모두 세 개의 옥외 난간이 있다. 교황 선거에서 새로 선출된 교황이 군중 앞에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내 연설하는 장소가 중앙 난간이다. 매년 성탄절과 부활절 정오에 전 세계에 보내는 교황의 축하 메시지가 낭독되는 장소가 바로 우리 머리 위에 있었다.

▲ 대성당 외관에는 세 개의 옥외 난간이 있는데 교황 선거에서 선출된 교황이 연설하는 장소가 중앙 난간이다 .
▲ 대성당은 거대한 돔의 성당 , 앞의 오벨리스크와 원형의 열주들이 이어진 회랑 , 광장으로 이루어져 있다 .
▲ 대성당 앞의 오벨리스크는 원형경기장을 꾸미려고 서기 37년에 콘스탄티노플에서 로마로 가져온 것이었다 .
▲ 베드로 광장의 설계자 베르니니는 대성당이 사람들을 포용하는 모습을 표현하고자 하였다 . ⓒ 위키백과

성 베드로 대광장, 교황 프란치스코, 정의

 

성당 앞에는 최대 30만 명까지 수용할 수 있다는 성 베드로 광장(Piazza San Pietro)이 가히 일망무제로 펼쳐져 있었다. 광장의 설계자 잔 로렌초 베르니니는 대성당의 돔을 머리로 두고, 반원형의 회랑 두 개를 팔로 묘사함으로써 성 베드로 대성당이 두 팔을 벌려 사람들을 모아들이는 모습을 표현하였다.

 

4월 하순의 햇볕은 따가웠고, 선글라스를 낀 관광객들은 상의를 벗어들고 광장을 오가고 있었다. 오벨리스크 좌우에서 물방울을 날리고 있는 분수를 바라보며 나는 2014년 8월 한국을 다녀간 프란치스코 교황(Papa Francesco)을 떠올렸다.

 

사회적 소수자들, 특히 가난한 사람에 관한 관심과 관용을 촉구해 온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4년 한국을 방문해 세월호 유족들의 손을 잡아주었고, “세월호 십자가를 로마에 가져가겠다.”고 말했다. 대통령조차 외면한, 어처구니없는 비극의 당사자들을 위해 그는 ‘하느님의 위로와 평화의 은총을 간절히 기원’한 것이다.

 

가톨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종교로서 특히 역사적으로 서양 문화에서 지대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종교다. 전 세계적으로 약 12억 명의 신자를 가진 이 세계 최대 규모의 기독교 교파의 수장으로 교황이 지닌 권력은 세속의 그것 못지않다.

▲ 교황의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은 소외된 사람을 위로하고 세상의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분노를 환기한다 .

그런데도 연민과 자비와 사랑으로 응답하는 그리스도를 좇는 그의 낮은 곳을 지향하는 삶은 소외된 사람들의 삶을 위로하고 세상에 만연한 불평등과 불의에 대한 의로운 분노를 환기한다. 사람들이 손을 내밀어 그의 자비를 구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빈자의 소중한 자산인 연대’에 대한 요청이다.

 

“존엄은 권력, 돈, 문화에 의해 형성되는 것이 아니다. 존엄은 노동에 의해 이뤄진다. 개개인의 존엄에 있어 노동은 근본적이다. 사회적 정의의 잣대를 넘어서는 이기적 이윤 추구 때문에 세계에 얼마나 많은 실직자들이 있는지 생각하고 있다.”
 
   - 프란치스코 교황, 2013. 5. 1.

 

노동과 사회적 정의를 바라보는 그의 맑고 따뜻한 눈길만으로 사회의 악과 불의를 어쩌지 못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데도 “모든 형태의 부패와 무법에 대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용기를 가져야 한다.”(2014. 7. 26.)는 그의 목소리가 지닌 의미는 우리 시대의 종교가 있어야 할 자리를 웅변으로 증언해 주고 있다.

 

 

2017. 1. 30. 낮달

 

[처음 만난 유럽 ①] “흉측하게…” 죽다 살아난 파리 에펠탑

[처음 만난 유럽 ②] 개선문 거리에 이제 ‘망명자’는 떠나고 

[처음 만난 유럽 ③] 미켈란젤로를 키운 가문, 실로 대단했다 

[처음 만난 유럽 ④] 빵과 서커스’, 로마 말기엔 한 해의 반이 축제였다 

[처음 만난 유럽 ⑤] 로마, ‘드라마틱’과 ‘로맨틱’ 그 사이 어디쯤 

[처음 만난 유럽 ⑦] 이제 부국 스위스에 ‘빈사의 사자’는 없다 

[처음 만난 유럽 ⑧] 주마간산 스위스취리히에서 반나절

[처음 만난 유럽 ⑨] 오버투어리즘 이전물의 도시 베네치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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