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승지 파리에서의 하룻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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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밝혔듯 상트페테르부르크 여행은 비행기를 갈아타야 하지만 아주 싼 항공료에 꽂힌 딸애의 제안으로 이루어졌다. 우리는 파리로 가서 하룻밤을 묵은 뒤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들어갔고 나올 때도 역순이었는데, 대신 드골 공항에서 바로 비행기를 갈아탄 점만 달랐다.
환승 때문에 하룻밤을 묵은 파리
7월 24일 오후 2시에 우리는 파리 샤를 드골 공항에 도착했다. 택시를 타고 파리 시내 호텔에 체크인한 게 3시쯤, 잠깐 휴식한 뒤, 우리는 서둘러 시내 관광에 나섰다. 우리 내외는 2016년 4월에 이은 두 번째 방문, 딸애도 파리는 2011년에 이은 7년 만이었는데, 아들 녀석만 초행이었다.
2016년 퇴직 기념으로 아내와 함께 떠난 패키지 유럽 여행에서 파리는 첫 여행지였다. 첫날 밤에 호텔에서 묵은 뒤, 다음 날 루브르박물관과 몽마르뜨언덕, 개선문 에펠탑 등 주요 관광지를 종일 돌고 밤에는 센강 유람선을 탔다. 그리고 하룻밤 더 묵고 새벽에 파리 동역에서 기차를 타고 스위스로 갔으니, 부리나케 다니긴 했는데, 막상 견문을 정리할 틈도 없었다. 패키지 여행자에겐 여행 과정에 관여할 어떤 권리도 없는 법이었으니.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10까지 대충 6시간쯤이었다. 딸애는 그 시간을 알뜰하게 쓸 수 있는 동선으로 에펠탑과 콩코드 광장 주변, 센강을 거슬러 올라 노트르담 사원을 돌아보는 일정을 짰다. 초행인 제 남동생을 고려한 일정이었다. 에펠탑이나 개선문 같은 유적이라면 한 번 더 보는 게 지겨울 리가 없다. 수박 겉핥듯 스친 기왕의 견문을 새롭게 복기하는 셈이기 때문이다.
날씨는 25도를 넘어 좀 후덥지근했다. 에펠탑 주변을 구경하고 기념사진을 찍으면서 나는 이태 전의 기억과 현재의 광경을 겹쳐보려 했지만 그게 쉽지 않았다. 방향이 기억과는 정반대인 듯한 느낌이 있는가 하면, 그땐 눈에 들어오지 않았던 풍경이 새삼스럽게 보이기도 했다.
에펠탑과 콩코드 광장, 그리고 튀일리 정원
에펠탑에 오르는 건 시간 관계상 불가능했으므로 거기서 머물다가 우리는 센강 근처에서 우버 택시를 불러 콩코드 광장으로 이동했다. 2016년 패키지 팀의 버스는 이 광장을 스쳐 지나갔었다. 나는 차창으로 이집트에서 가져온 오벨리스크를 멀거니 건너다볼 수밖에 없었다.
콩코드 광장은 ‘루이 15세 광장’으로 불리다가 프랑스 혁명이 일어난 뒤 ‘혁명 광장’이 되었다. 루이 16세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단두대에서 참수된 형장이기도 했던 이 광장은 1795년 화합, 일치라는 뜻의 콩코드(Concorde) 광장으로 불리기 시작했다.
광장의 중심에 세워진 오벨리스크는 이집트 룩소르 신전에서 가져온 룩소르(Luxor) 오벨리스크(클레오파트라의 바늘)다. 기원전 1260년경에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이 오벨리스크는 약탈 문화재는 아니다. 1829년 이집트 총독이었던 무함마드 알리가 프랑스에 선물하였는데, 4년이나 걸려 프랑스로 운송되었다.
광장을 지나 루브르박물관 쪽으로 이어진 아름다운 정원이 튀일리정원이다. 박물관과 튀일리궁전 사이에 있는 이 정원은 1564년에 튀일리궁전의 정원으로 조성되었으나 프랑스 혁명 이후 공공 공원으로 개원했다. 튀일리정원은 곳곳에 기하학적 구도와 칼로 자른 듯한 가로수가 이어지는 프랑스식 정원이다.
퐁네프와 노트르담 대성당
루브르박물관을 돌아 센강을 거슬러 오르다 만난 다리 퐁네프(Pont Neuf)다. ‘퐁네프’는 센강에 건설된 36개 다리 중에서 ‘퐁네프의 연인들’이란 영화 덕분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한 다리다. 다리 위에 사는 부랑자 알렉스와 시력을 잃어가는 화가 미셸이 만나 사랑을 나누고 춤을 추던 영화의 배경이지만 실제 퐁네프는 평범한 다리다.
다리 난간에는 연인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빌며 남기고 간 자물쇠들이 수북하다. 자물쇠처럼 자신들의 영원한 사랑을 빌면서 남긴 사랑의 징표지만, 사랑은 영원하기보다는 변하기가 더 쉽다. 견고한 듯 보이지만, 열쇠를 넣어 돌리기만 하면 열리는 자물쇠는 결국 그런 사랑의 이중성을 은유하고 있는지 모른다.
우리는 퐁네프를 건너 노트르담 대성당을 찾았다. 노트르담 드 파리 대성당은 프랑스 후기고딕 양식으로 프랑스 고딕 건축의 정수로 일컬어지는 건축물이다. ‘노트르담’은 ‘우리의 귀부인’(성모 마리아)이라는 뜻의 프랑스어로 이 성당은 로마 가톨릭교회의 파리 대주교좌 성당으로 쓰이고 있다.
‘노트르담’은 늘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우리나라에서는 <노트르담의 곱추>로 번역됨)으로 익숙한 이름이다. 앤서니 퀸이 주연한 동명의 영화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 영화를 잘 알려진 이 소설의 배경이 노트르담이다.
우리는 서양의 성당이나 교회를 ‘절 사(寺) 자’ ‘사원(寺院)’이라는 이름으로 배우며 자랐다. 우리나라의 불교 사찰도 굳이 사원이라고 쓰지 않는데, 왜 서양 기독교 회당을 사원이라 번역한 것일까. 서구 교회가 개신교와 천주교, 정교회 등으로 나뉘는 것을 고려해서 그랬을까.
노트르담 대성당은 그 규모와 아름다움에서 압도적이었다. 적지 않은 관광객들이 모인 성당 앞 광장이 왜소해 보일 정도였다. 아내와 나는 2016년 파리 여행에서는 찾지 못했던 이곳을 다녀갈 수 있었던 것만으로도 이번 자투리 파리 여행은 성공이라고 여겼다.
보수 공사 중이던 노트르담 대성당의 첨탑 주변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은 1년 뒤인 2019년 4월 15일 오후 6시 50분쯤이다. 약 10시간 동안 이어진 화재는 첨탑과 첨탑을 받치고 있는 나무 지붕을 무너뜨렸다. 이 화재는 세계적 화제가 되었는데 프랑스는 첨탑을 현대식이 아닌 19세기 원형 그대로 복원하기로 했다고 한다. 마크롱 대통령의 공언대로 5년 안에 노트르담은 복원될 수 있을까.
파리의 백야에 다시 만난 개선문
성당 앞 레스토랑에서 현지식 메뉴로 식사하고 우리는 개선문이 있는 샹젤리제로 이동했다. 오래 걸어서 다리가 아팠지만, 호텔 근처에 있는 개선문을 빼먹을 수는 없지 않은가. 개선문에 닿았을 때는 밤 9시께였는데, 거리는 아직도 밝았다. 밤 9시에 해가 지는 백야현상이 나타나는 파리의 여름인 것이다.
샹젤리제의 에투알 개선문은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에서 죽은 전사자들을 기리기 위하여 세워진 거대한 개선문이다. 개선문 아래에는 당시 전쟁에서 프랑스가 거둔 모든 승전보와 지휘관들의 이름이 돋을새김 되어 있으며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죽은 이들을 기리는 무명용사들의 무덤도 있다. [관련 글 : 개선문 거리에 이제 ‘망명자’는 떠나고]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아치 구조물인 파리의 개선문은 승리의 개선문이긴 하지만, 거기 묻힌 사람들 때문에 좀 슬픈 건축물이다. 한국전에 참전했다 전사한 프랑스 군인 262명을 위한 동판을 보는 느낌도 좀 특별하다. 프랑스의 젊은이들이 6·25전쟁에서 죽어야 했던 이유야 모두 알지만, 그 죽음은 슬프지 않은가.
10시가 넘어 우리는 호텔로 돌아와 잠자리에 들었다. 이태 전의 여행에서 묵었던 낡고 비좁은 호텔과는 달리 호텔은 깨끗하고 쾌적했다. 그것은 종일 파리를 거닐었던 피로를 풀어주었고, 다음 날 상트페테르부르크행을 은근히 기대하게 해 주었다. ‘잠은 가려서 자라’는 속담은 틀린 게 하나도 없었다.
2020. 8. 27. 낮달
① 예르미타시, ‘피의 일요일’과 ‘2월·10월 혁명’
② 카잔 성당과 피의 구원 성당, 그리고 레닌그라드 포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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