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만난 유럽⑤] 로마 ② 고대에서 근대로의 여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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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가끔 연극처럼 그 전개가 역동적이고 경이로운 상황을 일러 ‘드라마틱(dramatic)하다’고 표현한다. 그것은 고여 있는 일상을 일거에 깨뜨리는 파한과 파격의 시간이다. 드라마틱한 시간의 전개 가운데 으뜸은 역사다. 때로 역사는 드라마의 그것을 뛰어넘기도 하기 때문이다.
나라의 크기와 무관하게 역사는 극적으로 전개되지만, 단일 국가가 아니라 세계적 제국을 건설했던 로마의 경우 그 극적 성격은 더 두드러질 수밖에 없다. 왕정에서 공화정을 거쳐 제정으로 전개된 2천 년의 역사에 아롱진 숱한 정복 전쟁과 권력 투쟁에서 흘린 피의 성찬(盛饌)이야말로 ‘드라마틱 로마’의 진면목이 아니던가 말이다.
벤츠 승합차가 포로 로마노(Foro Romano, 라틴어-‘포룸 로마눔’ Forum Romanum)가 내려다보이는 카피톨리노(Capitolino) 언덕에 일행을 부려 놓았을 때, 사람들 사이에서는 탄성이 절로 터져 나왔다. 언덕 아래 저지대에는 믿어지지 않는 고대의 흔적이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는데, 거기서 문득 내가 떠올린 게 ‘드라마틱 로마사(史)’였다.
로마의 ‘아고라’, 포로 로마노
기둥과 초석만 남은 건물의 잔해와 허물어지고 파묻힌 축대, 군데군데에 돋아난 풀, 여기저기 흩어진 돌덩어리만 나뒹구는 포로 로마노는 쓸쓸하고 황량했다. 그러나 교과서에서나 만났던 도리아·이오니아·코린트·토스카나식 따위로 구분하는 돌기둥만으로도 로마의 ‘드라마틱한 고대’를 상상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포로는 ‘로마의 아고라(agora)’, 도시 중심에 있었던 공공 복합장소였다. 포로 로마노는 로마의 정치, 경제, 문화가 결정되고 시행되던 중심지였다. 화폐의 발행과 도량형의 통일도 여기서 이루어졌다. 웅장한 공회당과 신전, 원로원, 법원과 시장 등이 모인 이 광장에서 시민들은 정보를 교환하고 여론을 형성하고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아고라가 민주주의의 요람이었듯이 기원전 6세기 무렵 수도 로마에 개설된 최초의 광장 포로 로마노는 공화정 시대(B.C. 510~B.C. 28)가 전성기였다. 처음 광장이 형성된 뒤 영토가 확장되던 공화정 시대에 포로는 급격하게 확장되었다.
기원전 180년께에는 시민들이 실내에 모일 수 있도록 바실리카(길쭉한 사각형의 건물) 형태의 공공건물이 처음으로 건립되는 등 포로는 로마 정치의 중심지가 되었고, 각종 신전이 계속 지어졌다. B.C 52년 카이사르는 포로를 북쪽으로 넓혔고 이후 아우구스투스, 베스파시아누스, 네르바, 트라야누스 시대에도 확장은 계속되었다.
제정이 시작(B.C. 27)되면서 포로에는 적지 않은 변화가 있었다. 사망한 황제를 신격화하는 신전과 그의 업적을 기리는 개선문, 승전탑 등 각종 기념물이 들어서게 되면서 서기 3세기부터는 포로는 각종 기념물과 건물로 포화상태에 이르렀다.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내려다보이는 그 시절의 포로 로마노는 빽빽하게 들어찬 건물들로 답답해 보였을 것이다. 그러나 로마가 ‘제국’으로 성장하면서 포로 로마노도 확장되었지만 그것은 한편으론 로마의 쇠락과도 일정하게 이어지고 있었다.
언덕의 난간에 붙어 서서 우리는 거의 2천 년 전후의 고대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기원전 5세기에 지었다는, 최고신 유피테르((Iuppite, 영어-주피터Jupiterr)의 아버지인 농업의 신 사투르누스(Saturnus) 신전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공화국 시대에 국가 보물을 갈무리하기도 했다는 이 신전 터에 남은 8개의 거대한 이오니아식 기둥이 주변을 압도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사투르누스 신전 뒤쪽에 수직으로 서 있는 구조물이 셉티무스 세베루스(Septimius Severus)의 개선문이다. 203년 셉티미우스 세베루스 황제의 즉위 10년을 기념하여 세워진 이 문은 이슬람 국가들과의 전쟁에서의 승리가 새겨져 있다. 이 문은 세베루스 황제와 그의 두 아들 카라칼라와 제타에게 헌정된 것이라 한다.
신전과 개선문 뒤로 지붕만 보이는 주황색 건물이 원로원(Curia Julia)이다. 공화정 시대 최고 정치 기관인 원로원은 집정관의 자문을 담당하면서 로마의 외교·재정 등의 결정권을 장악한 실질적인 통치 기구였다. 중세에 성 아드리아노 성당으로 사용되었던 원로원의 현재 건물은 1930년대에 무솔리니가 복원한 것이다.
카이사르, ‘드라마틱’ 로마의 원조
포로 로마노의 원로원은 종신 독재관이 된 카이사르(Caesar, B.C 100~B.C 44)가 자신을 프린켑스(로마 제1시민)이라 부르면서 사실상 황제나 다름없는 권세와 절대 권력을 누리다가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카이사르는 ‘드라마틱 로마’의 가장 눈부신 주역 가운데 한 사람이다.
첫 집정관 시절에 국유지를 민중에게 나누어주는 ‘농지법’을 시행하는 등 개혁을 추구했던 카이사르는 보수 세력의 집중 견제를 받았다. 갈리아 지방을 제패하고 집정관이 되고자 로마로 들어오려는 카이사르에게 원로원은 루비콘 강 앞에서 군대를 해산한 뒤라야 로마로 들어올 수 있다고 통보한다. 카이사르는 자신이 갈리아 총독 지위를 유지한 상태에서 집정관에 출마할 수 있게 허락해 달라는 타협안을 내지만 원로원은 이를 거부한다.
휘하에 8개 군단을 거느리고 있으면서 목숨을 적에게 내 줄 바보는 없다. 당시 로마는 내란을 방지하기 위해 ‘루비콘강을 건너기 전에 무장을 해제하지 않으면 반란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카이사르는 자신의 군대와 함께 루비콘 강을 건넌다. 기원전 49년 1월이었다. 망설이는 군사들에게 행한 연설의 마지막에서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주사위는 던져졌다(alea iacta est).”
카이사르는 로마에 입성하여 단독 입후보하여 집정관이 되었고, 기원전 46년, 내전 끝에 원로원 세력을 몰아내고 로마의 권력을 장악한다. 당시 로마의 공화정 체제가 적합하지 않다고 생각한 카이사르는 급진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로마가 지중해 전역을 다스리는 거대 제국이 되면서 이미 공화정 통치체계는 여러 문제점과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카이사르는 옛 로마력을 버리고 1년을 365일로 정하고 4년에 한 번씩 윤년을 둔 율리우스력을 만들었다. 그는 자신이 태어난 7월을 애칭인 율리(July)로, 다음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8월을 자기 이름인 아우구스투스(Augustus)로 바꾸었는데 이는 영어의 7(July), 8월(August)의 어원이 되었다.
카이사르는 로마 최초의 국립도서관과 원로원인 쿠리아 율리아(Curia Julia)를 세웠다. 또 B.C. 2세기의 법정을 확장한 공회당 바실리카 율리아(Basilica Julia)와 마르켈루스 극장을 건설하였고 세르비우스 성벽을 허물어 도시를 확장했다. 그는 또 교사와 의사에게 로마 시민권을 제공했고 갈리아와 시칠리아의 속주민(屬州民)에게 각각 로마 시민권과 라틴 시민권을 부여했다.
기득권 귀족들은 개혁에 저항했지만, 카이사르의 정치적 독주는 이어졌다. 키케로와 카토 등 귀족들은 카이사르가 공화정을 무너뜨리고 1인 독재로 치달을 것을 우려했다. 기원전 44년, 마침내 카이사르는 원로원에서 암살자들의 칼에 맞고 쓰러졌다.
“암살자들은 카이사르를 그의 옛 적수였던 폼페이우스의 흉상으로 밀어붙였다. 이 때문에 흉상은 피로 물들었다. 카이사르는 모두 23군데의 상처를 입었다. 한 사람을 찌르기 위해 많은 칼이 난무한 탓에 암살자들은 서로의 칼에 찔려 상처를 입기도 했다.”
- 역사가 플루타르코스(Plutarchos)
카이사르가 암살자들의 칼을 맞은 것은 파르티아 원정을 떠나기 전 불과 사흘 전이었다. 암살자들은 아이러니하게도 카이사르 휘하의 청년 장교들이었다. 이들의 거사 동기는 카이사르가 보여준 제정(帝政)으로 가는 행보에 대한 실망 때문이었다고 전한다.
살해자들은 피 묻은 단검을 손에 들고 시가지로 뛰어나와 “자유는 회복되었다!”, “폭군은 죽었다!”고 외쳤지만 아무도 거기 화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오히려 그들은 카이사르를 숭배했던 시민들로부터 쫓기다 죽었고, 카이사르는 죽었지만 그의 양자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투스’가 되어 로마 제정을 열었던 것이다.
암살로 스러졌지만, 카이사르는 공화정 로마를 끝내고 제정으로 가는 길을 열었다. 그에 대한 평가가 “공화정에 한니발과 피로스(B.C. 280년에 로마를 침공한 에피루스의 왕)를 합한 것보다 더 많은 피해를 입히고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모범으로 삼았던 독재자의 전형”과 “민중의 마음을 잘 헤아렸던 현명한 지도자”로 극명하게 엇갈리는 이유다.
“‘위안부’라는 참 상냥한 이름”이라는 망언으로 자신의 진면목을 보여준 일본 작가 시오노 나나미(塩野七生)가 쓴 <로마인 이야기>를 즐겨 읽은 한국의 독자들은 카이사르의 위대성을 의심치 않을지 모른다. 권력을 쟁취한 승자에 대한 그의 선호는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 다섯 가지(지성·설득력·지구력·자제력·지속적인 의지)를 모두 갖춘 인물로 카이사르를 꼽지만 오늘날 서양에서의 그의 평가는 반드시 우호적이지만은 않은 것이다.
제정이 이어지면서 공회당의 기능은 쇠퇴했고 정치 활동의 중심이 황제의 궁전이 있는 팔라티노 언덕으로 옮겨지자 포로 로마노는 쇠퇴하기 시작했다. 이후 교황권이 강화되면서 적잖은 건물들이 성당으로 전용되었고, 세속왕권과 권력투쟁에서 교황권을 지키기 위한 요새로 바뀌는 과정에서 포로의 석재들은 건축 자재로 활용되기도 하는 등 포로 로마노는 서서히 폐허가 되어갔다.
공화정을 뒷받침하는 기능을 잃어버린 포로 로마노는 르네상스 초기에 거의 파괴되고 흙으로 덮여 양이나 소를 방목하는 목초지로 전락하기에 이르렀다. 포로 로마노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를 자처한 독일의 카를 5세가 로마를 침략(1527)해 약탈과 파괴를 일삼을 때 거의 결딴이 나고 말았다. 방치되던 포로 로마노는 19세기 후반부터 발굴되기 시작해 지금도 발굴과 복원작업이 이어지고 있다.
카피톨리노 언덕, 그라쿠스 형제의 개혁과 좌절
포로 로마노를 뒤로하고 로마의 최고 신인 유피테르 신전이 있어 고대 로마에서 가장 신성한 장소였던 카피톨리노(캄피돌리오의 형용사형) 언덕을 마저 오르자 해발 59m의 캄피돌리오(Campidoglio) 광장이 나타났다.
카피톨리노 언덕은 그라쿠스(Gracchus) 형제, 티베리우스(Tiberius, B.C. 163~B.C. 132)와 가이우스(Gaius, B.C. 154~B.C. 121)의 개혁이 좌절된 곳이다. 드라마틱 로마의 또 다른 주역인 그라쿠스 형제는 각각 호민관이 되어 로마 공화정과 군대의 핵심인 자영농의 붕괴를 막기 위해 농지 개혁을 추진하다가 개혁에 반대하는 원로원의 귀족들에게 제거되었다.
호민관 티베리우스는 신성한 카피톨리노 언덕에서 시민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살해되었고, 그를 지지한 수백 명의 민중들과 함께 티베르강에 버려졌다. 아우 가이우스도 11년 후, 원로원에 의해 ‘공화국의 적’으로 규정되어 진압될 때 자살해 포로 로마노에 효수되었고 몸뚱이는 티베르 강에 던져졌다.
형제가 죽은 뒤, 원로원은 그라쿠스 개혁의 대부분을 무효로 만들고 토지개혁도 무산시켰다. 예나 지금이나 기득권의 성채는 높고 완강한 것, 로마의 귀족들은 단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그라쿠스 형제의 토지 개혁은 기원전 59년 부의 재분배가 시급한 문제임을 확인한 카이사르의 ‘농지법’으로 뒤늦게 이루어졌다.
캄피돌리오 광장은 1547년, 미켈란젤로의 구상에 따라 12세기께 세워진 세나토리오(Senatorio)궁을 중심으로 건설되었다. 원로원 의원들의 집회 장소였던 세나토리오궁은 현재 로마 시청사로 쓰이고 있고 좌우의 건물은 카피톨리노 박물관과 팔라초 콘세르바토리(미술관)다. 광장 한가운데에 있는 청동 기마상은 로마 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다.
유서야 깊지만 로마에서 가장 작은 이 광장을 설계한 이는 미켈란젤로다. 그는 투시법을 이용해서 좌우 건물을 서로 비스듬히 배치함으로써 광장이 실제보다 더 넓어 보이게 만들었다. 그의 천재적 발상은 캄피돌리노 언덕으로 오르는 계단인 ‘코르도나타(cordonata)’라 불리는 완만한 경사의 계단에서 빛난다.
코르도나타 계단은 길이가 꽤 되지만 아래에서 보기엔 실제보다 짧아 보인다. 원래 올려다보는 계단은 원근감 때문에 윗부분이 좁아져 마치 마름모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계단은 원근감을 없애기 위해 올라갈수록 폭을 넓히도록 설계하였고, 그로 인한 착시현상 때문에 계단의 길이가 짧아 보이게 된 것이다.
로맨틱 로마와 <로마의 휴일>
그 흥망성쇠는 물론이고, 로마 사에 명멸해 간 인간의 삶과 투쟁의 서사가 드라마틱하기만 했던 것은 물론 아니다. “현실적이기보다는 신비롭고 달콤하며 환상적인 데가 있다”는 뜻으로 쓰이는 ‘로맨틱(romantic)함’의 근원도 로마였기 때문이다.
대제국 로마는 한 시대의 표준이고 준거였다. 로마제국이 팽창하면서 유럽 곳곳에 라틴어의 방언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로마인이 퍼뜨린 말이라고 하여 이를 통틀어 ‘로망스(romans)’라 불렀다. 이 방언들이 오늘날의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스페인어, 포르투갈어, 루마니아어가 되었다.
라틴어와 그리스어가 종교적·학술적·정치적·철학적 의미를 전하는데 주로 사용되었다면 이 로망스 방언들은 주로 대중적이고 서민적인 이야기를 담는 데 쓰였다. 거의 대부분 남녀 간의 애틋한 연애 이야기가 섞여 있는 이 방언으로 된 이야기는 뒤에 ‘로망스(romances)’로 불리게 된다.
어군(語群)을 뜻하든, 문학의 한 장르이든 간에 로망스는 오늘날 로맨스(romance)와 로맨틱(romantic), 로맨티시즘(romanticism)의 어원이었다는 얘기다. 그것은 더 거칠게 풀면 ‘로마’로부터 파생된 낱말이니, 로맨틱은 말 그대로 ‘로마적(的)’이라는 뜻이었다고 해도 좋겠다.
로마제국의 역사에서 클레오파트라와 카이사르, 그리고 안토니우스의 연애도 로맨틱한 것이었지만 역시 로맨틱 로마는 20세기 로마에서 찾는 게 훨씬 쉽다. 1950년대에 나온 영화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1953)은 일약 수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 유서 깊은 도시를 ‘낭만’의 도시로 재창조했기 때문이다.
여주인공 오드리 헵번(1929~1993)에게 오스카상을 안긴 이 영화는 유럽의 어느 왕국의 공주와 미국인 신문기자(그레고리 펙)와의 러브스토리다. 둘의 애틋한 사랑만큼이나 영화에 등장하는 로마의 명소들도 새로운 이미지를 더하게 되었다.
트레비(Trevi) 분수는 영화에서 대사관을 몰래 빠져나온 앤 공주가 신문기자 조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시작하는 로마 ‘자유’ 관광의 첫발을 떼는 곳이다. 공주가 인근 미용실에서 머리를 짧게 자를(이 쇼트커트 헤어스타일은 전 세계적 유행이 되었다.) 동안 분수 앞에서 그녀를 기다리던 조가 어린이에게 사진기를 빌리려다 실패하는 곳이기도 하다.
1453년 교황 니콜라우스 5세의 명으로 만들어진, 로마에서 가장 큰 규모의 이 분수는 1762년 교황 클레멘스 13세 때 바로크 양식으로 다시 단장되었다. 분수의 수원(水源)은 전쟁에서 지쳐 돌아온 로마 병사들에게 물을 제공해준 여인의 설화가 담겨 있는 ‘처녀의 샘’이다. 분수의 트리톤(Triton) 상 위에 서 있는 네 여인은 사계절을, 트리톤 상 옆의 두 여인은 각각 건강과 풍요의 여신을 상징한다고.
로마의 유적들 대부분이 그렇듯이 트레비 분수 앞도 관광객으로 붐빈다. 사람들의 울타리 때문에 사진을 찍어도 분수가 제대로 나오지 않을 정도였다. 사람들은 다투어 사진을 찍고 분수에 동전을 던지곤 했다. 분수에 동전을 던지면 소원이 이루어진다거나 언젠가 다시 로마로 오게 된다고 믿는 전통 때문이다. 그러나 정작 사람들은 재미로 동전을 던지는 것 같았다.
햇볕은 따가웠고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가이드의 충고를 따라 분수 주변의 그늘을 찾아 맴돌았을 뿐 우리는 동전을 던지지 않았다. 대신 여느 관광객과 다르지 않게 아내와 나는 젤라토를 사 먹었지만 그게 소문만큼 훌륭한 맛인지 어떤지는 알지 못했다.
스페인 광장을 거쳐 스페인 계단에 도착했을 때 강렬한 햇볕 때문에 나는 얼마간 지쳐 있었다. 파리에 아닌 ‘스페인’ 광장이라는 이름이 붙은 것은 거기가 17세기부터 바티칸 주재 스페인 대사관 주변에 만들어진 광장이기 때문이다.
스페인 광장 중앙에 물에 반쯤 잠겨 있는 배 모양의 분수가 있다. 바르카치아(Barcaccia) 분수다. 바르카치아는 ‘쓸모없는 오래된 배’라는 뜻으로 스페인 광장 일대가 홍수로 잠겼을 때 떠내려 온 배와 난파선에서 물이 새어나오는 이미지를 바로크 양식으로 형상화했다.
분수 주변은 트레비 분수 쪽보다 훨씬 많은 인파로 붐볐다. 오른쪽 언덕에 솟아 있는 트리니타 데이 몬티(Trinita dei Monti, 삼위일체) 성당이 공사 중이어서 계단으로의 출입을 통제하고 있어서였을까. 15세기 프랑스 수도회에서 세운 삼위일체 성당은 로마에서는 보기 드물게 종탑이 두 개다. 종탑 앞에는 성당에 어울리지 않게 오벨리스크 한 기(基)가 서 있었다.
1725년에 프랑스 대사관의 도움을 받아 이 성당과 스페인 광장을 잇는 137개의 계단이 만들어졌는데 이 계단이 스페인 계단이다. 성당으로 오르는 계단은 프랑스인이 프랑스의 도움을 받아 지었는데도 그 이름을 ‘스페인’에게 빼앗긴 셈이다.
스페인 계단은 오드리 헵번이 거기 앉아 젤라토를 먹고 그레고리 펙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영화 <로마의 휴일> 덕분에 유명해졌다. 쇼트커트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앤이 스페인 계단에서 젤라토를 먹고 있는 장면은 영화사에 길이 남을 컷이다. 뒤쫓아 온 조에게 앤은 그렇게 말한다.
“상상 못 하실 거예요. 온종일 좋아하는 것만 하고 싶어요.”
‘노상 카페에 앉고 쇼핑을 하고 빗속을 걷는 일이 재미있고 흥미로울 거’라는 공주의 평범한 일상에 대한 동경을 관객들은 이해하고도 남았을 것이다. 왕실의 제약과 빡빡한 공식 일정에 묶여 있던 이 왕녀의 휴일은 아름다운 로마의 풍경과 함께 온 세계의 영화팬들에게 얼마나 다정하고 로맨틱하게 다가왔던가.
기자회견에서 조와 앤은 다시 만나지만 그들은 각자의 위치로 돌아와 서로를 말없이 응시한다. 왕녀가 낯선 곳에서 만난 낯선 사람과의 로맨스, 일상에서의 달콤한 일탈은 그렇게 막을 내린다. 조가 모두 떠나버린 빈 대사관의 긴 복도를 걸어 나오는 엔딩 신의 여운도 쓸쓸하다. 그것이 로마의 사랑, 로맨스의 본질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2016. 7. 8.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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