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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여행, 그 떠남과 이름의 기록

원주, 허물어진 절터를 찾아서

by 낮달2018 2019. 6.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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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답사기 ①] 원주 흥법사(興法寺)터와 법천사(法泉寺)터, 거돈사(居頓寺)터

▲  흥법사지 삼층석탑 (보물 제464 호).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다 .

애당초 길을 떠날 때의 목적이야 뻔하다. 답사다운 제대로 된 답사를 하겠다는 다짐도 다짐이거니와 미리 목적지 정보를 간추려 들여다보면서 머릿속이나마 챙길 것과 버릴 것을 가늠해 놓는다. 그러나 막상 길을 떠나 목적지에 닿으면 이런 다짐과 계획은 어긋날 수밖에 없다.

답사하고자 한 유적지가 언제나 내 뜻대로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미리 파악한 정보가 유적의 변화를 담고 있지 않을 때도 있고, 작정하고 수십에서 수백 장의 사진을 찍지만, 촬영 결과가 썩 마음에 들지 않을 때도 많다. 무엇보다 돌아와서야 빠뜨린 풍경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의 실망은 오래 마음에 앙금으로 남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지각답사기’를 쓰게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시간’이다. 주말을 이용해 다녀온 여행, 돌아오면 일상이 한가하게 차근차근 답사기를 끝내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하루 이틀이 지나고, 한 주가 흐르고 나면 필경 그 답사기는 미완의 상태로 컴퓨터에 묵은 파일로 잠자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결국 그것 때문에 철 지난 답사기를 쓰게 하기는 하지만 시간은 괜찮은 ‘스승’이다. 다녀와서 금방은 썩 마음에 들지 않던 사진과 거기 담긴 느낌들을, 한 해쯤 후 한결 그윽하게 하는 것도 역시 시간의 몫이기 때문이다. 시간이 강파른 마음의 모서리를 다스려주는 것일까. 훨씬 넉넉한 마음으로 지나간 시간의 흔적을 복기하는 순간은 행복하다.

작정하고 쓰는 글이지만 이 글이 얼마나 갈지, 얼마나 성실하게 이어갈지는 알 수 없으니 계획은 따로 적지 않는다. 그것을 정하지 않는 것은 독자에게 압박받지 않고 여유롭게 글을 쓸 수 있는 블로거들의 특권이기도 하니까 말이다.

원주, 허물어진 절터와 돌탑을 찾아서

▲  흥법사지 삼층석탑 .  전형적인 고려 석탑이다 .

학교에서 우리는 원주(原州)를 강원 내륙의 군사도시로 배웠다. 강원도 내륙은 관광 목적이 아니라면 드나들 일이 별로 없다. 다른 데 가는 길에 스쳐 지나가기도 쉽지 않다. ‘인제 가면 언제 오나, 원통해서 못 살겠다.’는 얘기에 익숙한 동부전선 쪽에서 군 복무를 한 사람이라면 또 모르겠다. 그러나 나는 군대 생활도 인천 근방에서 해 강원도 골짜기에 대해서 아는 게 없다.

 

원주 하면 떠오르는 사람은 우선은 지학순 주교다. 70년대 유신독재에 저항했고, 80년대에도 민주화·평화·인권운동을 멈추지 않은 이 강골의 사제는, 그러나 내게 아득히 먼 존재다. 그런데 작가 박경리라면 좀 다르다. 나는 그이가 쓴 <토지>를 대략 예닐곱 번쯤 읽었고, 그이가 원주에 정착한 뒤 쓴 <원주통신>도 사서 읽었다.

 

그래서인가, 내겐 원주에 대한 일종의 환상이 있다. 한 번도 제대로 찾을 적이 없지만 내 마음속에서 이 도시가 살아 숨 쉬게 된 까닭이 여기에 있다. 중앙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원주는 좀 속도를 내서 달리면 한 시간 남짓이면 이를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나는 지난해 4월까지 원주를 찾지 못했다.

 

원주에 가보아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지난해 4월이었다. 그 전해인 2008년 5월에 박경리 선생이 돌아가시고도 들르지 못한 원주를 1주기 전에 한 번 돌아봐야겠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25일 휴무 토요일에 나는 혼자서 길을 떠났다. 아내는 무엇인가 바쁜 일이 있었고, 더 미룰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먼저 시내에 있는 토지문학공원을 들렀다. 거기서 두어 시간 머물면서 나는 선생의 흔적을 찾고 렌즈에 그걸 담았다. 규모도 작고 인위적 시설물이 오히려 거슬렸지만, 선생이 만년을 보내던 집과 가꾸던 채마밭이 선생의 숨결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지난해 5월 5일에 이에 관한 글을 블로그에 썼다. [관련 글 : 11주기, 작가 박경리를 다시 생각한다]

 

문학공원 인근의 음식점에서 점심을 먹고 나는 원주시 외곽을 한 바퀴 돌았다. 내가 찾은 곳은 원주의 면 지역에 있는 절터와 돌탑, 그리고 탑비였다. 지정면의 흥법사터와 부론면의 법천사터, 그리고 거돈사터가 내가 들른 폐사지다. 그리고 거기에는 어김없이 오래된 돌탑과 탑비가 그 지난 세월을 증언하고 있었다.

 

흥법사터, 삼층석탑과 진공 대사 탑비 귀부·이수

 

흥법사터는 원주시 지정면 안창리에 있는 강원도 문화재자료 제45호다. 절집은 남아 있지 않지만, 흥법사(興法寺)는 신라 시대의 거찰로 추정한다. <고려사>에 태조가 당시 왕사였던 진공 대사 충담(忠湛)이 입적하자 진공 대사의 부도탑이 있는 원주 영봉산 흥법사에 태조가 직접 비문을 지어 진공대사탑비를 세웠다는 기록이 전하는 것이다.

 

기록에 따르면 고려 태조가 흥법사에 선원(禪院)을 만들어 진공 대사에게 교화를 맡기자 많은 사람이 모였다고 전한다. 이는 흥법사가 인근 정산리 거돈사, 여주 고달사와 더불어 고려 전반기 선종계 사찰로 큰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하는 근거다.

 

조선 전기까지 남아 있었던 흥법사 폐사에 대한 기록은 따로 없다. 다만 임진왜란 때 소실된 것으로 추정할 뿐이다. 원래 이곳에는 삼층석탑(보물 464), 진공 대사 탑(보물 365), 진공 대사 탑비, 전흥법사염거화상탑(국보 104) 등이 있었으나 현재는 삼층석탑과 진공대사탑비의 귀부 및 이수(보물 463)만 남아 있고 나머지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  진공 대사 탑비의 귀부와 이수 .  탑신은 중앙박물관에 있다 .
▲  탑과 허수아비 .  써레질을 끝낸 밭 가장자리에 선 허수아비의 모습이 우스꽝스럽다 .

‘남자가 반드시 말을 들어야 하는 여자 가운데 하나’라는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 흥법사터에 도착한 것은 정오의 태양이 막 서로 기울기 시작할 때였다. 산비탈에 허술한 슬레이트집 한 채, 그리고 거기 어울리지 않게 트랙터 한 대가 세워져 있는 주변은 적막했다. 절터 바로 옆에는 삼포(蔘圃)가 펼쳐져 있었다.

 

차를 공터에 대면서 조금 실망하지 않을 수 없다. 철책으로 둘러싸인 탑과 탑비의 귀부와 이수는 잡초 속에서 간신히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막 써레질을 끝낸 밭 저편을 배경으로 선 삼층석탑은 한낮의 적요 속에 초라하기만 했기 때문이다.

 

보물 제464호로 지정된 이 탑은 고려시대에 조성된 돌탑이다. 이중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올렸는데, 밑 기단에는 각 면에 3구씩의 안상(眼象)이 조각되었다. 기단에 비겨 탑신이 급격하게 준 데다 지붕돌 낙수면의 물매가 급해 탑은 빈약하고 초라해 보인다. 상륜부에는 노반만 남아 있으며 탑의 높이는 3.2m이다.

 

▲  흥법사지 진공대사탑  ⓒ  문화재청

탑 주변 밭 가장자리에 붉고 검은 옷가지를 뒤집어쓴 허수아비 하나가 탑을 등지고 서 있었다. 철책 안에 드문드문 돋아난 잡초 가운데 공작새처럼 화려하게 가지를 뻗은 고목을 배경으로 안존하게 서 있는 탑은 어쩐지 쓸쓸하고 처량해 보인다. 한때는 내세에 대한 사부대중의 ‘서원(誓願)’이 이루어졌던 돌탑은 이제 ‘그만한 내력의 무심한 돌 구조물’에 지나지 않게 된 것이다.

 

입구의 길가에 탑을 노려보면서 앉아 있는 것은 보물 제463호 ‘진공대사탑비 귀부와 이수’다. 진공 대사는 당 유학 후 고려 태조의 왕사가 되어 활동한 신라 말의 고승이다. 그가 입적하자 태조가 비문을 짓고 당 태종의 글씨를 집자하여 세운 비가 진공대사탑비다. 비신(碑身)은 경복궁을 거쳐 현재 국립중앙박물관에 수장되어 있고 여기엔 ‘귀부’와 ‘이수’만 남았다.

 

귀부(龜趺)는 ‘거북 모양의 돌비석 받침돌’이고 이수(螭首)는 ‘뿔 없는 용의 모양을 새긴 비석의 머릿돌’이다. 진공 대사 탑비의 귀부는 용머리처럼 꾸민 거북이 입에 여의주를 물고 있는 형상인데 네 발로 대석(臺石)을 힘차게 딛고 있다. 비신이 있어야 할 자리에 덩그렇게 얹힌 이수는 구름문양 속에 용이 정교하고 섬세하게 조각되어 고려시대의 조각 예술의 높은 수준을 보여 준다.

 

비신이 빠진 귀부와 이수만으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것은 역부족이다. 보물로 지정되었다는 사실을 빼면 늘 거기 그렇게 서 있었던 여느 돌 구조물과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람들은 무심히 이 돌 구조물을 일별하고 지나갈 뿐이다. 사진 수십 장으로 절터를 갈무리하고 다시 길을 떠난다.

 

법천사터, 지광국사현묘탑비

▲  법전사터 골짜기에 남은 발굴조사의 흔적 .
▲  법전사터 지광국사현묘탑  ⓒ  문화재청

법천사터는 원주시 부론면 법천리에 있는 신라-고려시대의 거찰 법천사(法泉寺)의 사적이다. 법천사는 신라 말 산지 가람으로 고려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으로 중창되었는데 특히 화엄종과 더불어 고려시대 양대 종단이었던 법상종의 종찰(宗刹)로 번성하였던 절집이다. 국사였던 지광국사 해린(984∼1070)이 왕실의 비호 아래 이 절로 은퇴하면서 크게 융성하였으나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길가 느티나무 아래 차를 대고 지광국사현묘탑비로 가는 나지막한 산 중턱을 오르는데 산 아래부터 골짜기에 이르기까지 발굴조사의 흔적이 역력하다. 2001년부터 실시한 4차례의 발굴조사 결과 통일신라 시대부터 조선시대에 이르는 다양한 시기의 건물터 19동과 우물터 3개소, 석축 및 담장 유구, 계단 터를 비롯하여 금동불입상, 연화 대석, 각종 기와류와 자기류 등의 유물이 확인되었다는 흔적인 셈이다.

 

5분쯤 산 중턱을 오르자 지광국사의 부도인 ‘지광국사현묘탑’(국보 제101호)을 모셨던 탑전지(塔殿址)가 나타났다. 지광국사현묘탑은 지광국사의 부도, 즉 그의 사리탑이다. 이 아름다운 부도는 일본으로 빼돌려졌다가 지금은 국립중앙박물관에 있다. 부도가 세워져 있었던 축대 아래 탑 대신 지광국사현묘탑비(국보 제59호)가 서 있다.

 

지광국사현묘탑이 우리나라 묘탑 가운데 최대의 걸작으로 평가되듯 탑비도 고려시대 돌비로서 특징적 양식을 보여 주는 걸작품이다. 비는 거북 받침돌(귀부) 위로 비신을 세우고 왕관 모양의 머릿돌(이수)을 올린 모습이다. 당장 답사객을 압도하는 것은 여느 비석과는 견줄 수 없는 5.54m의 높이다. 그 높이는 지광국사가 누렸던 지위와 명예의 크기였을까.

▲  법천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 국보 제 59 호 )
▲  탑전지 왼쪽의 건물터에 절터에서 나온 각종 석재를 모아 놓았다 .

거북은 진공대사탑비의 그것처럼 용의 얼굴을 한 머리다. 목은 길게 곧추서서 정면을 향하고 목에는 물고기 비늘을 표현했다. 독특한 무늬가 돋보이는 등껍질은 여러 개의 사각형으로 면을 나눈 후 그 안에 왕(王)자를 새겼다. 비신에서 눈에 띄는 것은 양 옆면에 새겨진 화려한 조각이다. 구름과 어우러진 두 마리의 용이 정교하고도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다.

 

탑전지 왼쪽의 건물터에는 이 절터에서 나온 석재를 모아 놓았다. 기둥을 받치던 돌인 주초석(柱礎石), 불상의 뒤를 장식하던 광배, 계단 사이를 장식하던 대담하고 화려한 조각의 답도석(踏道石), 그리고 예배를 드리던 배례석, 석탑재 등이 그것이다. 위압적인 높이의 탑비보다 석재들을 여기저기 모아 놓은 이 건물터의 쓸쓸한 모습이 훨씬 더 마음에 감겨든다.

 

답사에서 돌아와서야 나는 법천사 당간지주를 빼먹고 돌아보지 못한 걸 알았다. 그게 내 엉성한 답사의 모습이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백과사전에서 당간지주의 모습을 확인하면서도 나는 여전히 머리를 갸우뚱한다. 이게 어디에 있었던 거지?

 

거돈사터, 삼층석탑과 원공국사승묘탑비

▲  거돈사지 삼층석탑 ( 보물 제  750 호 ). 9 세기 신라 석탑이다 .
▲  거돈사지 삼층석탑 .  높이  5.44m.

찔끔찔끔 비가 뿌리기 시작했고 나는 서둘러 다음 폐사지로 차를 달렸다. 거돈사터는 같은 부론면, 인근 정산리에 있다. 주도로를 버리고 좁은 지선도로를 구불구불 달리니 현계산 기슭의 작은 골짜기에 만만찮은 넓이의 절터가 축대 위에 펼쳐졌다.

 

거돈사(居頓寺)는 발굴조사 결과 신라 후기인 9세기경에 처음 지어져 고려 초기에 확장·보수되어 조선 전기까지 유지된 절이다. 약 7,500여 평에 이르는 절터에는 중문, 탑, 금당, 강당, 승방, 회랑 등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금당 터에 남아 있는 전면 6줄, 측면 5줄의 주춧돌로 미루어 보면 금당의 규모는 앞면 5칸 옆면 3칸의 2층 건물이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금당 터 중앙에는 높이 약 2m의 화강석 불좌대(佛坐臺)가 있고, 앞에는 9세기 신라 석탑인 거돈사터 삼층석탑(보물 제750호)이 서 있다. 통일신라 3층 정형 탑 양식을 따르고 있는 이 탑의 높이는 5.44m. 띄엄띄엄 석재들이 남아 있는 널따란 절터에 서 있는 돌탑은 좀 쓸쓸해 보인다.

▲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비 ( 보물 제 78 호 )

탑의 동쪽에는 원공국사 지종(930∼1018)를 위한 원공국사승묘탑비(보물 제78호)가 있다. 1025년 ‘해동공자’라 불리었던 최충이 비문을 지었다. 이 탑비는 원공국사승묘탑(보물 제190호)에 딸린 것이었지만 탑은 지금 경복궁 뜰 안에 옮겨져 있다.

 

귀부의 거북 머리는 진공대사탑비나 지광국사탑비와 마찬가지로 용머리같이 변화된 형태다. 이수에는 구름 위에 요동치는 용이 불꽃에 싸인 보주를 다투어 물고자 하는 모습을 섬세하고 화려하게 조각하였다. 비의 높이는 4.9m에 이르지만, 비신 폭이 넓어서인지 위압적이거나 불안해 보이지 않는다.

 

뒤편 산기슭에 재현해 놓은 원공국사승묘탑 앞에 서면 눈 아래로 절터가 한눈에 들어온다. 금당 주변에 점점이 박힌 주춧돌과 불좌대, 석재들과 그 가운데서 무연히 솟아 있는 삼층석탑이 어우러져 연출하는 풍경은 쓸쓸하고 황량하다. 폐사지의 풍경이란 으레 그럴 수밖에 없지만, 이 절터가 유난히 그런 느낌을 배가하는 것은 드넓은 규모 탓인 듯하다.

 

이번에 찾은 폐사지 세 곳의 공통점은 모두 고승의 탑비를 갖추고 있다는 점이다. 탑비는 탑에 딸린 것이나 정작 탑은 여기 없다. 모두 서울로 옮겨져 있는 것이다. 흥법사터와 거돈사터엔 있는 삼층석탑이, 법전사터에는 없다는 점이 다르긴 하다.

▲  거돈사터의 풍경 .  탑 뒤로 금당 터와 주춧돌이 보인다 .
▲  폐교 운동장에 누워 있는 거돈사 미완성 당간지주 .
▲  거돈사지 원공국사승묘탑  ⓒ 문화재청

진공이나 지광, 원공은 모두 왕사거나 국사로 당대를 대표하는 승려들이다. 이들은 모두 국보나 보물로 지정된 묘탑(부도)을 남길 만한 고승들이다. 이들이 각각 주석한 절이 원주에 모여 있었다는 것은 어떤 지역적 의미일까.

 

절터를 떠나는데 다시 멈추었던 이슬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절터에서 약 30m 아래에 있다는 미완성 당간지주를 찾느라 잠깐 헤매다가 간신히 폐교된 초등학교 운동장에서 그것을 찾았다. 돌은 학교 운동장 한쪽의 쓰레기와 풀밭에 기진한 듯 누워 있었다. 높이 9.6m의 거대한 당간지주 한 짝인데 돌을 운반하던 남매 장사 중 남동생이 죽게 되자 미완성으로 남게 되었다는 전설이 깃들어 있다.

 

해가 중천에 걸렸다. 오던 길을 되짚어 오는데, 유난히 낯선 도로 표지판이 눈에 들어온다. 이 표지판은 주도로가 아닌 마을 길, 특히 작은 다리 앞에 주로 세워져 있었던 것 같다. 표지판에는 군사도시 원주에 걸맞게 탱크가 박혀 있었다.

 

‘30’이란 숫자가 뜻하는 게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떤 이는 ‘속도’(Km/H)라 하고 또 어떤 이는 ‘중량’이라고 한다. 탱크의 무게는 기본이 4, 50t이라고 한다니 30km의 저속으로 가라는 뜻으로 새기는 게 옳을 듯하다.

▲  강원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탱크가 있는 표지판 .

내비게이션에 ‘집으로’를 찍고 나는 원주를 떠났다. 돌아오는 길, 눈 밝은 내비게이션은 차를 충주 쪽으로 인도했고 나는 충주시 엄정면 목계리에서 목계나루와 신경림 시인의 시 ‘목계장터’를 만났었다. (☞ 바로 가기) 그것은 원주여행이 남긴 가외의 소득이었다.

 

2010. 8. 3.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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