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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③] 무관 출신 문인 박영, 송당학파로 영남 학맥을 잇다

by 낮달2018 2022. 2.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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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산 톺아보기 ③] 선산 신기리 송당 박영과 송당 정사

▲ 선산읍 신기리에 있는 송당정사. 송당 박영이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친 강학의 공간이다. 오른쪽은 낙동강이다.

선산읍 신기리에 있는 송당정사(松堂精舍)를 찾은 것은 지지난해 8월 말이다. 내비게이션의 안내를 따라갔는데, 이쪽 지리에 어두워 선산인지는 알겠는데 선산 어디쯤인지 가늠이 잘되지 않았다. 차에서 내리자 야트막한 언덕에 수더분한 모습으로 서 있는 정사가 한눈에 들어왔다.

 

무관에서 영남 사림 학맥을 이은 문인으로

 

송당정사는 조선 중기 무신이자 문인인 송당(松堂) 박영(朴英 :1471~1540)이 1496년(연산군 2년)에 낙향하여 낙동강 강가에 세워 공부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강학(講學)의 공간이다. 1860년대에 중건된 송당정사는 2016년 9월 경상북도의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송당 박영의 본관은 밀양. 조부는 안동 대도호부사 박철손, 부친은 이조참판 박수종, 모친은 양녕대군의 딸이다. 왕실의 외손이었을 뿐 아니라, 그의 집은 큰 부자였다고 한다. 그는 어릴 때부터 무예에 뛰어나 담 너머 물건을 쏘아 맞히므로 부친이 이름을 ‘영(英)’이라 지어 불렀다.

 

1492년 9월 무과에 급제하여 임금을 경호하는 선전관이 되었으나 늘 자신이 무인으로서 ‘유식한 군자’가 되지 못함을 한탄했다. 스스로 무인의 길을 선택하였지만, 그에게는 학문에 대한 갈증이 있었던 모양이다. 1494년 성종이 승하하자 벼슬을 버리고 가솔과 함께 낙향을 선택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 1860년대에 중건된 송당정사는 2016 년 9 월 경상북도의 문화재 자료로 지정되었다 .

그는 낙동강 강변에 정사를 지어 송당이라는 편액을 걸고 한훤당(寒暄堂) 김굉필(1454~1504)의 도학을 계승한 신당(新堂) 정붕(1467~1512)의 문하에서 성리학을 공부하여 ‘송당학파’를 이루며 영남 사림(士林)의 학맥을 이어갔다. 송당이 스승으로 모시고 공부한 정붕은 그보다 4살 위였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정붕에게 스승의 예를 다했다.

 

정사의 마루에서 밖을 내다보면 강 건너 저 멀리 도리사(桃李寺)를 품은 냉산(冷山·691.6m)이 건너다보인다. 두 사제 사이에 유명한, 이른바 ‘냉산문답(冷山問答)’은 이때 이루어졌다. 신당이 “저 산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라고 묻자 답을 하지 못하던 송당이 어느 날, “산 밖에는 다시 산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답해 스승이 흡족해했다는 이야기였다.

▲ 정사의 내부. 앞줄은 마루, 뒷줄은 방 두 칸에 이어 마루를 두었다.

송당은 1509년(중종 4) 선전관으로 임명되었으나 나가지 않다가 이듬해 삼포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방장(助防將)으로 창원에 부임하였고 이후 1514년 황간현감, 1516년 강계부사를 지냈다. 1518년 의주목사 교지를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같은 해 동부승지에 임명되고 내의원제조를 역임하였다.

 

1519년 병조참판에 임명되었으나 병을 핑계로 사직했다. 같은 해 5월에 성절사(聖節使)로 명나라에 다녀와 조광조·김정·김식 등 신진사류가 남곤·심정·홍경주 등의 훈구 재상에게서 화를 입은 기묘사화를 피하였다. 1520년(중종 15)에 김해 사람 김억제가 김해부사 박영을 원망하여 “박영과 유인숙이 정권을 잡고 있는 대신은 제거하려고 음모하였다”라고 무고하였다. 송당은 이에 무고임을 적극적으로 주장하여 풀려났다.

 

송당은 뒤에 영남좌절도사로 임명되었으나 곧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문목(文穆)이다. 황간의 송계서원, 선산의 금오서원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당집(松堂集)>·<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백록동규해(白鹿洞規解)> 등이 있다.

▲ 송당집(왼쪽)과 국역 송당집

그는 의술에도 능하여 한때는 한의학자로 살았다. 저서 가운데 <경험방(經驗方)>·<활인신방(活人新方)>은 바로 의학 관련 저술이다.  저술이 가능할 정도라면, 독학으로 이룬 의학의 경지가 가히 최고 수준에 이른 것으로 봐도 무방할 것이다.

 

주자의 <백록동규> 주석서를 펴내다

 

<백록동규해>는 주자가 백록동서원에 학생들을 모아 도학(道學)을 가르칠 때 만들었던 윤리적인 실천규범인 <백록동규>에 대한 선유(先儒)들의 해설과 자신의 견해를 덧붙여 18세기 후반에 간행한 주석서다. 그는 비록 무인으로 출발하였으나 성리학 공부로 일가를 이루어 마침내 주자의 실천규범을 해설하는 경지에 이른 셈이다.

 

송당의 제자들은 스승을 송대(宋代)의 유학자 장횡거(張橫渠, 1020~1077)에 빗댔다. 무인에서 탁월한 유학자로 변신한 장횡거와 마찬가지로 박영 역시 무관으로 출발하여 뛰어난 성리학자로 우뚝 섰기 때문이었다.

 

무인의 기상과 문인의 기질을 두루 갖춘 박영의 학풍은 강한 실천 의지와 호방한 기질, 무인적 결단력이 두드러진 ‘송당학파’로 발전하였다. 무오(戊午 1498)와 갑자(甲子 1504), 두 사화를 겪으면서 지역 사림이 죽어가거나 전국으로 흩어졌는데 이때 정붕에서 박영으로 이어지는 송당학파가 지역의 학맥을 이어준 것이다.

 

이들은 금오서원의 창건을 주도하기도 하였고 후에 퇴계학파에 편입되어 길재로부터 시작된 영남사림의 학맥이 이어지는 데 큰 역할을 하였다. 점필재(佔畢齋) 김종직(1431~1492)의 제자인 김굉필(1454~1504)의 제자 정붕은 박영에게 도학을 전수하여 지역 학맥이 송당학파로 이어지게 한 것이었다.

 

<조선유교연원>을 저술한 장지연(1864~1912)이 “송당은 그의 학문을 일재 이항, 용암 박운, 진락당 김취성, 구암 김취문, 송계 신계성, 야천 박소 등에게 전하였는데, 대개 송당 역시 한훤당(김굉필)의 일파이다.”라고 한 것은 바로 사림 학맥의 계승을 이른 것이었다.

▲송당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 정사 뒤쪽의 사당 문목사

송당정사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홑처마 팔작기와집이다. 정사는 간결하고 소박한 구조로 구성되어 있다. 앞줄에는 마루를 깔았고 뒷줄에는 온돌방 2칸과 마루 1칸을 이었는데, 앞줄 마루와 연결되어 ‘ㄱ자’형을 이룬다. 송당정사는 건물의 규모와 구성이 기술된, 흔치 않은 중건기(重建記)가 전해 오고 있어서 건축의 유래와 변화 과정을 비교적 정확히 추정할 수 있다.

 

정사 오른쪽 노송 몇 그루 너머 낙동강이 흐르고 있고, 정사의 뒤쪽에는 사당인 문목사(文穆祠)를 두었다. 군데군데 노송이  숲을 이룬 언덕 이편에 미수(眉叟) 허목(1596~1682)이 비명(碑銘)을 쓴 박영의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 송당의 신도비.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 동남쪽에 세운 비석이다.

신도란 죽은 사람의 묘로(墓路)를 뜻하며, 신도비란 임금이나 고관의 업적을 기리기 위하여 무덤 앞 또는 무덤으로 가는 길목 동남쪽에 세운 비석이다. 조선시대에 신도비는 2품 이상의 품계를 지닌 자만 세울 수 있는 것으로 제도화되었다.

 

의술도 일가 이뤄…, 보호수 된 모과나무

 

신도비를 지나 송당정사 경내를 빠져나오는 길 왼쪽에 제법 예사롭지 않은 모양을 한 큰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보호수로 지정된 ‘송당정사 모과나무’다. 이 나무는 송당이 심었는데, 굳이 모과를 선택한 것은 약재로 쓰일 수 있어서였다고 전한다. 모과는 기침과 감기, 구토 설사, 위장병 약재로 쓰인 나무다.

▲ 송당이 심었다는 모과나무의 후계목. 250년쯤 된 보호수다. 모과가 익어가고 있다.

송당이 심은 나무라면 나이가 5백 년을 넘겠지만, 이 나무는 250년쯤 된 나무로, 송당이 키우던 나무의 후계목이라고 한다. 나무 높이는 10m, 둘레는 1.1m에 이른다. 성리학자이면서 한의학자로 살았던 송당의 백성 사랑이 이 나무를 심게 한 것이다.

 

차로 돌아와 언덕과 모과나무를 일별하면서 문득 송당정사가 깃들인 풍경이 만만치 않다는 걸 깨달았다. 거기 5백 년 전을 살다 간 한 인간의 삶, 그 무게나 깊이가 깃들여 있을 것이로되, 8월의 뙤약볕으로 지친 대기 아래 풍경은 그저 무심하기만 했다.

 

 

2022. 2. 5.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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