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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2125

김주대 시집 <그리움의 넓이> 김주대 시집 사춘기 시절부터 만만찮은(?) ‘문학소년’이었지만 나는 한 번도 내 이름을 단 시를 쓴 적이 없다. 두어 차례 시 비슷한 걸 끼적이긴 했는데, 동무들의 한 마디로 ‘기똥찬’ 시 앞에 그걸 들이대기가 거시기해 슬그머니 구겨버린 게 고작이다. 소설에 뜻을 둔 친구들도 습작시절에는 시도 심심찮게 쓰는 게 일반적이었던 것 같은데 나는 시라면 아예 손사래부터 치곤 했다. ‘습작시대’를 마감하고 ‘독자’로 돌아오던 20대의 끝 무렵에야 그게 내가 가진 ‘쥐꼬리만 한 재능’의 한계 때문이었다는 걸 알았다. 이래저래 마음이 가서 대학에서 국문학을 공부했고, 한 서너 해쯤 머물러 있기를 바랐던 교직이 평생의 업이 되었다. 초임 시절엔 입에 거품을 물고 시나 소설을 주절댔지만, 내 문학 수업의 수준은 교재에 .. 2021. 2. 6.
접시론(論), 접시야 깨지면 그뿐이지만…… ‘접시 깨기’와 ‘알아서 기기’ 사이 김국환이란 대중가수가 부른 ‘우리도 접시를 깨자’라는 노래가 크게 히트한 것은 제법 오래전의 일이다. 이 노래는 이를테면 남편 동지의 ‘가사 노동’ 분담에 관한 ‘캠페인성 가요(?)’다. 익숙하지 않은 설거지를 하다가 접시 한두 개쯤 깨는 게 무어 대수냐고 가수는 반문한다. 그렇다. 난공불락의 요새 같았던 ‘근엄한 가부장 문화’를 깨는 데 접시 두어 개쯤 상하는 일은 그저 남는 장사다. 접시가 아니라, 가정 안에서 고착화한 성역할이 깨어진다고 해서 ‘세상이 깨어지’는 일은 결코 없다. 남편의 설거지로 아내가 따낸 시간을 ‘저야 놀든 쉬든 잠자든’이라면서 휴식으로 한정하거나 ‘거울 볼 시간’으로만 풀이하는 건 아쉽긴 하지만. 서울경찰청장 ‘접시 깬 게 아니라 집 태워 .. 2021. 2. 5.
명퇴 ‘불발’ 전말기 별러서 낸 ‘명퇴’ 신청, 불발되다 지난해 하반기에 나는 경상북도 교육감에게 2015년 2월 28일 자로 교단을 떠나겠다며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우리 학교에서 명퇴를 신청한 이는 모두 다섯. 한 분은 선배였고, 또 한 분은 동갑내기 여교사, 그리고는 3~7년쯤의 후배 교사였다. 명퇴 불발은 ‘잃어버린 5년 탓’ 정년이 1년 남은 선배 교사나 동갑내기 여교사는 굳이 비교할 수 없다. 정해진 과정을 순조롭게 거치기만 해도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데다가 33개월 만기로 군 복무를 마친 나보단 경력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3년에서 7년 정도 연하의 후배 교사들이 나보다 경력과 호봉이 앞서는 걸 보면 좀 기분이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1989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내가 교단.. 2021. 2. 4.
김형근과 이시우, 그리고 국가보안법 통일교육 교사, 평화운동가를 옭아매는 국가보안법 지난 1월 29일 오랜 기간 통일 교육에 헌신해 온 한 현직 중등학교 교사가 구속되었다. 그는 ‘남다른 열정과 창의적인 방법으로 평화통일과 6·15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수업과 활동을 벌여온 김형근(군산동고등학교) 교사다. 그의 혐의는 국가보안법 위반. 이틀 후인 1월 31일, 법원은 작년 6월 구속기소되었다가, 같은 해 9월 보석으로 풀려나 재판을 받아온 사진작가 이시우 씨에 대한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에 대해 무죄를 선고했다. 그 역시 등의 책을 통해서 통일운동의 저변을 넓혀온 이다. 두 사람에 대한 검찰과 법원의 판단은 이틀 간격으로 구속과 무죄선고가 이어져 무슨 배턴 터치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 사람을 구속하는 대신 같은 혐의로 재판을 받는 피의자 .. 2021. 2. 3.
초등 교과서와 박근혜 교과서, 혹은 ‘교육부의 쓸모’ 교육부, 초등 교과서에 한자 병기 시도 기어코 정부는 초등학교 교과서에 한자를 병기(倂記)하려는 정책을 관철하려는 모양이다. 교육부는 2019년부터 초등학교 5·6학년 전 교과서(국어 제외) 일부 단어의 한자음과 뜻을 적는 ‘한자병기’를 강행하기로 결정한 것이다. 또 교과서에 병기할 수 있는 ‘초등용 한자 목록 300자’를 조만간 발표할 예정이라고 한다. 교육부의 초등 교과서 한자병기 문제는 2014년 9월 ‘2015 개정 교육과정 총론’(시안)에서 “초등학교에 적정한 한자 수를 제시하고 교과서에 한자병기의 확대를 검토한다.”라고 밝히면서부터 논란이 시작되었다. 이에 한글시민단체와 교육단체 등은 한자병기 정책 폐기 운동으로 맞섰다.[관련 기사 : 교과서 한자병기 ‘이해력’ 신장? 사교육 아니고?] 교육부.. 2021. 2. 2.
수굼포, ‘삽’과 ‘삽질’ 사이 경북 남부지방의 ‘수금포’(삽)는 네덜란드어 스콥(schop)이 어원 정진규·정희성, 두 시인의 ‘삽’ 문태준이 엮고 잠산이 그린 를 뒤적이다가 정진규(1939~ ) 시인의 시 「삽」을 발견한다. 시는 ‘삽’이란 ‘발성’이 좋다는 시인의 탄성으로 시작한다. ‘땅을 여는 연장인데’도 ‘입술 얌전하게 다물어 소리를 거두어들이는 것’이라고 하면서. ‘소리를 거두어들인다’ 함은 받침인 ‘ㅂ’ 소리가 ‘끝이 닫히는 소리’라는 말이겠다. 시인은 두 번 그 삽을 쓰겠다고 말한다. 한번은 ‘너를 파고자’, 또 한번은 ‘내 무덤’을 짓고자. ‘사랑’을 ‘얻고자’ 하는 것보다는 ‘죽음’을 거두어들일 때 쓰겠다는 부분이 서늘하게 마음에 닿아온다. 그렇다. 죽음은 그렇게 한 ‘삽’으로 거두어들이는 것이지. 문득 마음 한쪽에 .. 2021. 2. 1.
동행(同行) 다시 만난 20년 전의 제자들 공교롭게도, 하기야 이 세상에 공교롭지 않은 일이 얼마나 있을 것인가, 꼭 한 달 만에 두 명의 옛 제자를 만났다. 이미 불혹을 바라보고 있는, 어머니이자 지어미인 여제자를 만난 감회는 남다르다. 과장해 말하면, 내 ‘과거’가 그들의 ‘현재’에 맞닿아 있으니 말이다. 두 아이는 내가 초임으로 근무했던 경주지방의 한 여학교에서 내리 세 해를 내게서 국어와 문학을 배웠던 소녀들(!)이었다. 신입생과 초임 교사로 만나 졸업할 때까지 담임으로, 담당 교사로 만났으니, 그 인연의 무게가 만만찮은 셈이다. 그 시절의 갈피마다 서린 내 열정과 과잉의 의욕, 숱한 오류와 실패와 잘못을 나는 부끄러움으로 그러나, 따뜻하게 떠올린다. 스물아홉의 혈기방장한 청년이 열일곱 소녀를 만났다면 그들이.. 2021. 1. 31.
안서(岸曙) 김억, 친일부역도 ‘오뇌의 무도’였나 조선 최초의 번역시집과 창작시집을 낸 소월의 스승 안서 김억 이 글은 2019년 5월에 출판된 단행본『부역자들-친일 문인의 민낯』(인문서원)의 초고임. [관련 기사 : 30년 문학교사가 추적한 친일문인의 민낯] 우리나라 신문학의 첫 장을 연 사람들이 대부분 친일파라는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최초의 신체시를 쓴 최 남선, 첫 번째 신소설을 쓴 이인직, 최초의 현대시 「불놀이」의 주요한, 첫 현대 소설 「무정」의 이광수가 바로 그들이다. 안서(岸曙) 김억(金億, 1896~?)도 그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1921년 1월에 프랑스 상징파의 시를 중심으로 한 조선 최초의 현대 번역시집 『오뇌의 무도』를 번역해 펴냈고, 같은 해 6월에는 조선 최초의 현대 창작시집 『해파리의 노래』를 출판하였다. 소월의.. 2021. 1. 29.
이제 군가에선 ‘사나이, 아들’을 들을 수 없다 여군이 증가한 현실 반영, ‘남성’만을 가리키는 단어 쓰지 않는다 올해부터 새로 만들어지는 육·해·공군, 해병대 군가에서는 ‘사나이’나 ‘남아’ ‘아들’과 같은 남성만을 가리키는 단어가 쓰이지 않게 된다고 한다. 물론 여군이 증가한 현실을 반영한 조치다. 군가에 쓰인 ‘어휘’로 더는 군대가 남성만의 영역이 아니라는 걸 확인하게 되는 셈이다. [관련 기사] 보도에 따르면 현재 여군의 숫자는 9,253명(2014.8.3. 기준)인데 이는 전체 장교의 6.7%, 부사관의 4.5%에 이르는 숫자다. 국방부는 2015년까지 장교의 7%, 2017년까지 부사관의 5%를 여군으로 확보하겠다고 밝혀 조만간 ‘여군 1만 명 시대’가 열리게 될 것으로 보인다. 군가 등에서 ‘성 차별적’ 언어를 쓰지 않기로 그리스 신화에 .. 2021. 1. 28.
티케이(TK)의 ‘샤이(shy) 박근혜’들을 생각한다 대구 경북의 ‘샤이(shy) 박근혜’ “어쨌든 박근혜-최순실의 국정농단 사태가 주권자들의 정치적 각성을 가져온 것은 틀림없어.” 얼마 전, 누나와 형 등 우리 동기간 만남에서 정치 현안이 화제가 되었을 때 내가 거듭한 얘기다. 실제로 나는 ‘주권자’ 앞에다 우리가 사는 ‘영남’이나 ‘대구·경북’을 끼워 넣고 싶었지만, 속내가 너무 드러나는 것 같아서 자제한 발언이었다. 실제로 이 국정농단 사태 이후 대구에서 밝혀진 촛불의 규모는 우리가 기왕에 지니고 있었던 이 지역의 정치적 성향에 대한 선입견을 뒤바꿀 만한 것이었다. 전국적 파장을 지닌 의제라도 고작 일이백 명이 고작이었던 집회의 규모가 천이 되고, 만이 되는 걸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말이다. 4남매의 엇갈린 선택, 혹은 TK의 ‘샤이 박근혜.. 2021. 1. 27.
다시 ‘늦깎이’들을 기다리며 변혁의 시간에 응답한 늦깎이들의 활동으로 진보는 두터워졌다 어쩌다가 지역의 전교조 행사나 집회에 가면 낯선 얼굴들이 많다. 공식적인 역할을 떠난 지 십 년이 가까워지진 까닭이다. 그러나 낯선 얼굴들 사이에 낯익은 얼굴을 찾아 두리번거리는 경험은 절대 나쁘지 않다. 그것은 어떤 형식으로든 조직에 세대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다는 방증이기 때문이다. 40대 초중반의 단단해 뵈는 활동가들을 만나는 것은 더더욱 그렇다. 그들 가운데엔 20대 후반부터 꾸준하게 일해 온 친구들도 적지 않다. 얼마 전에 만난 한 후배 여교사는 초등학교에 들어가도 될 만큼 성큼 자란 아이의 엄마가 되어 있었다. 온갖 궂은일을 도맡았던 막내 시절의 그를 기억하면서 나는 그들을 중견 교사로 길러낸 세월을 생각했다. 교육대학이나 사범대학을 나와.. 2021. 1. 26.
‘큐 앤 에이(Q&A)’와 ‘문답’ 사이 일상어를 대체하는 영어 일전에 블로그에 올린 글, “알파벳, 괄호 밖으로 나오다(2)”은 별 호응이 없었다. 에 기사로 채택되지도 않았고 의미 있는 조회 수의 변화도 없었다. 어느 때부터인가 내왕하던 이웃들의 발길이 뜸해지면서 댓글이 달리는 경우는 드물어서 조회 수는 어떤 의미로든지 독자들의 관심을 가늠할 수 있는 지표였었다. 한글이 ( )안에 들어갈지도 모른다 어찌 어찌하다가 정년 퇴임한 선배 국어과 교사와 연락이 닿았다. 그도 의 뉴스룸을 보면서 나와 비슷한 문제의식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는 어떤 경로든지 이 문제에 대한 주의를 환기하는 게 필요하지 않겠냐고 말했다. “알파벳이 괄호 밖으로 나왔으니 이제 한글이 대신 괄호 안에 들어갈지도 모르겠어요.” 선배가 방송사에도 이의를 제기해야 하지 않겠냐고 .. 2021. 1.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