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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바람과 먼지의 세상, 그 길 위에 서서
이 풍진 세상에 /교단(1984~2016)에서

명퇴 ‘불발’ 전말기

by 낮달2018 2021. 2.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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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러서 낸 ‘명퇴’ 신청, 불발되다

지난해 하반기에 나는 경상북도 교육감에게 2015년 2월 28일 자로 교단을 떠나겠다며 명예퇴직을 신청했다. 우리 학교에서 명퇴를 신청한 이는 모두 다섯. 한 분은 선배였고, 또 한 분은 동갑내기 여교사, 그리고는 3~7년쯤의 후배 교사였다.

 

명퇴 불발은 ‘잃어버린 5년 탓’

 

정년이 1년 남은 선배 교사나 동갑내기 여교사는 굳이 비교할 수 없다. 정해진 과정을 순조롭게 거치기만 해도 뒤늦게 대학에 진학한 데다가 33개월 만기로 군 복무를 마친 나보단 경력이 많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3년에서 7년 정도 연하의 후배 교사들이 나보다 경력과 호봉이 앞서는 걸 보면 좀 기분이 씁쓸해지지 않을 수 없다. 물론 이는 전적으로 1989년 9월부터 1994년 2월까지 내가 교단을 떠나 있었던 시기의 공백 탓이다.

 

그래서 명퇴를 신청한 다섯 가운데, 나이로는 두 번째인 내 경력과 호봉이 제일 낮았다. 결론? 나는 물론 보기 좋게 미끄러졌다. 두 명의 후배도 같이. 명퇴자 심사는 경력이 우선인데, 애당초 그건 내가 지고 들어가는 게임이었기 때문이다.

 

정년까지 남은 시간은 4년. 내가 명퇴를 신청한 동기는 굳이 ‘연금제도의 변화’ 전에 교직을 떠나겠다는 생각 때문만은 아니었다. 나는 뭐랄까, 좀 지쳤고 쉬고 싶었다. 합리적 목적으로 보이지 않는 각종 학교의 변화 앞에 무력한 자신의 모습이 낯설었다. 아이들을 가르치는 게 싫지는 않았지만 내 구태의연한 가르침의 방식이 지겨웠다.

 

오매불망 명퇴를 기다리다 이번에 같이 미끄러진 인근 지역의 후배(역시 나보다 경력도 호봉도 높은) 교사는 결과를 받아들고 잔뜩 탈기해 있었다.

 

“이번엔 경력 33년에서 잘렸다는군요.”
“그래? 경력 33년을 채우려면 난 꼼짝없이 정년까지 근무해야 하는걸. 아예 포기하고 사는 수밖에 없구먼.”
“혹시 추가 발표가 있지 않을지…….”
“김칫국은 그만 마실래. 굳이 나라에서 일 년 더 벌어먹으라는데 어떡하나, 그래야지…….”

 

주변에서는 우리가 복직할 때 해직 기간을 경력으로 인정받은 거로 아는 이들이 많은데 천만의 말씀이다. 우리는 퇴직금을 받고 해임되었고 ‘신규 임용’의 형식으로 복직했다. 당연히 이전 복무기간은 호봉에 ‘산입(산입(算入)’되었지만, 해직 기간은 포함되지 않았다.

 

또 이미 퇴직금을 받았기 때문에 이전 복무기간은 연금법상의 ‘재직기간’에 포함되지 않는다. 즉 기여금을 내고 연금을 적립하는 기간은 복직 시점부터 새로 시작된다는 말이다. 굳이 이전 근무 기간을 재직기간으로 인정받고자 하면 해임될 때 받았던 퇴직금을 복리로 계산하여 내는, 이른바 ‘재직기간 합산신청’을 해야 했다.

 

5년 가까이 수입 없이 살다가 돌아온 복직 교사들에게 수천만 원에 이르는 돈이 있을 턱이 없다. 부부 교사의 경우는 그나마 사정이 나았지만, 적잖은 빚만 진 채 복직한 내게 그건 ‘언감생심’이었다. 나는 재직기간 합산 따위는 포기하고 십몇 년을 근무했다.

 

1994년에 복직했으니, 연금을 받기 위해선 2014년까지 근무해야 했다. 잊고 지냈는데 법률이 개정되면서 퇴직 전이라면 언제든 재직기간 합산이 가능해졌다. 어쩔까 망설이다 나는 거금의 대출을 받아서 재직기간 합산 신청을 했다.

 

돈을 넣고 나자, 바로 퇴직해도 연금을 탈 수 있게 되었고, 재직기간도 이전 근무 기간만큼 늘었다. ‘돈이 좋긴 좋구먼.’ 나는 당시 조금 허탈해져서 그렇게 뇌까렸던 것 같다.

 

명퇴가 불발되었다는 소식 앞에선 솔직히 입맛이 썼다. 어떻게 나가는 것도 제 마음대로 되지 않는가. 진보정당 후원 건으로 기소되어 대법원 확정판결이 날 때까지 허송한 세월이 3년이었다. 이제 겨우 자격을 얻어 명퇴를 신청했는데 미역국을 먹은 것이다.

 

그러나 난 이내 마음의 평정을 찾았다. 글쎄, 아직도 여기가 내가 있을 자리라는 거라면 어쩔 수 없는 일 아닌가. 나는 대범하게 상황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쩔 것인가. 모든 게 내 선택의 결과일 뿐이니 말이다.

 

5년의 손해, 그러나 그건 내 ‘선택’

 

기실 해직 5년의 손해(대미지 damage)는 꽤 깊고 크다. 복직하기도 전에 세상을 떠난 맏형님의 말씀처럼 내가 버린 게 어찌 ‘집 한 채’에 그칠 것인가. 교원의 급여체계가 호봉과 연동되는 상황이니 5호봉 차이의 결과는 생각보다 훨씬 클 수밖에 없다.

 

2015년도 교원 봉급표에서 확인해 보니 내 현재 호봉과 한도가 찬 호봉(40호봉) 간 봉급 차는 19만여 원이다. 고작 2호봉 차가 이런 정도니 지금껏 내가 감수해야 했던 불이익은 미루어 짐작할 만하지 않은가.

 

그러나 아무도 1989년, 그 5월의 선택을 내게 강제하지 않았다. 돌아가신 어머니, 아내가 각각 한 번씩 생각을 다시 할 수 없느냐고 했을 뿐이다. 전적으로 그건 내 선택이었다는 얘기다. 내가 농반진반으로 얘기하는 ‘집단 광기’였다고 해도 결과는 달라지지 않는다.

 

돌이켜보면 그때만큼 확신에 차서 살았던 세월이 또 있을까 싶다. 이후 내 삶의 굴곡이 적지 않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러나 다시 그런 시간이 온다면 어떨까. 솔직히 그건 쉽게 말하지 못하겠다. 내가 지켜야 할 것이 많아서가 아니라 두려워서다.

 

사는 게 두렵고, 선택에 수반되는 여러 상황을 받아들이는 게 두려워서다. 이제 나는 시나브로 용기도 담대함도 잊어버린, 아주 짜부라진 기성세대가 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걸 무심히, 무감각하게 받아들이고 있는 것이다.

 

 

2015. 2. 4. 낮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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